매일 쓰고 그리는 사람
글 김정경 시인
카페 포엠에서 김헌수 시인을 만났다. 이곳은 시인이 운영하는 카페다. 벽에는 시인이 그린 펜드로잉 작품이 걸려 있고, 낮은 책장에는 시인이 자주 쓰다듬었을 책들이 꽂혀 있다. 나긋한 봄바람이 귓불을 간지럽히는 봄의 창문 아래, 문인들 사이에서는 ‘재주 많은 사람’, ‘솜씨 좋은 사람’, ‘사람 좋은 사람’으로 통하는 그이와 오붓하게 마주 앉았다. 꽃잎처럼 부드럽지만, 묵은 가지에 새 꽃눈을 밀어 올리는 뜨거움을 가진 시인. 그의 공간에서 그가 새긴 시간의 페이지를 넘겨본다.
펜으로 채워가는 시인의 그림일기
아침에 카페에 오면 시인은 청소를 끝낸 다음 드로잉 노트를 펼친다. 매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올해 1월 1일부터 새로이 채워가기 시작한 드로잉 노트가 벌써 6권째. 그날그날 시인의 눈에 들어온 사물, 마음에 스민 사람, 먼 데서 온 소식들, 깨어난 옛일들, 이제 막 피어난 꽃들, 모든 것이 그의 글과 그림의 소재다.
“제가 주로 쓰는 게 스테들러 피그먼트 라이너라는 펜이거든요. 다른 작가들의 책 표지 그림이나 삽화 작업을 할 때도 이 펜으로 많이 그렸고, 제 시화집 『마음의 서랍』에 들어간 그림도 이걸로 다 그린 거예요. 하루하루 일기 쓰듯이 그리고 쓰죠.”
드로잉 노트 100권을 채우는 게 목표인 그는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을 몸으로 실현해 보이는 사람 같달까. 그림 역시도 시처럼 평면 안에 메시지를 응축하고 함축해서 담아내는 것이므로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이 김헌수 시인의 설명이다.
“사대부고 다닐 때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죠. 원래는 미대에 가려고 했었어요. 고3 때 어머니가 아프셔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5년 가까이 병간호를 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대학 입학이 늦어졌고, 결국 다른 전공으로 진학했어요. 그래서인지 그림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어요.”
시인에게 있어 글과 그림은 한 가지에서 피어난 꽃과 잎사귀 같다. 그는 매일 쓰고 또 그리면서 자연의 변화, 계절의 움직임에 더욱 민감해졌다. 마음이 부르는 것들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저절로 손이 움직이고 손끝에서 꽃이 피고 새가 와서 앉고 꽃나무 아래 의자 하나가 놓인다. 그 의자에 앉히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고, 그이를 다정히 불러서는 의자에 앉힌다.
가쁜 숨 몰아쉬고 명랑한 어조로 말하는 사람 / 설레는 시간을 도탑고 정겹게 다스리는 사람 / 울고 싶을 때 안겨 크게 울 수 있는 사람 / 마음 흔드는 노래를 건네고픈 사람 / 뭉클함으로 다가오는 사람 / 빈 호주머니로 나가서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 / 살뜰함의 줄기가 내게 뻗어 있는 사람 / 은은하고 헤프지 않은, 마음의 회로가 정갈한 사람 / 의자 하나 내어드립니다
─김헌수 시, 「의자」 전문
지난 2018년에 전북일보를 통해 쉰 살의 나이로 등단한 김헌수 시인. 늦은 등단과 시에 대한 목마름, 문학을 향한 곡진한 마음이 자신을 스스로 먹이고 입히는 양식이 되었으리라. 문단 데뷔가 늦어졌던 만큼 습작생으로서의 기간도 길었고, 그간 신춘문예며 신인상 공모전에 투고했다가 낙방하는 동안 쌓인 시들도 제법 모였다. 모르긴 해도 뚜벅뚜벅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 시인의 삶은 안과 밖이 분주했을 터. 첫 시집을 낼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2020년에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라는 첫 시집을 냈어요. 솔직히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그냥 포기하고 내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었죠. 독자들의 반응과 주변에서 들려올 얘기들이 두렵고, 그러면서도 못 견디게 궁금하고. 막상 시집이 제 손에 놓이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문학을 함께 나눌 때의 즐거움과 기꺼움
완주 둔산군립영어도서관 상주 작가로 활동하는 2년 동안 문학큐레이터로 활약했다.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사업, 시인의 특기를 살린 문학과 드로잉 연계 프로그램, 글쓰기 인문학 프로그램, 아이들과 함께 동시와 그림책을 읽는 어린이독서회 활동 등 시간이 쌓이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조금씩 확장해 나갔다. 우선은 자신이 책과 노는 게 몹시도 즐거웠으며, 책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되고 종국에는 마음이 이어지는 느낌을 무척이나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 짜릿한 조우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처음에 도서관 상주 작가로 일하게 됐을 때 아무래도 공간이 주는 즐거움이 크게 작용했죠. 그런데 좀 안타깝기도 했어요. 도서관 시설이 정말 잘돼 있는데 이용자가 많지 않은 거예요.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되도록 주민 친화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한 명이라도 더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김헌수 시인의 열정을 눈여겨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활동하고 있는 전북작가회의에서 인연을 맺은 이종민 선생도 그중의 한 사람. 덕분에 덜컥 ‘완주인문네트워크’에서 이사를 맡게 됐다. ‘김사인 시인과 함께하는 전주도서관 기행’, ‘치유의 시, 위로의 노래’, 완주군 고산고등학교에서의 문학강연 등 덥석덥석 받아 앞에 서는 일이건 뒤에서 받쳐주는 자리건 가리지 않고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시를 썼고, 2021년에 두 번째 시집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을 세상에 내놓았다. 첫 시집이 나온 지 1년 만이니 빠르다면 빠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은 일단은 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쓸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상 쓰고 그리다 보니 자연스레” 책으로 묶어낼 분량이 쌓였던 것.
“두 번째 시집 해설을 써주신 문신 선생님께 예전에 시 쓰기를 배울 때 “어느 구름이 비를 머금었는지 모르니까 계속 쑤셔봐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가족들 생일 챙기듯이, 집안 제사나 대소사 챙기듯이 원고 투고도 하고 여러 시도를 해보라고 하셨거든요. 그 말이 동력이 돼줬어요.”
다정한 시선, 연민의 각도로 살고, 쓰고, 그리다
시집도 사서 읽고 필사도 해보고 음악 공연도 보러 다니고 흠모하는 작가들의 강연도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쫓아다녔지만, 마음속에는 늘 어떻게 하면 시를 더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근원적인 목마름이 있었다. 최근에 출간한 필사 펜드로잉 시화집 『마음의 서랍』은 시인이 좋은 문장들을 옮겨 적으며 도움받고 위로받았던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가 이토록 부지런하고 성실히 작품을 써내는 것은 시인 자신이 먼저 시로 인해,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인해 위안받고 살아갈 힘을 얻었으며 글의 온기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이리라. 김헌수 시인의 시편들에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이 있고, 삶을 응시하는 “연민의 각도”가 배어 있다.
대파와 콩나물 북어 대가리를 쑤셔 넣고 묵직하게 들려지는 가난한 무게 한번 쓰고 다시 또 돌려쓰는 이 무게 ─김헌수 시, 「에코백」 전문
시인으로 첫발을 떼며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앞으로 낮은 목소리로 약한 자들의 이야기를 쓰겠다.”라고 말했던 것을 여전히 기억한다. 아니, 그 첫 마음을 간직한 채 그는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싶다. 시인으로서의 길을 갈 때도, 문학을 매개로 한 강연이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는 앞으로의 활동에서도 김헌수 시인은 매일 쓰고 그리는 사람의 저력으로 내내 씩씩하고 용감할 것이다.
최근에 서학동 예술마을의 부촌장을 맡게 된 시인의 가까운 계획으로는 ‘서학동의 봄’이 기다리고 있다. 완주인문네트워크에서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라는 주제로 작가들에게 원고를 받아 문학강연도 하고 나중에 책으로 엮는 ‘시꽃 피는 완주 산책’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또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동생과 함께 만든 출판사의 다음 책으로 시인의 디카시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그림이라는 게 정말 신기해요. 연필을 잡는 방법과 쥐는 힘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거든요. 같은 걸 보고 그려도 미세하게 달라져요. 결국엔 글도 그림도 각자 자기 이야기를 나답게 풀어내는 거죠.”
자기만의 속도, 자기만의 온도, 자기만의 높낮이가 있다는 뜻. 우리는 김헌수 시인의 이야기를 담아둘 큼직한 마음의 서랍 한 칸 마련해 놓으면 되겠다.
김정경 시인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 전북일보에 시 '검은 줄'로 등단했다. 전주 MBC 라디오 작가를 거쳐,현재는 전주문화재단의 문예진흥팀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