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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 | 기획 [기획]
작지만 의미 있는 이들의 도전 ①
2023 전북 문화의 발견
고다인·류나윤 기자(2023-12-28 17:44:17)

기획 | 2023 전북 문화의 발견


작지만 의미 있는 이들의 도전

2023년, 마스크를 벗었다. 잃어버렸던 일상도 제자리를 찾았다. 문화예술계도 활기를 얻었다. 공연장에는 관객이 북적이고, 새로운 전시 소식이 이어졌다. 계절마다 열리는 크고 작은 축제를 즐기며 어느덧 겨울이 왔다. 전북 역시 올해는 움츠려있던 문화 판을 제대로 펼치며 적잖은 의미와 성과를 남겼다. 그 속에는 변화된 것과 새로운 것, 꾸준한 움직임들이 저마다 돋보였다.

올해는 특히 환경 보호와 배리어프리 등 문화예술의 선한 의지를 실천하는 키워드들이 떠올랐다. 지역의 대표 축제인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처음으로 배리어프리 프로그램을 도입했으며,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 단체와 공연들이 뒤이어 차별 없는 평등한 무대를 향한 시도를 했다.

환경을 생각한 변화들도 주목할만하다. 지난 가을 열린 전주독서대전은 체험부스 일대를 그린존으로 설정하고 다회용컵 대여와 사용한 폐현수막을 재활용하는 등 친환경 축제로 발돋움하기 위한 노력을 보였다. 환경파괴와 기후위기에 대한 담론을 문화예술적으로 접근해 시각 혹은 공연예술로 풀어내는 활동은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선한 영향력을 기반으로 문화예술 계에는 새로운 물결도 일었다. ‘책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는 전주는 올해 MZ세대를 겨냥한 ‘젊은 축제’로, 독립출판물을 주제로 한 북페어 ‘전주책쾌’를 선보여 호응을 얻기도 했다.

젊은 문화기획자와 예술가들의 활약을 통한 새로운 바람은 지역 곳곳에서 불었다. 군산의 지역서점들은 정해진 기준과 조건이 없는 문학공모전을 만들고, 전주의 청년작가들은 예술의 문턱을 낮춘 색다른 아트페어를 열었다. 1년 내내 지역의 영화산업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실천에 앞장선 공동체, 우리 사회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 특별한 이야기를 남긴 사람까지. 문화저널은 올 한해, 작지만 가치 있는 행적을 남긴 문화예술 현장을 만나보았다.

동네책방, 새로운 문학의 길을 연다

제 1회 군산초단편문학상 공모전


왼쪽부터 임현주, 권세나, 김미경 대표

지난 초여름, 군산의 책방들에는 같은 포스터가 한 장씩 붙었다. ‘제1회 군산초단편문학상 공모전’ 소식이다. 이 소소한 공모전의 시작은 월명동 골목에 자리한 책방 마리서사였다. 이곳의 대표 임현주 씨는 책을 사고파는 역할을 넘어 지역 서점에도 자체적인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민하던 끝에 그는 책방을 찾는 손님들에서 답을 찾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단순히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고’ 싶어서 이곳을 찾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독자가 아닌 저자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문학공모전을 기획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같은 고민을 하는 주변 서점들이 하나둘 힘을 보태 번듯한 운영위원회를 만들었다. 군산초단편문학상의 문을 연 임현주(마리서사 대표), 권세나(조용한흥분색 대표), 김미경(리루서점 대표) 세 명의 책방지기들을 만났다.

임현주ㅣ 책방을 운영하며 가장 많이 느낀 건 갈수록 독자와 저자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점이었어요. 책을 쓰고 싶어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굉장히 많았고, 꼭 작가가 아니더라도 글쓰기가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으면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열망들이 읽고자 하는 열망보다 어떤 때는 앞서 나간다는 걸 느꼈거든요. 책방이 독자를 대상으로 한 사업뿐 아니라 예비 저자들을 위한 사업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턱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초단편’이라는 제목을 내걸었다. 6월 15일부터 8월 31일까지 전국을 대상으로 약 두 달 간 진행된 공모전은 시, 소설, 수필, 희곡, 시나리오 등 장르를 불문하고 참가 자격과 주제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반응은 생각보다 더 뜨거웠다. ‘500편 정도 들어오지 않을까?’ 예상했던 공모전에 2,719편의 작품이 접수되었다. 치열한 경쟁에 많은 이견이 오갔지만 이상하게도 대상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첫 대상의 주인공은 소설 〈팀버〉(이은미). ‘초단편’의 취지에 맞도록 작품 전체를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몰입감에 큰 점수를 받았다.

임현주ㅣ 대상작 〈팀버〉는 사실 말랑말랑하고 편안한 작품은 아니에요. 인간의 탐욕과 폭력성을 다루고 있어 조금 불편하기도 한데요. 심사위원 중 한분의 평가가 기억에 남아요. “팀버는 불편한 글이다. 그러나 문학 안에서 마주하는 이러한 감정들이 때로는 우리의 각성제가 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문학의 역할을 능숙하게 수행했다고 볼 수 있겠다.”고 하셨죠. 마지막까지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되면서 문학적 완성도도 높았기 때문에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이 돼요.


다른 지역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대표부터 독립출판 작가, 군산 시민, 초등학생, 해외에서까지. 정해진 형식을 파괴한 다양한 작품들이 쏟아졌다. 작은 지역에서 준비한 행사에 이렇게나 많은 관심이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서점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미경ㅣ 군산의 서점은 물론이고, 전국 서점들에도 포스터를 보내서 일일이 연락을 돌렸어요. 근데 전부 내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홍보를 해주시더라고요. 제가 강릉에 여행을 갔었는데 우연히 들른 서점에도 ‘초단편 문학상 공모전’ 포스터가 딱 붙어있는 걸 보고 감회가 새로웠죠. 지역을 넘어 동네책방들의 함께한다는 움직임과 연결성을 느낄 수 있었어요. 서점을 유지하는 일이 참 어려운데, 이러한 활동들이 잔잔한 재미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군산에는 13곳의 동네서점이 있다. 이중 6곳은 최근 3년 사이 문을 열었다. 이번 공모전은 군산의 서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 수상자에게 전달할 상금을 십시일반 모으는 등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서점들이 하나의 공동체가 된 것. 12월 2일에는 대상을 포함한 9편의 수상작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작품집을 출간하는 동시에 출간 기념 전시와 북토크 등의 행사를 앞두고 있다. 최근에는 군산 동네서점 지도를 함께 제작해 배포하고 도서전을 계획하는 등 책방지기들은 계속해서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다.

권세나ㅣ 작품집 출간 자체도 의미 있지만 군산 시민 분들이 이러한 행사에 오셔서 책에 대해 더 알고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전주 같은 경우는 책 관련 행사들이 굉장히 다양하게 열리잖아요. 군산에는 그런 자리가 거의 없기 때문에 내년에는 군산만의 새로운 도서전을 계획하고 있어요. 이번 문학상을 계기로 동네서점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거든요.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새로운 도서 축제로 준비해보려고 합니다.


당장은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행사를 잘 치르는 일이 최대의 고민거리다. 작품집이 완성되면 열심히 판매하는 것 또한 남은 과제이다. 서점에 놓인 책 한 권 한 권이 모두 소중하지만 이번 작품집은 직접 참여하고 함께 완성한 만큼 애정이 남다르다. 책방 주인으로서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책이 생긴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작품집을 열심히 판매해 다음 ‘초단편 문학상 공모전’을 지속성 있게 이어가는 일이다. 작은 책방의 힘이 모여 새로운 문학의 길이 계속해서 열릴 수 있길 응원한다.


'예술'로 먹고사는 세상을 꿈꾸는 일

청년 문화예술 기획단체 '세이모 비오'

'다음번엔 오릅니다'. 지난 10월 3일부터 28일까지 전주 객사에서 열린 아트페어의 제목이다. 전북의 신진작가 20명이 참여한 이 아트페어에 출품된 작품 가격은 평균 3만원. 저렴하지만 새로운 창의성이 넘치는 참신한 작품들이었다. 그야말로 '다음번엔 오를만한' 이 작품들은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아트페어를 기획한 단체는 예술그룹 '세이모 비오(SAMO BO)'.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장 미쉘 바스키아의 낙서그룹 '세이모'(SAMO, Same Old shit)에서 따왔다. 기존의 것들은 낡고 촌스럽다는 뜻을 가진 세이모는 뉴욕을 배경으로 독창적인 작업을 전개하며 예술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이소정, 황건하, 김보연, 노채린 씨 등 시각예술을 전공한 청년들이 의기투합한 ‘세이모 비오’(대표 이소정) 또한 이들의 정신을 이어 낡고 촌스러운(?) 지역 문화예술에 도전장을 냈다. '세이모(SAMO)'에 '비오(BO)'는 그래피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팀인 '반'(BAN)과 미술교육단체 '오이아'(oia)가 모였다는 뜻이다.


세이모 비오의 이소정 대표

일상에 스며든 아트페어

미술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갤러리에서 작품을 구매하는 일은 낯설다. 하지만 한 번 경험해본 사람은 그 재미를 안다. 내가 산 작품의 가치가 오르길 기대하며, 작가에게 지속적인 응원과 관심을 보내는 과정의 즐거움을.

올해 국내 미술계는 '키아프 서울(Kiaf Seoul)', '프리즈 서울(Frieze Seoul)' 등 대형 아트페어가 흥행하며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축제에서 지역은 소외되었다.

지역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는 매우 적다. 있다 해도 구매 경험이 없는 관객이 함께 하기에는 높은 가격대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다음번엔 오릅니다'는 아트페어가 낯선 지역 주민이 작품 구매 행위를 조금 더 쉽고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작품 가격을 낮게 제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평균 3만원 대의 작품들을 통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소비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실제 구매 행위까지는 이어지지 않더라도, 갤러리가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 아닌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미술품은 구매하지 않으면 그냥 창고에 있을 뿐인 거잖아요. 관객들이 작품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도록 구매 경험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처음에는 부담 없는 비용으로 작품을 구입하다가 익숙해지면 가격이 높은 작품도 살 수 있겠죠?"

아트페어는 실제로 대부분의 작품이 판매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성공의 배경에는 '세이모 비오'의 세심한 기획력을 꼽을 수 있다. 재원은 행정안전부와 전라북도의 ‘2023년 청년공동체 활성화 사업’ 등 다양한 공모사업으로 마련했다. 참여 작가를 모집하기 위해 SNS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청년 작가들에게 직접 연락하고, 도내 대학 미술학과를 찾아 학생들을 만나고 포트폴리오를 받는 등 수준 높은 아트페어의 구성을 위해 발로 뛰었다. 청년들만이 할 수 있는 진취적인 도전이었다.




예술인이 예술로 먹고 사는 사회

예술을 이야기할 때 따라오는 단어가 있다. '가난'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예술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생업을 위해 식당이나 카페 등 예술과 관련 없는 일에 종사하고, 남는 시간에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도권은 비교적 예술 산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어 일자리가 많지만, 지역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예술인이 '예술'로 먹고 살면 좋겠어요. 세이모 비오의 모든 활동은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해요. 아트페어를 진행한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작가들에게 직접적인 수익을 주고 싶어서요."

아트페어 참여 작가들과 커뮤니티 활동을 진행한 것도 이런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들 사이의 네트워킹, 갤러리 운영자의 퍼스널 브랜딩 강연 등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들을 구성했다. 이미 5회차가 진행되었으며, 오는 12월 8일에는 작가 김현경의 '지역에서 청년 예술인으로 살아남는 법' 강연이 예정되어 있다. 포트폴리오 작성법과 공모사업 기획서 쓰는 법 등이 주된 내용이다. 작가들의 개인전, 그룹전을 진행하고 미술 원데이 클래스의 강사로 초청하는 등 후속 작업 또한 지원한다. 내년에도 이들의 도전은 계속된다. 더욱 보완된 아트페어와 함께 새로운 활동도 구상 중이다. 전북예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세이모 비오’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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