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6 | 칼럼·시평 [문화저널]
<저널칼럼>백가정명의 시대를 위하여
문화저널(2003-12-18 14:07:34)
한 인간의 유년시대의 삶에 새겨진 경험의 인각 중에서도 자신이 살던 주거 환경이나 주변 환경의 감각적 추억이 가장 강렬한 것에 못지 않게, 어린 시절의 독서 체험에 담긴 무지개 빛의 생생함은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감각의 영속화이다. 사실상 지금의 40대 이상의 연령층에게 있어서 전쟁 직후의 황량한 소년 시절을 더할 나위 없이 풍요한 꿈으로 수놓아 준 것은 「새벗」과「학원」이라는 잡지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나,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채워 줄긴 양말이 없었지만, 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 선물 보따리를 둘러맨 산타클로스가 그려진 그 잡지들의 표지는 우리의 가난함과 쓸쓸함을 넉넉히 채워 주고도 남음이 있는 마음의 양식이었다. 이러한 많은 독자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추억의 뿌리가 곧 문화의 힘 혹은 저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80년대는 그 초부터 이러한 문화의 분위기를 활성화시키고 풍요화 시키기는커녕 경색화시키고 불모화시키는 방향으로 치달려 왔을 뿐이다. 그리하여 정책 당국에서는 언론통폐합법이라는 미명 아래 기존의 신문 ·방송의 매체의 수효를 줄이는 것으로부터 80년대를 구축해 나갔다. 그런가 하면 갓 태어난 「실천 문학」올 폐간시키고 민중 미술을 철거시키고 전통 있는 출판사의 등록을 취소시켰다. 그러나 문화 현장에서의 수 천 년 전의 갱유분서를 되살려 놓은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처사들이 오늘날 어떻게 부메랑의 화살이되어 본래의 주인을 겨누고 있는지를 우리는 불과 십 년도 못 돼서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보면 문화가 지닌 여성적인 힘을 배제하고 남성적인 정치로만 치달을 때 그 정치는 다시 거친 완력의 복수 앞에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엄연한 교훈이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다행히 최근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80년 5월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우리의 손에서 빼앗겼던 문화적 매체들이 속속 우리의 손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우리는 百家爭嗚의 시대라고 불러 마땅하리라. 다양한 문화 매체를 통해서 떠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자체 정화의 능력을 유치해 나갈 수 있다. 흔히 60년대 초와 80년대 초의 百家爭嗚의 시대가 다시 역사의 후퇴를 불러들였다는 체제 쪽의 억지와 언론 쪽의 조심스러운 후회가 간간이 들려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시끌벅쩍함은 문화 자체의 훈련에 의해서 다스려질 일이지 인위적인 통제와 폭력에 의해 다스려질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문화적 매체의 다양함의 혜택을 못 누린 채 성인으로 접어든 요즘의 젊은 세대에 대해 더욱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내야 할 것 같다. 가정에서는 가부장제의 엄격함을 상실한 아버지 세대의 한없는 관용을 누리면서도 정치적 빛 경제적 현실에서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규제와 불평등을 몸으로 겪으며 자라난 세대가 바로 요즘의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서 좌경화의 조짐이 자주 고개를 드는 것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돼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젊은 세대의 살벌함과 무모한 혁명 논리를 탓하기에 앞서 선진 각국의 학생층이 누리는 문화적 혜택의 결핍들을 하나씩 헤아려보고 그것들을 보충하는 작업부터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학생층은 우선 초등학교 시절부터 숙제의 질곡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일제 시대의 유물인 반복식 베껴쓰기의 숙제는 학생들의 창의성을 유발시키기는커녕 싫증과 따분함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러한 숙제의 반복은 그들이 마음놓고 놀고 자라게 하는 공간의 부족과 함께 반드시 어른 세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우리의 어린 세대는 이제부터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입시 지옥의 시달림에서 벗어나질 못하고있다. 그리하여 가장 꿈 많은 사춘기에 접해야 할 고전들은 저질의 참고서들과 부교재들에 자리를 내어준 채 제 자리를 못 차지하고 벌써 몇 십 년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획기적인 입시 제도의 개선이 없이는 절대로 개선이 불가능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과정을 겪고 자라난 세대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 어떤 대학 생활을 보낼 것인가를 상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들은 우선 타율적인 숙제와 입시 위주의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진정한 대학공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또한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진 빈약한 상상력은 현실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만 파악하는 사회과학류의 독서로만 쏠릴 뿐이다. 더구나 이제는 예비 성인으로서 연애와 교제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공공 시설과 연극 무대는 특히 지방의 경우 태무하다. 이런게 자라난 세대에게 어떻게 순리와 교양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보면 해방 후 반 세기 동안 우리는 먹고사는 본능의 충족을 해결하는 데만 시간을 바쳐온 셈이다. 그래서 예술의 현장에서도 오로지 배고픔과 헐벗음의 한탄과 원한만이 슬픔의 구조를 이루는 소위 민중 예술만이 젊은 세대에게는 예술의 전체인 것 같은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의 공평함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모순과 뇌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인간의 진정한 모순과 고뇌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러한 고뇌를 표현하는 예술 양식과 방법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예술의 세계에서도 百家爭喝의 시대가 도래해야 할 필연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百家爭嗚 시대의 도래를 위해서는 온통 정치와 경제로만 쏠려 있는 상상력을 문화 쪽으로 전환시키는 분위기의 조성이 시급하다. 이번 총선 이후 달라진 국회 의식 분포에 따른 하고 많은 좌담회를 TV를 통해서 여러 차례 시청해 보았지만, 나는 그토록 상식적인 논리의 전개에 온 국민이 반 세기 가까운 갈증을 느끼며 기다려 왔던가 하는 충격 때문에 더 이상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만큼 우리의 정치는 평범한 상식 자체를 배반해 온 역사로 일관해 온 것이다. 아니 정치야말로 따지고 보면 문화적인 국민의 의식 수준에서는 최하위의 관심사로 그쳐야 할 정도로 상식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다. 흘러간 시대의 정치 세계의 이면에 담긴 숱한 비화들을 재탕 삼탕으로 울쳐 먹는 이 나라 매스컴들의 실정으로 볼진대 그러한 소재들의 충격이 모조리 여과됐을 때는 어떻게 매스컴의 방향을 전환시킬 것인가가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 같다. 그만큼 우리의 신문들은 정치면을 꾸리는 것만으로 중독된 신문의 종류가 단연 압도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 기사면이 현재의 오락이나 여가의 면만큼이나 한가로운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를 우리는 기대해야 마땅하다. 정치가 온 국민의 관심사의 가장 큰 기둥을 이루는 민족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직절하게 표현하는 최근의 李淸俊의 소설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음미해 보아야 할 가장 시급한 주제일 성 싶다. 국가와 민족을 떠받치는 기둥들이 다양한 나라가 곧 선진국의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건을 잘 만들어서 외국에 파는 일이나 운동경기를 통해서나 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하려 드는 체제의 상상력은 이제 수정돼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외국 문학을 전공하는 탓으로 자료수집에 들어가는 그 많은 비용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우리의 문화가 외국에서의 연구 및 수입의 대상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상품의 수출에 대해서는 언제 규제의 장벽이 높아질지를 예측할 수 없어도 문화의 수출은 한 번 문호가 열리면 거의 영속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만 수출하고 문화 수출에는 너무나 등한한 나머지 영악스러운 경제 동물로 낙인찍힌 일본의 경우가 계속 우리의 선례가 될 수 있는가를 이제 곰곰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강대국의 유수한 도시마다 한국의 문화원이 개설되어 한국의 도서와 문화가 외국인들의 향유 대상이 될 그 날을 꿈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