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김치
백희정
비가 왔다. 그래서인지 아침잠은 유난히 달콤했고 평상시처럼 일어나려니 아쉬웠다. 혼자 사는 것이라면 이대로 이불속에 온종일 있어도 좋으련만, 엄마의 아침 식사를 챙겨야 했다.
엄마를 돌보는 백수의 하루!
매일 휴일 같지만, 매일 휴일 같지 않은 하루!
새벽녘 엄마는 잠을 깼는지 계속 벽을 두드린다. 나도 덩달아 잠이 깼지만,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다. 오늘은 엄마가 나를 부르지 않는다. 혹시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알면 금방이라도 부를 것 같아 나는 조용히 그대로 누워 있다.
‘삐그덕삐그덕, 똑- 똑- 툭- 툭-, 찌-이직 찌-이직, 음 음- 음 음-’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소리, 손으로 벽을 두드리는 소리, 낙상 방지를 위해 올려놓은 싸이드 레일을 잡아당기는 소리, 입을 다문 채 내는 콧소리, 각각의 소리가 따로 또 같이 어둠 속으로 스민다. 엄마는 새벽 2~3시에 깨고, 날이 밝기 시작하는 7시쯤이면 다시 잠이 든다. 몇 주째 계속되는 엄마의 수면 패턴이다.
치매는 엄마와 나의 일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수면장애를 동반했고 망상과 선망은 수시로 일어나 엄마를 과거와 현재, 미래로 자유롭게 데려갔다.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새벽, 엄마가 나를 깨우는 이유도 날마다 달랐다. 사람들이 다 죽었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 한밤중에 남자들이 와서 딸을 데려갔다며 현관문을 열고 막 찾아 나서는 엄마를 겨우 붙잡아 진정시킨 적도 있었다. 느닷없이 배가 고프다며 밥을 달라고 부르는 것이나, 날이 샜다며 빨리 일으켜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이제 사소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엄마가 나를 깨우지 않았다. 한참 동안, 아니 3~4시간을 혼자서 자신이 깨어있다는 주파수를 그대로 흘려보내고 다시 잠이 들었다. 평온한 아침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유난히 거실에 냉기가 돈다. 나는 서둘러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포트에 물을 끓인다. 지난겨울은 눈도 거의 내리지 않았고 극심한 한파도 없었다. 3월 들어 날씨가 포근해지기 시작하더니 요사이 마당 텃밭에 시금치와 파들이 파릇파릇 생기를 띠며 봄을 부른다. 나는 이때쯤이면 어린 쪽파를 뽑아 담은 파김치가 자꾸만 생각난다.
겨우내 찬바람을 맞고 자란 쪽파를 뽑아 담근 김치는 매운맛이 적고 달큼한 단내가 난다. 생각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내가 처음 파김치를 먹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파김치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던 할머니의 말을 듣고 맵기만 한 파김치를 꾹! 참고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학창 시절에는 파김치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는 엄마에게 먹고 나면 입에서 냄새가 난다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언젠가부터 파의 톡 쏘는 매운맛이 상큼하면서도 달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문득, 라면에 파김치가 생각난다. 이 환상적인 궁합은 갓 담근 파김치도 좋고, 적당히 익은 파김치도 제격이며, 아주 잘 삭힌 파김치 역시 절로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찰떡궁합이다.
‘딱! 지금. 이때쯤이면 파김치를 꼭 한번은 담아야 한다.’ 며칠째 이 생각을 붙들고 벼르고 있는 터라, 오늘 오후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난주에 담지 못한 파김치를 담아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번 주를 넘기면 쪽파는 너무 자라 억새고 매운맛이 강하고 씨알이 굵어진다.
나는 마당 한 편에 자리 잡은 텃밭으로 향했다. 진한 녹색을 띤 쪽파들이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다. 종자를 남겨야 하니 모조리 뽑아서 될 일이 아니다. 군데군데 빽빽하게 자란 곳을 골라서 솎아 뽑아주고, 나머지는 가을 쪽파 모종을 위해 종자로 남겨야 한다. 지금, 이 쪽파 역시 작년 가을 모종을 해서 겨울 김장을 하고 남긴 것이었다. 고맙게도 겨울을 나고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텃밭이 나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다. 파 뿌리가 하얀 실타래 같다. 아무래도 봄은 땅속에 먼저 와 있었던 모양이다.
봄볕이 드는 데크에 걸터앉아 쪽파를 다듬는다. 흙을 털어내고 뿌리를 자르고 엄지와 검지로 지저분한 겉잎 하나를 잡고 살짝 벗겨내자 녀석들의 하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이번 주를 넘겼다면 이 파릇파릇한 봄의 맛을 놓쳤겠구나’ 생각한다.
다듬어 놓은 쪽파는 씻어 바구니에서 물기를 뺀다. 그리고 냄비에 찹쌀가루를 풀어 죽을 끓인다. 식은 찹쌀죽에 고춧가루, 새우젓, 액젓을 넣고 섞어 고춧가루를 불리고, 나머지 양념도 마저 준비한다. 다진 마늘과 양파, 당근, 사과, 통깨 그리고 올리고당과 설탕 약간.
잊었던 옛 기억들이 절로 떠오른다. 옛날에 엄마가 담아주던 그 파김치처럼 맛있어야 할 텐데, 아니 그렇게 맛있게 김치가 담아지길 기원하며 꼼꼼하게 양념을 챙기고, 넣고, 섞어서 맛을 본다.
김치를 담그는 날이면, 어린 계집아이는 그 곁에 바짝 쪼그려 앉아 엄마를 바라보았다. 함지박 안에서 고춧가루와 양념이 어우러지고, 김치가 버무려지는 것이 재미있고 마냥 신기했다. 아이는 손을 뻗어 김치 한 조각을 집어 오물거리며 ‘아 매워. 아 매워’를 외치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 딸을 보며 엄마는 빈속에 많이 먹으면 속이 아프다며, 밥이랑 먹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녀가 어린 날 그랬듯 곁에서 엄마가 맛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그 옛날 그녀가 먹었던 그 맛을 떠올리며 양념의 간을 맞춘다. 그리고 씻어 놓은 쪽파를 한 주먹씩 넣고 고루 양념을 발라 가지런히 그릇에 담는다. 문뜩! 그녀는 자신이 추억하고 기억하는 그 맛이 어쩌면 혀끝에 느껴지는 이 진한 양념 맛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빨갛게 옷을 입은 파김치가 가지런하다.
그녀가 봄 햇살처럼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