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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 | 문화현장 [김사인 시인과 함께 꼬꼬무 시읽기]
근현대 시인들의 시를 통해 시대를 다시 읽다
신동하(2023-04-13 10:20:04)



근현대 시인들의 시를 통해

시대를 다시 읽다


글 신동하 기자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인문학은 뒷전이다. 더이상 인간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시대. 사회적 기업 마당이 3월부터 열고 있는 '김사인 시인과 함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읽기'는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인문학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고자하는 기획이다. 시로 시대를 읽는 '김사인 시인과 함께 꼬꼬무 시읽기'가 지난 3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전주 한옥마을 공간 봄에 열리고 있다. 첫강좌에는 김소월이, 두 번째 강좌에는 영랑 김영랑이 초대됐다. 두 개 시강좌의 현장을 지면에 옮겨왔다. 




소월  채워지지 않는 허기갈증, 처참함 그리고 간절함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시선으로 보면 김소월의 시는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 시대의 주류적인 한국 사회의 문체들과 비교하면 충격적일 만큼 신선하다. 1920년 당시에는 한문이 주가 되고 국문이 종이 되는 국한문혼용체가 지식인 사회에서 흔히 쓰였다. 김소월이 오산학교에 입학하던 해인 1917년 최초의 한글 소설인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2년 뒤 3·1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한 해 뒤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이 시기에는 아래아는 물론이고 한문 쓰는 순서도 살아있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떠올려보면 소월의 탁월한 언어 감각을 실감할 수 있다.


또한 당연하게도 한글 맞춤법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한글 맞춤법은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표준말을 모델로 하여 1912년, 1921년, 1930년 세 차례에 걸쳐 완성된다. 일제의 사상이 들어간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문법 규범이 확립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만주사변이 벌어지고 일본이 군국주의화 되면서 자신들이 해왔던 정책을 모두 뒤집어 한글말살 정책을 펼친다. 몇 년 전 영화 '말모이'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조선어학회 사건'은 이와 관련이 있다. 시인은 신시(新詩)가 조선에 정착하게 된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지금 우리가 ‘시’ 하면 떠올리는 이런 것들은 문학으로서 통용되기 시작한 지 정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한 해에 시집이 3-400권 가까이 나올 겁니다. 그러나 첫 신시집이 나오고 해방될 때까지 단 140건만이 나온 것으로 조사됩니다. 그러니 그 이전의 이천 년 동안 우리가 시나 노래라고 여겨 왔던 것들은 오언절구 칠언절구 하던 것들입니다. 그 자리에 서양의 포에트리가 뻐꾸기가 알 넣듯이 들어온 겁니다."


시인은 소월이 '꺼풀은 살아서 밥도 먹고 잠도 자지만 넋이 반 넘게 죽음에 치우쳐진 사람' 같다고 말한다. 소월의 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처절함과 간절함 때문이다. 소월의 시인 '초혼'이나 '무덤'을 읽을 때면 한기가 느껴지기도 한다고. 그리고 그 이유를 '홍경래의 난'에서 찾았다.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초 세도정치 시기 평안도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이다. 17-18세기 이래 서북지역의 모든 에너지가 집결되었던 사건이다. 이 세력의 모든 재력과 무장력이 집결되었으나 관군에 의해 전멸한 곳이 정주와 곽산 인근에 있는 정주성이다. 이곳에는 소월이 다녔던 오산학교가 있고, 나고 자란 집이 있고, 생을 마친 처가가 있다.


"제가 소월을 읽으면서 잘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깊은 비관과 절망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더듬거리다가 중요한 참고 사항으로 발견하고 새삼 느낀 게 있습니다. 바로 '홍경래의 난'입니다. 홍경래의 난은 서북 세력의 모든 재력과 무장력이 집결되었던 반체제 투쟁이에요. 이것이 호남 지역의 동학민중항쟁과 같은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의식의 심층에서 뭔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시, 「초혼」 중






영랑  토착의 시어를 통해 감탄을 자아내는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 누억천만(屢億千萬)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이라 내맡긴 신세임을 // 나는 독을 품고 선선히 가리라 / 마감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의 시를 읽으면 순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나요. 그래서 이렇게 다시 한 번 들여다 보면 이게 한자를 전혀 쓰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됩니다. 외래어가 전혀 없는 거예요. 꼭 유기농 채소 같아서 모양은 우둘투둘해도 먹고 난 뒷맛으로 마음에 전혀 부담이 없지요. 어떻게 우리 말을 가지고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감탄을 하게 하는 사람. 그게 바로 영랑입니다."


영랑은 전라도 사투리가 돋보이는 향토적 시를 많이 썼다. 그러나 영랑은 한자를 쓸 줄 몰라서 토착어를 고집한 게 아니다. 강진의 유명한 부잣집 장남이었던 영랑은 어릴 적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키츠'와 '쉐리'를 읽고,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에 심취했다. 영랑은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하고 돌아와야 했지만 아오야마 가쿠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돌담에 비치는 햇발같이'라는 표현도 그가 영어에 능통했기에 만들 수 있었다. 음악도 매우 잘 알았다. 국악과 양악을 가리지 않고 유명한 음악회들은 모두 찾아다녔으며, 동시에 명고 급의 북솜씨와 명창급의 소리 솜씨를 자랑했다.


강진의 만세운동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3.1 운동이 일어나고 전국 각지에 만세 운동이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때 영랑의 주도로 강진에서 만세 운동이 추진되지만 일제에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그 일로 체포되어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는다. 항소심에서 겨우 풀려났으나 다니고 있던 휘문고보는 중퇴해야 했다. 이때 아버지의 권유로 금강산 기행을 다녀오는데, 그때 강원도 고성과 속초에서 '영랑호'를 보고 매혹되어 자신의 호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랑이 활동하던 당시는 세 시파가 각축을 벌였다. 한쪽에서는 김소월과 한용운이 자신의 주관성을 강하게 토로하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김기림과 이상이 중심이 되는 모더니즘이 출현한다. 그러는 와중에 박영희와 임화는 강력한 목적 의식이 있는 계급주의 문학을 들여온다. 김사인 시인은 영랑의 시가 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초식이라고 설명한다.


"영랑과 시대를 함께한 인물들을 떠올려보세요. 무릎을 칠만큼 감각적인 지용의 시와는 다른 차원이고요. 소월의 비통한 주관성과도 다릅니다. 그렇다고 가람의 호고적, 상고적 기품도 아니지요. 영랑의 시에서 느껴지는 적막한 마음의 깊이는 이백의 섬뜩한 고독함과 닮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영랑은 식민지 시대 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무관심 속 묻혀있던 영랑을 황홀하게 건져낸 이는 다름 아닌 미당. 미당은 호남 문단의 12살 선배인 영랑을 '광복 이전 조선 시단의 모든 실험자 들 중 1인자'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영랑도 그런 미당을 예뻐했고, 두 번째 시집인 '영랑 시선'의 모든 것을 일임했다. 시선부터 발문까지 미당이 도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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