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역사적 리얼리스트
글 문신 시인˙편집위원
7월 8일 오후 3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연극 <두 영웅> 공연을 앞두고 노경식 극작가를 만났다. 노경식 작가는 남원 출신으로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철새>가 당선된 후 본격적으로 희곡을 썼다. 극작가 차범석 선생은 그런 노경식 작가를 이렇게 표현한 적 있다. “극작가 노경식을 만나면 시골 황톳길을 연상케 한다. 환하게 트인 밝은 표정에서부터 약간 구부정한 등언저리에서 두 다리로 흘러내리는 굵직한 거채에다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항상 그대로의 속도를 유지하며 걸어가는 모습……” 차범석 선생의 표현처럼, 노경식 작가는 70년 가까운 세월을 황톳길 같은 극작가로 살아왔다.
알다시피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한다. 삶이라는 무대에 올라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때가 되면 쓸쓸하게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게 인생이다. 동의할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항변해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우리는 삶의 어떤 갈피에서 연극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된다. 삶은 그렇게 우리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초대하는 법이니까.
영웅의 시대, 영웅을 부르는 시대
우리가 아는 영웅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힘을 가졌다. 영웅의 힘은 시대와 맞설 수 있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줄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란한 시기에 영웅을 기다린다. 영웅은 보통 사람의 간절한 염원이 모인 꿈이다. 그런 이유로 영웅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노경식 작가의 <두 영웅>도 마찬가지다. <두 영웅>의 주인공인 조선의 사명대사와 왜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역사에서 실제로 만났지만, 그마저도 어쩐지 어렴풋한 꿈처럼 느껴진다.
“<두 영웅>이라는 작품은 국립극단에서 청탁이 들어온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당시에는 공연을 올리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2016년에 뒤늦게 초연을 하게 되었지요. 그 과정이 저에게는 과분하면서 감격적입니다. 제가 1965년 신춘문예로 등단을 했는데, 주위에서 등단 50주년 기념공연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요. 그렇게 해서 <두 영웅>이 대학로 아르코 대극장에 올리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두 영웅을 불러낸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을까? 연극 <두 영웅>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난 조선과 왜의 상황을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내세워 보여준다. 두 나라 모두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외교의 친화가 요청된 상황이었다. 7년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왜의 패권을 쥔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는 곧장 조선에 화친을 요청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그 진의를 파악하고자 탐적사를 보내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사명대사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의병과 승병을 이끌고 왜와 맞선 인물이다. 당시 전주나 남원에도 사명대사가 다녀간 걸로 알려졌다. 그 내용이 <두 영웅>에서 전주의 완산칠봉이나 남원의 교룡산성과 더불어 나온다. 사명대사는 왜가 물러가고 전쟁이 끝나자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7년 전쟁을 끝내 덕천막부를 세워 정권을 잡은 인물이다. 당연히 그는 국내 정세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화친을 요청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장군들이 전쟁에 나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7년전쟁 동안 조선에 출병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까 이에야스는 조선과 원수진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화친을 요청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대마도는 조선과 교역을 통해서 쌀이든 뭐든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전쟁으로 교역이 끊어지자 대마도 교주가 교토에 가서 말해요. 조선과 교역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고. 화친하자고 하니 조선에서는 그 저의를 의심해요. 7년 동안 난리를 쳤으니 당연하죠. 왜놈들이 진짜로 평화를 원하는 거냐?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가? 그래서 사명대사가 탐적사라는 직함으로 왜로 건너갑니다. <두 영웅>은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대목은 작가적 상상력입니다.”
리얼리스트의 출발점
연극사학자 유민영 교수는 노경식 극작가를 “근대희곡 제4세대의 대표적인 리얼리스트”라고 표현한 바 있다. 등단작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은 동시대의 불완전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작품이 리얼한 세계를 천착하게 된 것은 개인의 삶이 현실에 밀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형식이 그에게는 문학의 형식이 되었던 셈이다. 그가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작은 에피소드에서 그러한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노경식 작가는 남원에서 태어나 남원용성초등학교, 용성중학교, 남원농고 축산과를 졸업하고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때만 해도 극작가의 길을 갈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 당시 전라도 사람을 하와이라고 했어요. 방을 얻으러 가거나 하숙을 치러 가면 고향을 물어봐서 전라도라고 하면 받아주지 않았어요. 선배들이 그렇게 당하는 모습을 몇 번 봤어요. 선배들은 하숙하거나 자취를 하려면 미아리 같은 외곽으로 나가야 했어요. 그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하와이>라는 수필을 하나 써서 학보사에 투고했는데 그게 신문에 떡 실린 거예요. 그걸 황순원 선생이 본 겁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는 <교양 국어>라는 과목이 있었어요. 우리 경제학과는 황순원 선생이 담당이었는데, 1학년 때 황순원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와서 그래요. ‘야, 지금 너희들이 보는 신문에 너희과 학생이 쓴 글이 실린 거 알아? 노군의 글인데, 글을 아주 잘 썼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날 이후, 황순원 선생은 만날 때마다 ‘노군, 너 글 잘 쓰는데, 뭐라도 좀 써봐.’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3학년이 되던 봄에 4.19를 맞이했고, 자의 반 타의 반 시위도 했다. 그러니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는 일에 매달릴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곧바로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학교생활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군사정권은 교단에 있던 군 미필 교수들을 몰아냈다. 서울 생활이 편할 리 없었다.
“5.16 이후 고향 남원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당시 남산 드라마센터 아카데미가 생겼는데 거기에 입학했어요. 소위 말하는 극작과라는 데를. 배우 신구 씨가 연기과 1기일 거예요. 끄적끄적 숙제하듯이 작품을 제출했더니 지도교수였던 이원경 선생이 잘 썼다고 고쳐보라고 해요. 그래서 선생님 댁으로 찾아갔더니 이렇게 저렇게 고치면 좋겠다고 해요. 그걸 고쳐서 그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투고했는데, 당선된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희곡을 쓰고 있어요. 사실 제대로 문학이나 희곡 공부를 받아본 적은 없어요.”
통찰력 있는 역사의식
노경식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십 년의 세월을 동화출판공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다.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 등 많은 책이 노경식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연극 무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철새>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후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국립극장 무대에도 여러 차례 설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에 대해 노경식 작가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서연호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노경식 작가의 역사의식은 몇 단계의 프리즘을 관통하는 치밀한 작가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노경식 작가는 현재와 과거의 여러 층위를 하나의 문제로 통합해냄으로써 역사와 인생을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로 재구성해내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노경식 작가는 하나의 역사적 서사에 천착하는 특징이 있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작품만 해도 <징비록>, <강건너 너부실로>, <만인의 총>, <침묵의 바다>, <두 영웅>과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등으로 다양하다. 그만큼 역사적 사실을 여러 층위에서 해석하고 극화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나 주제를 심도 있게 묘파해가는 그의 글쓰기는 여전히 우리의 삶과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극작보다는 후배들이 좋은 연극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2020년에는 70세 이상 되는 연극인들의 친목 모임인 대학로 연극인 광장(약칭 대연장)을 만들어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9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대연장에서는 1년에 한 번 후배를 위해 올해의 연극인상과 올해의 신인 연기상을 제정해 시상한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일은 매주 대학로를 찾아 연극을 관람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연극계의 선후배가 돈독해지고, 그런 힘으로 침체한 한국 연극계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노경식 작가의 바람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인생 무대가 풍성해지고 다채로운 이야기로 넘쳐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