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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 | 인터뷰
전통을 가장 ‘요즘답게’ 지켜내는 방법
한지로 일상을 품은 청년작가들
고다인·류나윤 기자(2023-12-04 18:20:11)

인터뷰 | 한지로 일상을 품은 청년작가들

전통을 가장 ‘요즘답게’ 지켜내는 방법


‘종이’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기록으로서의 역할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한지’는 어떤가. 예부터 문을 바르는 창호지나 부채, 생활 도구까지 한지는 단순한 종이 이상의 쓰임을 다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오히려 오늘에 이르러서는 ‘옛것’이라 치부되기보다 한지의 장점과 다양한 성격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한지 고유의 은은한 색과 질긴 생명력 덕분이다. 게다가 제 장점을 살려 변신이 가능하니 예술가에겐 더없이 좋은 재료가 된다. 덕분에 우리는 생활용품이든 예술작품이든, 알게 모르게 일상에서 한지를 접하고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보았던 예쁜 소품, 선물 받은 꽃 한 다발, 개성 넘치는 조명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한지’가 보인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건 젊은 작가들 역시 한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은 전통의 것을 가장 요즘다운 모습으로 지켜내는 일에 주목한다. 이들이 한지의 맥을 이어가는 방식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한지의 고장 전주에서 독특하고 실험적인 한지 작업을 선보이는 세 명의 작가를 만났다.

한아름 한지조형작가

손길을 더할수록 빛을 내는 매력

한지는 미완의 상태일 때도 가치가 있다. 제조의 주원료인 닥섬유 역시 좋은 영감이 되기 때문이다. 한지조형작가 한아름 씨는 완성된 한지보다 닥섬유와 더욱 친하다. 닥섬유에 다른 소재를 접목한 설치작업으로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현대 사회의 메마른 일상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를 치열하게 찾아 나섰다. 특별한 소재 ‘철망’은 그 결실이다.

“차갑고 규격화되어있는 철망은 따뜻하고 유연한 한지와 대비되는 성질을 가졌잖아요. 이질적인 두 소재를 결합해 저만의 독특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작품을 통해 ‘나’라는 사람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철망은 삭막한 현대 사회를, 그 속을 겹겹이 채우는 한지는 자연의 생명력을 상징해요. 쉽게 전하자면,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여전히 자유를 꿈꾸는 우리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대학에서 한지를 전공한 이후 한지를 만져온 시간만 벌써 16년. 전통기법이 아닌 자신만의 방법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지만, 그는 한지의 매력이 오히려 ‘전통성’에 있다고 말한다.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종이인 만큼, 선조들의 지혜와 지금까지 사용되는 한지의 우수성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한지는 어떤 소재보다 얇고 가볍지만, 동시에 질기고 강한 면이 있어요. 그래서 어디에든 유연하게 녹아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런 면들이 겉으론 약하지만 단단하고 유연하게 삶을 살아가는 우리와도 닮아있단 생각이 들어요. 또, 한지는 만지면 만질수록 빛이 나거든요. 손이 많이 가면 갈수록 달라지는 게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더 만지고 다듬게 되는, 참 매력 있는 소재예요.”


그는 작품 활동 외에도 일상에서 쓰여질 한지의 역할을 고민한다. 매일 오가는 출근길, 로드킬 당한 동물들을 보며 하얀 한지라도 따뜻하게 덮어주고 싶단 생각에 한지 반려동물 장례용품을 제작한 것도 그 과정에서 만난 작업이다. 반려동물 시장이 성장하며, 전국 50곳을 대상으로 납품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계속할 생각이다. 한지에 색다른 소재를 더해 메시지를 전하고, 한지 문화상품에 도전해보고 싶은 의욕도 커지고 있다.

“지화 공예 선생님이 김제에 계셔서 수업을 듣기 위해 먼 거리를오갔어요. 완주에서 두 번 환승해 2시간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도 마냥 행복했어요. 집에 오는 길이면 손에 항상 꽃 한 송이가 있었는데, 그 한 송이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 그때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죠.”


그가 처음 한지꽃을 시작할 무렵엔 ‘한지플로리스트’란 이름은 생소하기만 했다. 한지꽃 자체에 대한 인식도 낮았다. 수입이 없어 그동안 모아둔 돈을 쏟아 작업을 이어갔다.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지꽃에 대한 사랑 없인 버티기 힘든 긴 시간이다. 그의 노력은 최근 몇 년 사이 결실을 맺고 있다. 한지꽃 강의와 각종 분야에서 협업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2021년에는 패션잡지 <보그>의 의뢰로 샤넬과 화보 작업을 하기도 했다.


“작품을 보는 분마다 생화 같다며 칭찬하세요. 감사하지만, 만드는 입장에선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생화는 절대 따라갈 수 없어요. 살아있는 존재는 정말 완벽하거든요. 그걸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면서 저만의 꽃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뿐이에요. 다만 한지는 자연이 오롯이 담긴 종이잖아요. 저는 살아 숨쉬는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연의 소재로 자연을 표현하니 아름다울 수밖에요.”


그의 목표는 '궁중상화'를 재현하는 것. 궁중상화는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의 상 위에 올렸던 지화다.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재현을 위해 관련 서적과 논문을 읽어가며 공부했다. 지금은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 기록에 남아있는 궁중상화를 만들고 있다. 대부분은 이미 완성되었고, 가장 큰 '삼층 대수파련'만 남아있다.


“책 속의 평면적인 그림을 입체적인 꽃으로 만드는 일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시도해보니 그대로 만들어져 너무 신기했어요. 지난 10년간 얼마나 많은 작업을 해왔겠어요. 여태 한지꽃을 만든 게 궁중상화를 위해서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내년엔 전주에서 전시도 열 예정입니다. 이 작업을 계기로 잊혔던 궁중상화를 널리 알려 국가적인 차원의 재현 작업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드림캐쳐는 악몽을 걸러주고 좋은 꿈만 꾸게 해준다는 의미를 담은 아메리카 토속 장신구인데요. 대학 때 한지공예를 전공하면서 한국형 드림캐쳐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양의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을 한지공예로 재해석해 먼저 그림을 구상하고, 틀에 맞게 한지를 오려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한지만이 낼 수 있는 따뜻한 색감과 은은하게 비치는 빛이 재료로서 한지의 가장 큰 매력 같아요.”


처음에는 ‘함께 벚꽃 구경 갈 애인이 생긴다’는 의미의 벚꽃 드림캐쳐를 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드림캐쳐 덕분에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다양한 그림에 정성껏 한지를 덧대며 ‘한지 드림캐쳐’에 저마다의 꿈을 담아 독특한 작업을 완성했다.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며 지역을 상징하는 기념품 제작의 기회도 찾아왔다.


풍남문과 전동성당 등 전주의 대표적인 여행지와 한국전통문화전당이 개발한 캐릭터 ‘호기로운 호사원’을 활용한 작품을 비롯, 평소 관심 있던 임실필봉농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드림캐쳐에 담아내는 작업도 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한지가 일상 가까이에서 쓰일 수 있도록 새로운 시도를 계속할 계획이다.

“고향인 진주에서는 한지를 편하게 구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한지에 대한 애정으로 전주에 정착하게 되었는데요. 전주에서조차 요즘은 다양한 색의 한지를 구하는 게 쉽지가 않거든요. 저처럼 계속해서 한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통은 전통대로 유지하고 젊은 세대에서는 전통의 소재도 시대에 맞춰 발전시킬 필요가 있겠죠. 한지를 소재로 사용함으로써 한지를 알리는데 조금의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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