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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 | 칼럼·시평 [문화칼럼]
문화는 우리의 숨통이며 희망이다
이기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2023-10-13 09:20:49)

문화는 우리의 숨통이며 희망이다


이기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한국인의 ‘사이’ 문화

지구촌 시대는 문화의 시대로서, 문화적 다양성이 강조되고 문화적 가치가 전면에 등장하며 문화적 멋을 추구하는 ‘문화인’이 모델이 되는 멋진 시대다. 이제 이에 맞추어 인간에 대한 규정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인간교육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인들은 유난히 ‘사이’에 관심을 쏟았다. 그것이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보듬어 품어 안고 위로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문화형성에서는 강한 문화권의 틈바귀에서 상대의 문화와 우리 고유의 민속 문화를 갈등 없이 조용하게 화합시키는 어울림의 정신으로 사이해 왔다. 


문화는 우리의 운명이다

1815년 경, 나폴레옹은 ‘정치는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로서, 정치가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인간 모습도 달라진다. 전제군주의 왕권정치 아래 살다가 대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경험하면서, 정치에 따라 인간의 삶이 확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1845년 경 마르크스는 ‘경제는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결국 정치도 먹고살기 위한 것인데, 빵(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빵(밥)의 문제, 경제문제가 해결되어야 정치의 판도도 달라지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 하이데거는 ‘기술은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때의 기술은 단순히 도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떤 기술을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관점이다. 하이데거가 1945년경에 이 말을 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크게 공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3,40년이 흐른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기술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기계의 노예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기술을 벗어난 삶을 상상할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정치, 경제, 기술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간다. 우리를 옭죄는 이러한 굴레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문화’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문화는 우리의 숨통이며 희망이다’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제부터는 문화를 우리의 운명으로 삼아 올바른 삶을 펼쳐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정치적 가치, 경제적 가치, 기술적 가치가 우리를 지배해왔다면, 이제는 문화적인 가치로 우리 삶의 희망을 키워나가야 한다. 문화적 가치 안에는 21세기 인류가 희망하는 씨앗들이 담겨 있다. ‘정치적인 가치’는 권력, 신분, 명예 등을 추구하며, 이를 통해 자유와 평등, 인권, 사회정의가  도출되어 나올 수 있다. ‘경제적 가치’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풍요, 안정, 성장, 발전, 선진, 경쟁, 성과 등을 파생한다. ‘과학기술적 가치’는 편리, 효율기능, 적용, 통합, 통섭, 확산 등을 포함한다.


‘문화적 가치’는 다양성, 차이, 조화, 어울림, 아우름, 관용, 공생(共生), 상생(相生), 소통, 자기표현, 자기구현, 서로 이해, 공감 등을 뜻한다. 이 가치들을 이끌어 내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과 공존의 열린 마음가짐이다. 차이를 서로의 독특함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다양성은 전체와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어울림은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소통 안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계율이나 계몽이 아니라, 쌍방향의 수평적인 소통이 21세기의 화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구촌 시대의 해답, ‘문화’

문화적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이 지구촌 시대이기 때문이다. 기술적 의미에서 지구 전체가 일일 생활권이 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구 전체가 공동 운명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의 삶의 터전에서 80억 인구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문화적 가치 안에는 지구촌 시대인 오늘을 사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을 위한 희망이 담겨 있다. 지구바깥에서 지구를 보았을 때 지구는 민족이나 국경의 경계가 없는 하나의 둥근 지구일 뿐이다. 그 안에 사는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이 지구 생명을 보장하듯, 문화의 다양성, 문화권의 다양성이 있어야만 인류가 평화로울 수 있다. 문명의 충돌을 걱정하며 암울한 미래를 예고했던 새뮤엘 헌팅턴도 21세기 들어서면서 ‘문화가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만년의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인이 몸과 마음, 정신과 얼 속에 흐르는 문화적 끼를 살려 지구문화 운명공동체를 풍요롭게 할 운명을 떠안아야 할 시점이 왔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운명을 펼쳐나가야 한다.



#이기상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초대 회장과 ‘우리사상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콘텐츠와 문화철학』, 『삶과 죽음의 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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