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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 | 기획 [기획]
작지만 의미 있는 이들의 도전 ②
2023 전북 문화의 발견
고다인 기자·류나윤 인턴(2023-12-28 17:47:55)

영화로 하나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커뮤니티 시네마 ‘무명씨네’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상영한다는 뜻의 '무명(無名)', 영화 상영 전 암전되어 빛이 없는 상태인 '무명(無明)'.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무명씨네’(이사장 이하늘)는 전북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커뮤니티 시네마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남부시장 청년몰에서 밤새 장편영화 세 편을 보고 새벽 국밥을 먹고 헤어지던 '나의 N번째 사춘기'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2017년에 만들어졌으니, 어느새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무명씨네는 지역 영화 문화에서 빠져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잡았다.

"무명씨네는 커뮤니티 시네마예요. 개념이 모호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관객'이 주체가 되고, 그들의 수요에 의한 다양한 영화 활동을 이끌어요."

이하늘 이사장은 무명씨네를 영화에 공동체의 힘을 더해 활동해나가는 단체라고 소개한다. 협동조합이자 예비사회적기업인 무명씨네는 영화를 사랑하는 시민 9명이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상영회, 영화살롱, 영화 제작, 비평 교육 등 영화를 매개로 한 다양한 활동을 하며 관객들을 모은다.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새로운 담론을 발굴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올해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과 진행한 '미신의 악몽' 상영회는 커뮤니티 시네마의 존재 의미를 굳건히 했다. 이날 상영된 박강 감독의 <세이레>는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이던 작년 개봉하여 관객들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상영을 놓친 지역 관객들의 수요에 의해 <세이레>는 '미신의 악몽'을 통해 다시 한번 극장을 찾았다.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갈증이 있던 박강 감독 또한 GV(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하여 다음 영화 제작에 대한 동력을 받아 갔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운영되는 대형 영화관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외장하드 속 영화의 발견

매년 1천 편에 가까운 단편 영화가 만들어진다. 그중 상영의 기회를 받는 작품은 극소수이다. 단편의 특성상 상영관을 확보할 수 없기에, 이를 볼 수 있는 경로는 영화제가 유일하다. 무명씨네는 상영의 기회를 놓치고 감독들의 외장하드에 잠들어 있는 영화들을 다시 꺼내 든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한 '뉴웨이브영화제'의 이야기다. '뉴웨이브(NEW WAVE)'라는 영화제의 이름처럼, 영화계에 작지만 힘있는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고생해서 찍었는데 보여줄 수가 없잖아요. 좋은 영화들이 묻혀있는 게 안타까웠어요. 처음에는 감독님들 대부분이 부끄럽고, 다시 보니 마음에 안 들고, 상영하기엔 좀 늦은 감이 있고... 이런 마음 때문에 출품을 주저하세요. 그래도 막상 함께 고생한 스태프와 배우들, 주변 지인들과 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관객도 만나면 좋아하세요."

​뉴웨이브영화제에는 특별한 집행위원회가 함께한다. 지역 청년들로 구성된 '물보라'다. 물보라는 영화제의 1회부터 함께하며 영화제의 정체성 기획, 홍보 및 마케팅, 굿즈 디자인 등 모든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작년까지는 무명씨네 일원들이 '다이버'라는 이름으로 참여하여 프로그래밍을 함께했지만, 올해는 프로그래밍까지 전적으로 물보라가 맡았다. 영화를 사랑하는 청년들이 영화제를 구성하는 주체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물보라를 계기로 다른 곳에 가서도 영화 문화 활동을 해주었으면 해요. 실제로 이 친구들이 지역 영화 현장으로 퍼져서 활동하고 있어요.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고, 영화 잡지를 만든 친구들도 있고요. 자발적으로 확장을 해나가는 걸 보면 보람 있죠. 인재 발굴이랄까요?"

버텨내고 존재하기

최근 무명씨네는 고민이 늘었다. 내년도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역 영화 산업 예산의 전액 삭감과 영화제 지원 예산의 50% 삭감 때문이다. 지역 영화계에 유의미한 역할을 하던 예산들이 사라지며 내년도 단체 운영에 차질이 생겼다. 무명씨네의 2023년도 목표는 '공모사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자생을 위해 공모사업의 비율을 줄이고, 운영 중인 영화 콘텐츠 스토어 '금지옥엽'을 새로 이전하는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소식은 허탈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명씨네는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최근 개봉한 영화 중에 '버텨내고 존재하기'라는 영화가 있어요. 영화의 제목처럼 버텨서 존재하는 것, 저희의 변하지 않는 목표예요."

소외된 목소리에서 찾아내는 커다란 이야기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수상작 극작가 진주

아기자기 예쁜 카페와 식당들이 잔잔한 호수를 따라 이어지는 임실 옥정호. 그러나 옥정호 인근 배소고지에는 과거의 참혹한 역사가 깊숙이 묵혀있다. 한국전쟁 당시 배소고지에서 벌어진 양민학살 사건이다. 한없이 묵혀있을 뻔한 이 이야기는 연극 〈배소고지 이야기: 기억의 연못〉을 통해 세상 밖에 나왔다.

가려져있던 역사와 사람에 주목하다

실제 생존자의 구술 기록을 토대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해야만 했던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 이 작품은 올해 봄 열린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 이야기를 처음 건져 올린 사람은 바로 전주 출신의 극작가 진주다. 그는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목소리들에 집중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2015년 처음으로 전주를 떠나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그때 창작 수업을 들으며 매주 새로운 희곡을 한편씩 써내야했는데요. 쓸만한 소재가 부족해져 고민을 하다가 전주에서 지역의 인물과 역사, 설화와 같은 지역의 스토리 자원에 대해 다루는 강의가 열린다길래 열심히 들었죠. 거기서 ‘배소고지’ 이야기를 만났어요. 처음엔 충격과 슬픔이 앞섰는데 이러한 역사가 이미 끝난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련 논문과 인터뷰들을 찾아보고 현장에 직접 찾아가기도 하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써나가게 됐습니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클래스〉, 〈정동구락부〉, 〈무지개섬 이야기〉, 〈규방〉 등 굵직한 작품들을 많이 써왔지만 〈배소고지 이야기: 기억의 연못〉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작품을 통해 앞으로 내가 무엇을 써야할지 조금씩 길이 보였기 때문이다. 왜 쓰려고 하는지,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 그래서인지 3주 만에 초고를 완성할 정도로 막힘없이 술술 썼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사회의 소수자를 다룬 작품, 현 시대의 이슈 세 가지를 중심축으로 두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매일 쓰면서도 가장 중요하게 두는 고민은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글을 쓰는 일이다.

“제 작품의 내용이나 표현방식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끊임없이 점검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쓰려고 노력해요. 제 글이 관객과 배우를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지는 않을까하는 점이 제일 두려운 부분이거든요. 저는 극작가로 출발한 게 아니라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먼저 했는데요. 잘 쓰는 방법보다는 글쓰기 자체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늘 이야기해요. 일단 쓰면 무슨 일이든 반드시 일어난다고 생각하거든요. 쓰는 순간 삶은 풍성해지는 법이죠.”


‘도전’을 꿈꾸는 진주의 2024년

글쓰기의 소중함은 어릴 때부터 이미 그의 일상에 녹아있었다. 시와 소설, 장르를 불문하고 이것저것 썼지만 제일 많이 쓰고 익숙한 글이 희곡이었다. 연극을 좋아한 덕이었다. 학교나 교회에서 직접 공연할 기회를 자주 접하며 자연스레 관심이 깊어졌다. 일상처럼 이야기를 수집하고 무대에 올리는 일을 계속하며, 그는 이제 연극계에서 주목하는 작가가 되었다. 현재 창작집단 ‘글과무대’, ‘프로덕션IDA’ 소속 극작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지난 2021년에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두산아트센터 ‘DAC 아티스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가까운 12월에는 국립창극단 작창가 프로젝트 공연을 앞두고 있다. 안데르센의 동화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창극 〈눈의 여왕〉을 선보이며 진정한 사랑의 방식과 영원성에 대해 질문을 던질 예정이다.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전주에서 판소리를 들으며 자란 한 사람으로서, 창극 작업은 늘 설레요. 올해는 특히 연극뿐 아니라 오페라나 뮤지컬 작업들도 많이 했거든요. 앞으로도 작품의 범위를 꾸준히 확장해나가고 싶고, 장르적으로는 코미디물이나 SF소재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소재나 형식이 새롭거나, 해보지 않은 장르이거나 이런 도전적 요소들이 생길 때 제가 더 열심히 매달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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