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ESG, 문화예술 환경을 묻다
ESG 시대,
문화예술이 던지는 화두
기후위기와 환경파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자리 잡으며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개념이 있다. 바로 ‘ESG’다. 'ESG'는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한다. 최근 들어서는 기업을 넘어 기관과 단체, 개인까지도 ESG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천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화예술 분야의 ESG 환경은 어디쯤 와있을까. 문화저널은 지난 7월부터 10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ESG와 문화예술의 만남을 제안하는 포럼을 가져왔다. 관련 전문가와 기업인, 예술인이 모여 우리 시대 ESG가 필요한 이유, 또 문화예술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함께 고민했다. 그 중요성은 알지만 실천은 여전히 부족한 현실을 확인한 자리였다. 문화저널은 창간 36주년을 맞아 문화예술계의 지속적인 ESG 실천을 제안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이 기획을 시작으로 ESG를 실천하는 현장을 찾아 소개하고 그 가치와 과제를 진단해보고자 한다.
글 고다인·류나윤 기자
문화예술 산업,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음악부터 영화, 공연, 미술 등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ESG 관련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가장 큰 파급력을 지닌 케이팝 산업 안에서도 소소한 ESG 바람이 불고 있다. CD가 사라진 이른바 ‘친환경 앨범’이 보편화되고 있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한 해에 버려지는 음반만 수백만 장, 소각 시 발생하는 쓰레기와 유독가스 역시 엄청나다. 과거와 달리 디지털 음원을 통해 음악을 듣는 시대, 대부분 음반은 포토카드 등 구성품의 수집 목적으로 소비되면서 CD는 환경오염을 부추기는 주범으로 전락해버렸다. 환경문제에 대한 책임이 커지자 음반계도 변화를 시도했다. CD 대신 QR코드를 활용한 앨범이나 NFC(근거리 무선통신) 기능을 이용한 ‘키노 앨범’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대중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동시에 작은 크기로 보관이 편하고 비용도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우선되어야하는 문제도 있다.
영화 산업에도 최근 주목할 만한 변화가 보인다. CGV는 2021년 ESG위원회를 출범해 본격적인 ESG 활동을 시작했다. 영화관에서 버려지는 폐스크린을 활용해 업사이클링 가구와 소품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작가와 협업해 폐스크린으로 굿즈 상품이나 조명, 테이블 등을 디자인하고, 실제 극장에서 관객들이 구매하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환경 외에 영화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나누는 활동들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극장이 없는 지역에 찾아가는 ‘나눔의 영화관’ 프로젝트와 지역사회 공헌활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온기우편함’은 관객들의 고민이 적힌 편지에 직원들이 직접 답장을 하며 이웃과 함께한다는 취지를 담았다.
예술계에서는 대형 백화점들의 전시 관련 활동이 눈에 띈다. 최근 백화점들은 ‘아트 마케팅’으로 ESG를 실천하는 동시에 젊은 세대 고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알트원 뮤지엄’을 조성해 쇼핑 공간을 넘어 지속가능한 문화공간의 역할을 함께하고 있다. 개관 2년 만에 60만명 이상의 방문객을 동원하며 기업 가치를 높이는 차원에서도 효과를 봤다.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의 경우 아티스트와 협업을 통해 백화점 내부 곳곳을 예술 작품으로 연출하거나 아트 상품을 제작하는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처럼 기업들은 미술관이나 공연장과 같은 문화공간을 운영하거나 예술가와 손을 잡고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등 문화예술의 힘을 빌려 ESG 경영을 실현하고 있다.
미술관 자체의 움직임은 어떨까. 리움미술관은 환경과 사회공헌 활동을 두루 실천하며 ESG 경영에 앞장선 사례로 꼽힌다. 장애인, 봉사자 등 평소 문화시설을 방문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전시 관람 기회를 지원. 미술관의 접근성을 높이고 배리어프리를 위한 교육프로그램 등 미술관 경험의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환경적 실천으로는 전시 준비 단계부터 친환경 자재를 사용하며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했다. 전시장에 설치된 가벽이나 파티션, 좌대 등을 모듈식으로 제작해 전시가 끝나면 외장재만 버리는 방식으로 폐기물을 기존 대비 50% 이상 줄였다. 관람객에게는 종이 리플렛 대신 ‘리움 디지털가이드’를 활용해 전시 해설을 제공하고 입장권을 모바일 티켓으로 전환하는 등 종이 사용을 최소화했다. 단순히 환경 이슈를 다룬 전시를 기획하는 등의 수준을 넘어 ‘쓰레기를 양산하지 않는’ 전시관으로서, 국내외 미술관의 전시 방식에도 큰 변화가 일고 있는 추세다.
문화예술이 ESG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은 다양하게 열려있다. 하지만 앞선 사례들처럼 아직은 규모가 큰 기업과 기관에 한해서만 ESG 경영이 활발한 현실이다. 또한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실천이 이루어질 수 없다. 환경적·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기업과 이를 함께할 수 있는 예술이 서로 균형을 맞추고 함께할 때 가능하다. 특히 지역에서는 이러한 실천이 더욱 어렵고 열악한 현실. 기업과 문화예술계가 상생하며 ESG를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이 과제가 되고 있다.
지역은 ESG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을까
지역사회 안에서도 ESG가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며 전북에도 이와 관련된 움직임이 시작됐다. 지역 재단과 같은 공공기관들이 ESG 경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며, 크고 작은 기업과 문화예술 단체 및 개인이 뒤를 따르고 있다. 다양한 실천으로 지역문화를 일으키고 있는 전북의 ESG 실천 사례를 소개하며 전북의 현재를 짚어본다.
문화예술 기관·단체와 ESG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과 전주문화재단 등의 지역 문화재단은 ESG 경영을 선포하고 적극적인 실천 중에 있다. 특히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의 'ESG 친환경 전북여행' 사업은 주목할 만하다. 전라북도콘텐츠융합진흥원과 협력해 추진한 해당 사업은 도내 웹툰캠퍼스에서 활동 중인 6명의 지역 웹툰 작가들과 함께 친환경 전북 여행을 알리는 내용의 웹툰을 제작했다. 부안 변산, 임실 옥정호, 고창 선운사 등 전북의 대표 관광지를 친환경적으로 여행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관광으로 인한 환경오염 실태 등을 주제로 한 웹툰 10편을 각 작가의 다른 그림체로 공개했다. 지역 작가와 함께하는 동시에 생소한 친환경 여행의 의미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전주문화재단은 직원들이 먼저 ESG에 대해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조직 내에서부터 다양한 실천을 시작했다. 직급이나 소속 부서에 변화가 생기면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종이명함 대신 디지털 명함과 같은 ‘NFC 명함’을 도입 중이다. 일반적인 카드 모양의 명함을 휴대폰 뒤에 대면 해당 인물의 인적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언제든 인터넷으로 내용 수정이 가능하다. 또한 지난해 진행했던 국제 포럼에서는 초청한 해외 연사들의 비행기 이동에 대한 환경 부담금을 계산하여 전북환경운동연합에 기부하기도 하는 등 ESG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9월, 한국전통문화전당도 ESG 경영 선포식을 가졌다. 업무환경 및 친환경적인 전통문화의 발전을 위한 생태계 구축, 전통문화예술 전문 공공기관으로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사회공헌 실천, 투명하고 공정한 지배구조 확립을 실천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전통예술로서 환경 및 사회 문제에 한발 다가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민간단체의 활동 중에서는 전주의 뮤지컬극단 ‘아트컴퍼니 두루’의 사례가 있다. 두루는 몇 해 전부터 기후 위기, 지배구조 등의 문제를 다룬 연극, 낭독공연, 뮤지컬 등을 올리며 공연으로 ESG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다. 해양오염을 주제로 한 어린이뮤지컬 <그린피쉬>, 우주 쓰레기에 대해 다룬 뮤지컬 <웨이팅> 등이 그 예이다. 실제로 ESG 중 'G(지배구조)'의 가치를 다뤘던 공연인 <디어 마들렌>을 본 한 기업의 오너는 감동하여 후기를 전해온 경험도 있었다. 11월에도 '지배구조‘와 관련하여 사회의 거대한 카르텔을 엿볼 수 있는 뮤지컬 <러스트>가 공연 예정에 있다.
기업의 ESG와 문화예술
사실 문화예술 내에서의 ESG, 특히 'S(사회)'는 단어로 제시되었을 뿐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예술은 사회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문화예술을 활용해 사회적 가치를 확산시키며 ESG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다. 독일의 자동차 회사인 포르쉐는 서울시 공공자전거인 '따릉이'를 서울문화재단과 함께 변신시켰다. 자전거에 한국 전통 조각보 디자인을 입혀 만든 '아트 따릉이'는 서울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00
이처럼 수도권에서는 ESG의 관점에서 기업과 문화예술의 연계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지역에서는 아직 이를 '메세나(문화예술 후원)'와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SG는 이 두 개념과 분명히 다르다. 메세나와 CSR이 일방적인 후원이라면, ESG는 윈윈(win-win)이다. 기업은 문화예술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마케팅 효과를 얻으며,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기회를 마련하는 '제휴'와 '협력'의 개념에서 보아야 한다. 전북에서는 성매매집결지인 선미촌과 SK텔레콤의 연계 사례를 들 수 있다. 2019년 서노송동 선미촌을 예술마을로 전환하는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이 한창이던 때, 인근의 SK텔레콤 전주지점에서 특별한 갤러리가 오픈했다. 선미촌에서 책방 물결서사를 운영하던 청년예술인 7인의 작품이 전시된 것. 전시는 6개월간 이어졌으며, 고객들은 휴대폰 업무를 보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또한 SK텔레콤은 통신 요금 청구서를 통해 해당 전시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그들의 작업에 지지와 응원을 보냈다.
익산의 목공 제조업체인 사회적기업 ‘사각사각’은 환경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공익적 활동을 꾸준히 실천하며 ESG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 제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목을 활용해 환경을 생각하고, 이를 시민들에게 나누며 역사 인식을 높이기 위한 활동에 나서고 있다.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가구 기부, 청년 마을 조성 등 기업 내에서 문화예술과 연계한 자발적인 실천을 보이고 있다. 주류회사 ‘디오니’의 행보 또한 눈에 띈다. 디오니는 작년부터 여러 지역문화예술단체들과 협업을 진행 중이다. 디오니 와인스토어와 카페는 공연장으로 변신하여 클래식 공연이 연주된다. 클래식음악단체 블레씽과 함께 기획에 참여해 올해만 벌써 다섯 차례의 공연을 열었다. 제작 과정에서 포스터, 리플렛 등 인쇄물을 최소화하여 쓰레기 배출량을 10분의 1로 줄이는 등 환경에도 관심을 쏟았다. 또한 지역의 청년예술그룹인 날맹이 스튜디오의 조형 작품을 카페 곳곳에 전시하고 판매했다. 이를 통해 와인스토어와 카페를 찾는 방문객들에게는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며, 지역 예술단체들은 자생의 토대를 마련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