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 문화로 지역 읽기
진안
호남의 지붕이라 불리는 진안고원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 울창한 숲과 계곡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약 2억만 년 전 두 산맥이 융기하여 만들어진 이곳은 그 깊은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예술을 품는다. 성수면 중평마을에서는 중평굿보존회가 결성되어 중평 농악(굿)을 바탕으로 전라좌도 농악의 맥을 잇는다. 또한 백운면 손내옹기에서는 이현배 옹기장이 융성했던 진안의 도자문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단순히 과거의 것을 잇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닌 동시대 예술가들과의 협업도 활발하게 이어가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거의 예술을 지키는 이들의 옆에는, 현대의 바람을 일으키며 진안을 전통과 현대의 교차점에 놓는 사람들도 있다. 2020년 지자체와 지역의 작가들이 함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예술로 농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어 귀촌한 현대무용가 김선이·김문구 부부가 이끄는 ‘써니플랜트’는 진안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가들이 진안의 잊혀진 공간들에 모여 마을 주민들과 함께 춤을 추고, 예술을 만든다. '무진장' 중 유일하게 동네 책방이 있는 곳도 진안이다. 커피트럭을 타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던 김현두 씨가 고향에 정착하고 카페와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진안의 잊혀진 공간들이 춤을 춘다
공연예술단체 '써니Plant'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진안군 1개 읍과 5개 면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용담댐 건설 때문이었다. 1만 2000여명의 사람들이 수많은 추억을 뒤로 한 채 고향을 떠났고, 그들이 살던 공간은 그곳에 담긴 추억과 함께 가라앉았다. 이후 용담호는 관광지로 개발되는듯하며 둘레를 따라 크고 작은 휴게소와 쉼터들이 생겼다. 하지만 유동인구가 줄어들고 관리자가 부재하며 공간들은 점점 방치되어 갔다.
그렇게 문을 닫은 폐휴게소는 2016년, 춤으로 채워지며 다시 조명 받았다. 공연예술단체 써니Plant가 이끈 '진안공간사랑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수몰민들의 이주 단지인 신연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현대무용가, 연극인, 사진작가, 미디어 아티스트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상전면 선일 폐휴게소에 모였다. 전문 예술인들이 바라본 '공간'과 지역 주민들이 기억하는 '공간'이 교차되며 사라져가던 진안에 대한 기억을 춤으로 되살려내고, 기록했다. 이 프로젝트는 농협창고, 구 용담호 미술관, 마령면 옛 점방 등으로 이어지며 진안의 낡고 죽어있던 공간들에 온기로 채웠다.
“써니Plant 작업의 모티브는 ‘공간과 사람’이에요. 공간에는 개인과 시대의 기억이 담겨 있잖아요. 가치를 다했다고 여겨지는 공간들을 조명해서 그 안에 담긴 기억을 되살리는 거죠. 각 공간의 이야기와 분위기에 맞게 설치미술도 해보고, 무용도 해보고, 연극도 해보고, 영상도 찍고… 많은 걸 실험하고 도전했죠. 그런 공간들에는 무대와 객석이 나눠져있고, 좌석수는 얼마인지 하는 등 일반적인 극장의 룰이 없어요. 무엇을 담을지가 자유로웠어요.”
진안공간사랑프로젝트는 2021년부터 '진안댄스미디어공연예술제'라는 명칭으로 규모를 확대하고 1박2일에 걸친 축제를 열었다. '댄스 미디어'에 주목한 것은 무용 장르가 낯선 관객들을 위해 미디어 장르를 결합하여 조금 더 쉽고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미디어 파사드를 활용하기도 하고, 숏폼 콘테스트를 주최하여 공간과 춤을 주제로 한 다양한 영상을 공모 받았다. 써니Plant를 이끌고 있는 김선이, 김문구 부부는 뛰어난 실력으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국제현대무용제(MODAFE) 등에 초청되기도 했던 현대무용가 겸 안무가들이다. 번잡한 서울에서 벗어나 쉬기 위해 연고도 없는 진안으로 내려온 지도 벌써 10년. 이들의 새로운 거점이 된 진안은 공연, 특히 현대무용과 같은 순수예술을 하기엔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진안은 공연 장르의 인프라가 제로와도 같아요. 전문 스태프들과 아티스트들은 전부 서울이나 다른 외지에서 오세요. 제대로 된 공연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전주조차 무용수가 없어요. 2023년에는 아르코의 문화예술연수기관으로 선정됐는데 연수단원을 채용하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요.”
2021아트체인지업 수상작 '공간'
소비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변변찮은 공연장 하나가 없다. 써니Plant가 상주단체로 등록되어 있는 진안 문화의집은 군내 유일한 공연장이지만 기본적인 부대시설 및 장비조차 없는, 강당 수준에 그친다. 지자체 또한 예술 장르의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노력한 과정들을 인정받듯 써니Plant는 최근 다양한 결실을 맺었다.
2020년에는 구 용담호 미술관을 배경으로 촬영한 작품 <공간空間>이 아르코 온라인미디어 예술활동 '아트 체인지업상'에 선정되었다. 5000여 개의 작품 중 14개 작품에게만 주어진 가치있는 상이었다. 또한 진안댄스미디어공연예술제는 전국 군 단위 최초로 대한민국공연예술제 사업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프로젝트의 초반에 함께 참여했던 마을의 초등학생이 어느덧 자라 무용을 전문적으로 전공하고 있기도 하는 등 예술 자원들을 발굴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어 기쁨이 배가 되었다.
지난 10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써니Plant는 올해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예술제의 주 예산을 확보할 수 있던 아르코 공연예술제 공모사업도 포기했다. 대신 새로운 작업을 시도 중이다. 문화예술연수단원으로 함께 일했던 박하영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김선이 예술감독이 글을 써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 제목은 '공간(空間)'. 그림림책의 내용은 역시나 진안의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햇살이 내리쬔다는 뜻의 'Sunny' 와 심는다는 뜻의 'Plant'가 합쳐진 이름처럼, 이들 부부는 앞으로도 진안의 공간들에 햇살을 채우고, 심어낼 것이다.
책을 만나는 일, 곧 사람을 만나는 일
진안 책방사람 & 공간153 김현두 대표
핑크색 커피 트럭을 타고 전국을 누비는 한 청년. 10년 전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로 유명해진 커피청년이자, 문화저널의 오랜 구독자라면 익숙할 2015년 '커피청년의 별별여행'의 필진이기도 한 김현두 씨는 9년 전 고향인 진안에 정착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카페 '공간153'을 차린 후 진안을 기반으로 여러 문화 기획을 하며 '공간153'을 문화사랑방으로 만들었다. 2021년에는 공간153 옆으로 작은 땅콩 서점 책방사람을 열었다. 기존 건물을 증축하여 만든 5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지만, 50평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작은 책방의 매력은 주인장의 취향대로 큐레이션 한 서가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책방사람'의 서가는 왜인지 가족과 한마을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한쪽 벽면에 채워진 그림책은 그의 아이들이 영향을 주었다. 어린 자녀들을 키우며 자연스레 그림책을 접하게 된 그는, 어른에게도 울림과 위로를 주는 그림책이 있다고 말한다.
한 칸은 어린이들을 위한, 한 칸은 어른들도 보기 좋은 그림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가인 아내가 주로 관리하고 있어서인지 아내의 취향에 드러나는 문화예술에 관련된 책들도 많다. 한편에는 현두 씨가 관심 있는 마을과 정원에 관련된 책들이 있다. 장서수는 많지 않아도, '책방사람'만의 정겨움이 물씬 느껴진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되게 반대를 많이 했어요. 인터넷에서 주문하면 내일 바로 도착하고, 심지어 할인도 하는데 오프라인 서점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는 거죠.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이 제가 지금 서점 운영하는 걸 보면 되게 놀랄 거예요. 지역 서점을 갈구하고 필요로 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희 서점의 가치를 알고, 책을 직접 사러 여기까지 와주시죠. 지역에 책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잖아요.”
'책방사람'의 이름은 '책을 읽는 일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커피트럭을 타고 다니던 시절,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은 그의 가치관과 성격, 나아가 삶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공간'이 아닌 '사람'을 여행한다는 표현을 쓰고는 했었다. 책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활자를 넘어 저자와 소통하고, 책방의 북토크를 통해 직접 만난다. 나아가 이곳 책방을 통해 또 다른 독자를 만나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렇게 책방사람이 진안의 '사람'을 연결하는 작은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카페와 서점은 종종 무대로도 변한다. 카페를 열고 지난 8년간 연극 배우, 개그맨, 인디밴드, 재즈피아니스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지역 주민들과 만나 작은 강연이나 공연을 해왔다. 가장 최근에는 도시재생 분야의 전문가로 유명한 서울시립대학의 정석 교수의 북토크가 있는 등, 분야를 넘나들며 군민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오랜 시간 지역에서 문화기획자로서 활동해 온 그이지만 아직도 문화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다.
“초기에는 그런 행사를 매달 했어요. 거의 강박처럼 해왔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지금은 패턴을 바꿨어요. 좋은 제안이 오거나, 너무 모시고 싶은 분을 만났을 때만 해요. 그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지치지 않고 계속 지속될 수 있는 것 같아요. 보조사업에 대한 생각도 자주 해요. 보조금을 받게 되면 행사 진행에 대한 경제적 리스크가 전혀 없기 때문에 준비하는 입장에서 덜 부담스럽죠. 그렇지만 그만큼 모객에 신경을 덜 쓰게 되니까요. 자생하는 힘을 기를 수가 없는 거죠.”
계속 살아남기 위해, 그가 요즘 계획하고 있는 것은 공간의 확장이다. 현재 진안에는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펜션들만 존재하고, 배낭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없다. 그들을 위해 카페와 서점의 뒷뜰에 북스테이를 할 수 있는 작은 숙소를 만들 예정이다. 공간153과 책방사람,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북스테이까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들 작은 공간의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