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국가무형문화재 지정된 악기장 고수환
마침표가 아닌
또 다른 시작을 향하다
글·사진 고다인 기자
거친 나무가 고운 가야금 소리를 품기까지. 악기장 고수환 명장은 50년이 넘는 세월 수만 번의 손길로 나무를 다듬었다. 그렇게 한평생 쌓아온 시간들이 결실을 맺었다. 지난 7월 27일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 현악기 보유자로 인정된 것. 1998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그는 가야금 제작을 비롯해 우리나라 국악기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갈수록 평생의 업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그가 오롯이 가야금과 함께 묵묵히 한길을 걸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갖는 의미는 곧 ‘책임감’
국가무형문화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시험을 치르는 것과 비슷했다. 복잡한 서류를 작성해 보내고 꼬박 7시간 동안 가야금 제작을 시연하며 현장 조사를 거쳤다. 이때는 도구 하나부터 마지막 조율까지 모든 과정을 철저히 전통 방식 그대로 따라야 한다. 힘이 부치는 일이었지만 매일 가야금 만드는 게 일상인 그에게는 특별할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완성된 악기는 전문 국악인이 직접 연주해 소리의 우수성까지도 평가한다. 촘촘한 심사의 벽을 넘어 전승 능력과 환경, 전수활동 기여도 등을 고루 인정받은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 보유자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제 나이도 들고 워낙 오랜 시간 이 일을 하다 보니 국가무형문화재에 대한 욕심이나 기대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계속 권유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고민했지만 떨어져도 상관없으니 지금까지 연습해온 것들로 한번 부딪혀보자 하며 도전했습니다. 심사위원들 앞에서 제 손으로 하나하나 가야금을 만들어 보이니 다들 감탄을 하더라고요. 국가무형문화재가 되기 전이나 후 달라진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사라져가는 악기장의 길을 잘 지키고 이어나가야겠다는 책임감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는 좋은 악기란 자고로 오랜 세월 곁에 둘 수 있는 수더분함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고되더라도 제작 과정의 원형을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오래가는 악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들이는 수고에 비하면 돈이 되는 일도 아닐뿐더러 타고난 소질도 필요하다. 이제는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그의 둘째 아들이 전수자가 되어 뒤를 따라가고 있다. 고맙고 기특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 악기 제작의 맥이 이어지길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 끝에 그는 최근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바로 가야금 제작 교본을 만드는 일이다.
“가야금 제작에 대한 기록물이 사실상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작 과정에도 정해진 기준이 애매하고 배우는데도 어려움이 많죠. 이번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것을 계기로, 악기장으로서 신뢰감을 갖고 가야금 제작 교본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은 아니지만 제가 경험해온 것들을 꼼꼼하게 담아서 후대에 도움이 되는 교본을 제작하고 싶어요.”
원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꿈을 계획하는 그의 모습에서 일평생 함께해온 가야금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가 꿈꾸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우리의 전통 악기가 시민들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고 일상에서 소비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음악과 악기 자체에 대한 관심, 또 악기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한다고 전했다. 그에게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악기장 인생의 마침표가 아닌 또 다른 시작과 같다. 앞으로 그가 만들어낼 더욱 깊고 청아한 가야금 소리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