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88.7 | 특집 [특집]
<저널특집>-전주대사습놀이-진정한 서민들의 축제마당이 필요하다
유영대(전주우석대 교수·한국고전문학)(2003-12-18 15:02:16)

놀이라고 붙인 뜻
내생각으로 전주대사습놀이만한 축제도 없을 듯하다. 그 규모에서도 그러하고 내용에서도 그러하다. 요즈음도 그렇거니와 예전에는 더욱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춘 이 지역의 축제이자 전국적인 잔치였었다. 더구나 그것이 관의행사로 제도화된 것이 아니고 통일을 매개로 한 민간주도의 축제였다는 것은 대단히 의의있는 일이다.
홍현식씨의 정밀한 조사보고에 의하면 원래 대사습은 동지날의 통인놀음이라고 한다. 대사습날에 통인이 광대를 초청하여 통인청이나 활터에서 판소리를 듣고 즐겼으며 인기있는 광대의 판소리가 고조되면 밤을 새워가며 경청하였다 한다. 물론 감사나 부사와는 전혀 무관한 진정한 서민들의 축제였었다.
원래 전주야말로 판소리의 고향이다. 어떤 광대에게나 전주대사습에서 소리하는 것이 서울에 가서 소리하는 것보다 더 큰 영예로 생각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전주대사습에 참가하기 위하여 온 광대들이 먼저 고창에 들러 신재효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자신의 기량을 점검하였다고 한다. 일단 대사습에서 소리를 했다는 사실은 광대 스스로에게도 큰 영예가 되었지만 그것이 경연, 혹은 시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전주대사습놀이라고 이름지었을 때, 사습이란 물론 개별적으로 수련한 광대 개인의 기량을 의미한다. 그러면 놀이라고 붙인 뜻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전통적인 축제판은 난잔판이다. 어느 동아리에서 축제가 벌어진다는 것은 우선 그 사회를 지배해 온 보수적인 내용의 금기사항들이 깡그리 무시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 억압과 각종의 제약들이, 당분간이지만, 효력을 상실하고 축제 특유의 문법이 그 사회의 규범을 대치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금기로 여겼던 투전판이 자연 활기를 띠게 된다.
사람들마다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며,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더라도 포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남사당패가 어름을 놀거나 버너를 돌라고, 초랭이와 이매가 나타나서 양반과 선비를 형편없이 만들거나, 말뚝이가 양반집 삼형제를 곤죽으로 만들기도 한다. 계층간의 단단하고 견고한 장벽이 쉽게 허물어지는 듯한 상황이 도처에서 마련되기도 하고 봉변을 두려워한 양반들이 거리출입을 삼가는 것도 바로 이 축제기간의일이다. 방안에만 갇혀 성적으로 왜곡되고 억압받는 아녀자들이 해살대며 속살을 다른 남정네에게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쉽고도 자연스레 주어진다. 광대들의 판소리가 불리는 마당도 바로 이같은 조건 아래에 있다.
이러한 양상들을 우리는 제의적 관란(카오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떻든 혼란스러운 놀이의 마당을 통해서 우리들은 역전된 사회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말뚝이가 양반을 조롱하거나 방자가 도령을 골탕먹이는 일은 바로 현실의 세계를 떠난 놀이의 장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런 행위야말로 놀이의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런 즐거움으로 우리들은 세계를 고정불변의 완성된 것으로 인식하기 보다 뭔가 금제와 억압으로 쌓여있음을 알게 된다. 어느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놀다보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일상이 비로소 얼마나 억압적인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전면에 대두되는 것이다. 이 노는 기간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의 개조 가능성에 대하여 새로이 인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이번 대사습놀이의 전국대회는 새로 부활되어서 연 네 번째 맞이하는 것이다. 전국대회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붙었는지 모르지만 이같은 명칭이 갖는 기본적인 속성은 경연만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대사습이 놀이였다는 점은 밝혔다. 우리가 대사습에 대해서 갖고 있는 오해는 '그것이 광대의 경연대회로서 장원을 하면 명창칭호를 얻고 감사나 부사의 칭호를 얻어 서울 대가에 소개되었으리라'고 짐작하는 일이다. 놀이와 축제, 잔치를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을 계속 확인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대사습이 갖고 있는 특징은 경연대회로 바뀌어버렸다. 심사위원을 소개하고 등수를 매기고 그 등수에 여러 가지 말들이 따라 다니는 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변모해버렸다. 경연대회의 양상을 띠다보니깐 대사습의 진행이 대체로 정돈되고 절도있는 모습을 갖춘 대신 놀이가 갖는 자유분방한 활기는 없어져버렸다. 전주사람들이 축제를 통하여 즐겁게 놀고 삶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되는 대신에 곱게 화장한 참가자들의 노래를 듣고 그들의 성적 발표를 보고는 돌아가는 자리가 된 것이다.
원래 대사습은 판소리 축제였었다. 김세종, 이날치, 정창업 등도 대사습을 통하여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고 제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한다. 판소리 서편제의 대가인 장창업도 전주 대사습에 와서 실수한 에피소드가 있다. 춘향가의 초압인 이도령 광한루 구경차 나가는 대목에서 "방자 분부 듣고 나귀안장을 짓는다. 나귀안장 지을적에 나귀 등에 솔질솰솰"까지 가다가 다음 대목을 긴장한 까닭에 그만 잊어버렸다. 그래서 '나귀등에 솔질솰솰'만을 소리높여 여러 차례부르니 좌중이 '저 혹독한 솔질에 그 나귀는 필경 죽고 말테니 차마 볼 수가 없다'고 정창업이 퇴장 당했다 한다.
어떻든 경연대회의 형식을 띠면서 새로 진행한 이 대회를 통하여 오정숙 명창을 비롯하여 이번 은희진 명창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명창의 등용문이 된 점은 뜻깊은 일이다. 그런데 다른 종못들이 대사습의 경연 종목으로 끼어들면서 판소리만의 마당이 좀 볼품없어 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전주대사습의 진행
전주대사습놀이의 진행을 MBC에서 맡으면서 대사습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파격적으로 중계를 여덟시간씩 하는 것도 칭송할 만한 일이다. 필자도 전주대사습을 텔레비젼중계를 통해서 보아왔다. 새삼 그 위력이 대단하며, 아마도 이제 전주대사습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국악 보급과 국악교육의 일환으로도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다양하고 기교적이었다. 풍물을 치며 태극무늬를 그릴 때는 가끔씩 지붕에 매달아 놓은 카메라로 위에서 본 모양도 보여주고 가야금 줄 끝의 떨림도 클로즈업 시켜서 보여주었다. 바깥 장면도 보여주어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 점이 좋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텔레비젼의 결정적인 한계는 중요한 장면을 놓친다는데 있다. 정직 보여줘야할 것은 사람들이다. 구경온 노인네들의 박수치는 장면뿐 아니고 어린아이가 우는 장면, 엿장수의 소리들 가지도 보여줘서 이 자리가 체육관 마루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그 뒤쪽 스탠드에서 벌어지는 일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된다. 정양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나는 텔레비젼이라는 것이 이런 좋은 중계를 하고도 끝심이 없어서 칭송받지는 못하는 상자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바깥 사정을 스케치한 화면도 흥미로웠다. 우연인지 연출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노인네를 택하여 몇마디 물어도 보고 쑥대머리도 한가락 실려보냈다 상당히 구성진목 구성을 가져서 북장단이 있었다면 잘 살아날 듯 하였다. 그렇지만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이게 어떤 대목이냐고 물어볼 때는 잠시 김이 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보다도 더 중요한 점을 MBC는 알아야 될 것이다. 이 축제를 위하여 방송국이 일정한 몫을 하는 것이지, 방송국의 사업의 일환으로 대사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말이다. 대체로 대사습이라는 사업을 벌이는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은연 중 나타나는 것은 나만의 걱정거리가 아닐 줄 안다.
놀이와 대화를 한꺼번에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필요할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기왕이면 지금까지 대사습에서 장원한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여 한데 어울어져 놀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듯하다. 오정숙이나 최승희, 은희진이 모두 와서 한 마당을 이룬다면 그런대로 제자리를 찾게 되지 않을까. 한구석에서는 경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무질서한가운데 박동진의 걸쭉한 욕설을 듣기도 하고 또 한구석에서는 술에 취해 자빠져 자는 한마당의 축제가 그립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