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완판본과 한지로 연주하는 바흐의 음악
음악을 ‘그리는’ 작가 이다희
음악을 악기가 아닌 그림으로 연주하는 일, 과연 가능할까? 작가 이다희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 그는 자신만의 기호로 음악을 시각화하는 독특한 ‘음악 번안 시스템’을 선보인다. 자수나 드로잉 등 물성을 적극 활용하는 그는 전주의 전통 기록 매체에 주목했다. 완판본문화관과 협업해 바흐의 음악을 목판으로 판각하고 한지 위에 찍어내 세상에 없던 ‘완판본 악보’를 제작하는 프로젝트다.
‘보는’ 음악의 탄생 과정
완판본문화관과 그의 만남은 2019년부터 시작되었다. 팔복예술공장 기획 입주작가로 활동하던 그가 전주 전통매체를 예술적으로 재해석하고자 제안했다. 그는 음악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곡가, 곡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통해 자신만의 규칙 안에서 도형과 색채를 만들어낸다. 이를 곡의 흐름에 맞게 배열하면 판각, 인쇄, 제책은 완판본문화관이 맡았다. 2019년도 첫 작업 당시에는 곡을 마디마다 나누어 목판을 전부 제작했지만, 오랜 시간 함께 호흡을 맞추며 그 형태를 발전시켰다. 지난해에는 목판을 도형별로 조각조각 제작해 목판 자체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전주 한지에 인쇄한 후 채색을 더하면 완판본 악보가 탄생한다. 이번 협업은 한국의 고전 판각과 인쇄술이 동시대 지구 반대편에서 듣던 바흐의 음악과 만났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10여 년 전부터 클래식 음악의 시각화 작업을 해오고 있지만, 화성을 시각화하는 일이 늘 쉽지는 않았어요. 음의 높이는 색의 변화로 나타낼 수 있지만 화성적인 부분은 특히 표현하기가 어려웠죠. 화성의 울림을 여러 가지 색을 쌓아 입체감 있게 나타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생각한 게 한지였어요. 한지의 촘촘한 결을 따라가면 수채화 물감으로도 제가 원하는 발색이 가능했어요. 한지와 친해지며 완판본을 접하게 되었고 그렇게 전주에서 하나둘 새로운 문화들을 알아가는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매번 단 한 장씩 그려냈던 이전의 작업들과 달리 판화 기법은 동일한 작품을 여러 장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덕분에 음악 안에서 반복되는 부분들도 쉽게 표현이 가능하다. 그는 바흐의 음악이 상하좌우 ‘정렬’이 잘 되어있는 음악이기 때문에 판화 기법과도 잘 맞는다고 설명한다.
“독일에 있는 바흐 박물관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때 바흐의 악보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오랜 역사를 가진 예술작품을 표현하려면 그만큼의 깊이 있는 역사와 무게감을 지닌 매체를 활용하고 싶었는데 전주 완판본이 그런 부분에서 잘 맞았다고 생각해요.”
생소한 분야이다 보니 어떤 사람은 오선지에 그리는 악보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묻기도 한다. 그의 작업이 일반적인 악보와 다른 점은 연주자의 특성까지 생생하게 구현해낸다는 점이다. 그는 단순히 악보를 이미지로 옮기는 것이 아닌 연주되는 소리 자체를 옮겨온다.
“같은 음악도 연주자가 누구냐에 따라 분위기가 완전 달라지거든요. 이 작품은 캐나다의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바흐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느낌을 이미지에 반영했어요. 실제 악보는 누구나 보고 칠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만들어지지만 도식화를 거치면 연주자의 고유한 특성과 같이 주관적인 느낌들을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죠.”
그가 음악을 그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은 듣는 순간 사라지지만 앞에 두고 긴 시간 자세히 바라보고 느끼고 싶었다고 전한다. 덕분에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자신만의 유일한 악기를 갖게 되었다. 그의 독창적인 작업과 우리 전통매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전시 <음악이 보이는 완판본 악보>는 완판본문화관에서 7월 9일까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