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들에 관해서 별 관심없이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듣는 음악 등등 우리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하면서도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질문은 던지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좋을만큼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이제 우리가 내버리다시피했던<판소리>를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의 본질에 밀착되어 있으며, 귀중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판소리가 무엇이며. 어째서 중요한 것이고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얘기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한 측면과 다양한 수준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짧은 시간 안에 판소리의 본질을 (왜냐하면 판소리의 여타의 기능은 이 본질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때문에)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방법은 <판소리가 어디서 왔는가>를 통해서, 즉 판소리는 源流랄까, 기원을 통해서 접근하는 것이 손쉬운 일일 듯하다.
이는 오래 전부터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을 뿐 아니라 여타의 것보다는 이 문제에 비교적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있어 논의의 실마리가 쉽게 찾아질 듯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本稿) 에서는 판소리가 어디서 왔는냐를 통해서 판소리는 무엇인가 어째서 판소리는 중요한 것인가, 판소리를 외면하고 사는 삶이 결국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학설은 이른바 <무가기원설>이다. 그 근거는 1)판소리의 분포 지역이 무가로는 시나위권과 일치한다. 2)내용이 무가적 성격-살풀이적 성격이 강하다.3)소도구로 사용하는 부채가 무가에서 사용하는 부채와 같다.4)전통적으로 판소리의 담당계층이 무당 가계에서 많이 나왔다. 5)판소리의 장단은 무가의 굿거리에서 나온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1)-4)는음악외적 성격을 통해서 동질성을 말한 것이며 5)는 음악적 d요소의 하나인 장단을 통해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두 번째 주장은, 판소리는 <육자배기토리>에서 왔다는 주장이다. 육자배기토리는 미·라·시 세음이 주음이고 여기에 많은 유동하는 하강음이 첨가되어 강한 정서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데 판소리는 바로 이 육자배기토리와 선율의 구성적 특성이 같다는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근본적으로는 첫째 주장인 <무가기원설>과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판소리의 분포지역은 민요적으로 보면 <육자배기토리리> 의 지역이며 무가(여기서는 전라도 무가)도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무가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大學硏究者들임에 비해서 <육자배기토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음악 연구자들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의 학문적 입장에 따른 시각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내용을 측면을 달리 해서 말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이들 두 주장은 가시적 증거를 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그만큼 광범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판소리는 그렇게 단순한 대상물이 아니다. 판소리에는 무가와 관계가 없는 시조, 가곡, 시창 등의 요소도 수없이 있고 효·충 등 무속의 관념과는 다른 관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있으며 육저배기토리와 관계없는 추천목이니 경드림이니 매나리조니 하는 것들도 있다.
결국 이 두가지 견해는 가장 설득력이 있으며 가시적 증거를 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너무나도 명백한 반론의 여지와 증거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세 번째의 절충적 견해가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입지가 마련된다. 세 번째 주장은 판소리의 기원을 우리의 음악적 유산의 어느 하나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기왕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음악적 유산 혹은 자산에서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판소리는 민속악뿐만 아니라 정악까지도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음악적 자산이 합쳐져 이룩된 거대한 복합체라는 생각이다. 민속악이라 하여도 민속악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경드림이니 메나조리조니하는 경기도와 경상도의 민요도 포함시켜야 하고 민요에도 어부노래가, 길소리, 농부가, 새타령 등 온갖 노래들이 망라되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시의 시창이나 시조가 직접 들어있기도 하고, 가곡성우조라 하여 가곡의 음악적 특색도 판소리에 도입되어 있다.
사실 판소리에는 우리의 음악적 유산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상언어의 음악성(speed-me-lody)까지고 깊이 침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도섭이라하여 장단 없이 자유리듬으로 부르는 대목이 그 대표적인 예다. 또한 사상이나 관념의 측면에서도 판소리는 무속뿐 아니라 유교,불교,신선사상,풍수지리사상 등 수 많은 것들이 뗄레야 뗄수 없는 엉클어진 전체로 뭉쳐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 세 번째 주장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근거들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상과 같이 가시적 증거들 현재있는 것들 속에서 하나하나 찾아가는 방법은 가장 손쉽고도 타당한 방법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만큼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앞서 있었던 어떤 것들 <예컨대 민요나 무가 등등)을 판소리로 만든 근원적인 원천, 즉 인간에 대한 고려없이는 궁긍적 해결에 이르지 못하고 끝없는 순환에 빠질 우려가 있음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판소리의 원류가 무가다, 민속악이다. 혹은 그 모든 것이다 했을 때도 그것은 최종적인 원천이 되지 못하고, 항상 그것의 원천이 무가라면 무가의 원천이 또 있어야 되고, 그것은 또 다른 원천이 있어야 하게 때문에 그 물음은 끝이 없어 결국은 최종적인 답을 제시할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무가니 민요니 하는 것들이 모여 판소리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냥 그것들만 존재하면 항상 판소리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판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판소리로 새롭게 창조해 낼 수 있는 창조주체 즉,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국인, 그것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판소리는 바로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만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네 번째 주장이 나온다. 판소리는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표현 방법이 모여 이루어졌다는 것, 다시 말하면 한국인이 한국의 풍토 속에서 모여 살면서 문화를 형성하고 이 문화 속에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정서 표현의 방식이 바로 판소리를 낳게 했다는 것이다. 곧 한국인의 삶에서부터 판소리는 나왔다는 결론이다.
예를 들면, 판소리 <심청가>에서 심봉사가 마누라를 잃고 <아이고 아이고 어찌리...>하며 탄식하는 것은, 한국인이 가까운 이가 죽었을 때 그렇게 울기 때문이며 <얼씨구나 절씨구>하고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기쁠 때 그렇게 하게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내 버들은 유록장 두리고, 뒷내 버들은 청포장에 둘러->라는 봄을 노래하는 것은 한국의 봄이 그러하기 때문이며, 또 판소리 속에 유교·불교·무속 등 다양한 사상관념이 들어 있는 것도 한국인의 삶이 바로 그런 여러 사상관념 속에서 영위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인들로서 한국땅에서 살며, 한국인과 진정한 사랑을 해본 사람은 <사랑가>초두의 <둥둥둥 내사람>이라는 대목만 들어도 사랑의 기쁨과 풍요로움과 원만함. 유족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둥둥둥 내사랑>은 바로 그런 한국인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이런 저런 구체적인 너절한 얘기가 없어도 수 많은 울림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판소리는 한국인의 삶을 성악으로 표상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한국음악을 즐기지 않는 삶이 한국 음악에서 진정한 감동을 맛보지 못하는 삶이 진정한 의미의 한국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냐라는 것이다 외국의 음악에는 이와 마찬가지로 외국인의 수 천년에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미명하에 한국문화를 서양의 것으로 대체하여 문화적 지배를 수행함으로써 민족 자체의 소멸을 노리는 서양인들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이 아닌지 깊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문화가 없어지면 민족이 없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역사적 진리다. 우리가 판소리를 끝끝내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우리 민족이 소멸되지 않고 영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