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는 관극문화
글 최여정 공연칼럼니스트ㆍ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홍보마케팅팀장
공연장에서 뮤지컬을 보며 메모를 하면 안 되는 걸까?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 던져지자 각자의 입장에서 여러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논의의 촉발은 작년 연말, 한 온라인뉴스 기자가 쓴 ‘뮤지컬 리진을 볼 필요가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다소 감정적으로 비칠 수 있는 기사의 내용은 기자가 필기를 위해 메모장을 꺼내자 옆 자리 관객이 시끄러우니 메모를 하지 말라고 제지했고, 제작사 직원 역시 메모를 할 거면 뒷줄 다른 자리로 옮기라는 안내를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기자는 뮤지컬을 보지 않고 공연장을 나왔다. 이 기사와 함께 등장한 자극적인 용어가 ‘시체관극’이다.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시체처럼 가만히 앉아 두 동공만 무대를 향해 고정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관극문화가 생긴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 해왔던 영화관람 문화처럼, 공연장에도 공연관람문화가 있다. 지금까지 공연장 관람문화는 ‘통화는 삼가주세요, 앞자리는 발로 차지 마세요’ 같은 상식적인 수준의 영화관 관람문화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대중밀집 공간이라는 점에서 영화관이나 공연장이 크게 다를 것이 없고, 이제는 전국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문화예술회관’이라는 이름의 공연장에서 관람을 경험한 덕분이기도 하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1988년 예술의전당 등 대표적인 공연장 개관 이후 2000년대 들어 전국 지자체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문화예술회관 건립 붐이 일었고 그 수는 이제 무려 300여개에 달한다.
그런데 갑자기 ‘시체관극’이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은 시체관극을 요구하는 주체다. 절제된 환경에서 최상의 공연감상 환경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연출자나 공연제작자, 혹은 공연장 관계자가 아니라 바로 공연을 보는 옆 자리의 관객이라는 점이다. 우리 관극문화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캠페인 수준에서 안내되는 몇 가지 관람규칙이 아니라 옆 자리 관객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불만을 공연장이나 제작사에 직접적으로 전하는 상황이다. 공연장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우리는 왜 이토록 서로에게 엄격해지는 걸까?
공연은 영화처럼 ‘보고 감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고관여 경험재’라는 점에서 영화와 다르다. 즉 영화티켓의 많게는 몇 배에서 혹은 몇 십배가 넘는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또 집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가는 것과 다르게 지방에 있는 관객이라면 서울의 공연장까지 찾아오는 수고스러움도 감내해야 한다. 이 모든 상황을 구체적으로 가정해보자. 기사에서 언급되는 <리진> 티켓 가격은 R석 66,000원 S석 44,000원이다. 울산에 사는 한 여대생이 이 공연을 보려면 부담스러운 가격의 티켓을 구매해야 하고, 서울 충무아트센터까지 가기 위해 기차표는 물론이고 늦은 시간에 다시 울산으로 돌아가는 표를 구하지 못한다면 공연장 근처에서 숙박까지 해야 한다.
이 여대생이 공연을 기다리는 마음을 생각해보면 논의의 문제는 의외로 쉽게 실마리가 풀린다. 공연관극문화가 보편화 되어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이토록 어렵게 마련한 그 날, 그 시간의 단 한순간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옆자리 관객이 내는 작은 연필소리도 민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관객을 비판하거나, 혹은 메모를 하며 소리를 낸 기자 역시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공연관람 환경을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300여개에 달하는 지역문화예술회관 숫자를 자랑하지만 대형뮤지컬을 비롯한 대다수의 공연은 역시나 서울에서만 볼 수 있고 뮤지컬 최고가 15만원이라는 저항선도 깨져 이제는 20만원에 달한다. 세계적인 클래식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티켓 가격이 20~30만원 선이라는 고가논쟁도 무색해져 40~50만원까지 치솟은 상황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공연장에 갈 수 있어야 한다. 고가 티켓부터 저가티켓까지 다양한 관객층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티켓은 물론 실업자 티켓까지 다양한 할인 등급을 구분해 놓을 뿐 아니라 어린이와 장애인을 위한 전용 공연장도 운영하고 있는 해외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그래야 옆자리 관객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며 소리낼까봐 살피는 대신 공연에 집중할 수 있다. 뮤지컬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망원경을 꺼내 들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팬들의 뒷모습을 보면 역으로 일반 관객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특정 팬심으로 움직이는 공연문화가 아니라,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 모두가 즐기는 공연문화가 되어야 한다.
영국에 머무르며 방문했던 수많은 공연장에서 관객들은 서로가 서로를 환대했다. 영국 최대의 클래식 축제 BBC Proms에서 들었던 최고의 연주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건, 내 옆자리에 앉아서 즐겁게 연주를 감상하시던 할머니가 나를 향해 웃으며 건넸던 인사 한 마디다. “Enjoy the performance!”
최여정
대학로의 ‘연극열전’을 거쳐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에서 한국 창작연극을 알리는 일을 했다. 현재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다양한 문화 현장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럴 때, 연극》,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 《공연홍보마케팅 매뉴얼 A to Z》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