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나는 적어도 두 가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환자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병을 진단하고 정확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의학적, 과학적 지식이다. 이러한 사정이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일까? 나는 한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 사회가 앓고 있는 공동체적 아픔 역시 이러한 두 가지가 공존할 때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 어머니의 눈물처럼 자기사회의 현실을 보고 아파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아픔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그 눈물은 곧 냉철한 현실인식의 노력, 과학적인 처방의 확인을 위한 작업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안된다.
김진균교수의 「사회과학파 민족현실」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인식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보이듯이 민족현실에 대한 깊은 애정의 소산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압축되고 정제된 과학적 작업의 소산이기도 하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한국사회과학의 과제라는 주제하에 오늘 우리사회의 과학적 인식을 위한 틀이 되는 한국사회과학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다소 전문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결국 우리의 인식도 이러한 틀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우리와 무관할 수 없는 내용이다. 제2부는 한국사회와 계급이론이라는 제목하에 4편의 논문이 실려있다. 4편의 논문 모두가 우리사회의 현실을 인식하기 위하여 계급론적 시각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우리사회의 주요한 계급으로서 농민층, 하층계급, 노동자계급 등을 검토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사회는 국가와 결합한 내외독점 자본이 노동자 농민 및 도시빈민과 맺는 관계 속에 계급구조화의 주된 축이 있으며 또한 이들 피지배집단들의 현재의 구성형태에 주변부적 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면서도 이러한 피지배집단 가운데 노동자계급이 앞으로의 역사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제3부는 산업사회와 노동자문제라는 제목아래 노동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연구를 수행한 글들로 묶여 있다. 여기에는 노동자의 현장수기분석을 통한 노동자의식과 경험의 연구도 있고 기술진보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노동통제의 복합적 구조에 대한 연구도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가져오는 사회적 차별현상에 대한 연구도 있다.
저자는 우리사회에서 교육이 결코 중립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계급질서의 유지와 비민주적 구조의 재생산에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는 민족통일과 민중운동이란 제목아래 오늘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민족적 과제에 대한 논의로 채워져 있다. 분단극복의 문제, 분단이 사회상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세밀하고도 중요한 연구, 그리고 4.19의 의미와 계승의 문제 등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문화적 전통이 강한 우리의 토양에서 새로운 인식과 과학적인 공동작업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특히 뜨거운 정열과 지역 및 민족현실에 대한 강한 애정을 지닌 자들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피어라 들꽃
楊洙 장편소설
-박재연 옮김-
문학의 힘은 상상력을 통하여 단순한 기록물의 한계를 넘어 사회의 총체적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개연성에 근거하지 못하면 그것은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며 이러한 개연성은 대개 작가의 실질적 경험에 의존했을 때 쉽게 보장된다. 특히나 역사적 국면을 배경으로 했을 때는 작가의 구체적 체험이 중시되게 마련이다. 중국 최고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소설의 하나인 피어라 들꽃(원제는 「청춘의 노래」 : 春之劇이 주는 감동도 그것이 작가 양말의 실제 체험을 근거로 하여 격랑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들꽃같은 여성 임도정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1931년 9.18만주사변부터 1935년 12.9운동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1919년 5.4운동의 반제, 민족해방의 이념을 계승한 북경대학교의 학생혁명운동을 다루고 있다.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고조된 이 운동은 국민당 정부의 매판적 반민중성을 극적으로 노정시켜 결국 범계층적 민중시위를 담보해내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임도정은 스스로의 치열한 투쟁을 통하여 북경 지주의 딸이자 가난한 소작인의 딸이라는 신분상의 모순성을 극복하고 대학생도 아니면서 학생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 그녀는 감상적 지식인인 여영택과의 동거, 조직과 선전에 능한 노가천과의 고백조차 하지 못한 사랑 및 전형적인 혁명가인 이맹유와의 투쟁을 하면서 키워나간 동지적 사랑 통하여 건실한 혁명전사로 성장하게 되며, 변절자 애인과의 비극적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순진한 학구파 왕효연, 북경대 여학생 총책인 열렬한 여류 혁명가 서휘, 일본군관에게 농락당한 후 투철한 혁명가로 변신하는 이회영 둥과의 교제를
통하여 구체적 개인의 삶이 사회적 구조에 의하여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고, 이를 통하여 소시민 의식을 청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당조직과 밀착시킨 혁명사의 한 전환기를 다루면서도 계급의식을 기계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관념론적인 심리와에 침잠하지도 않고 발빠른 진행을 전개하는데, 이러한 점은 우리 나라 소설의 새로운 방향 모색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도 남음이 있다.
혁명과 사랑을 동시에 다루고 있는 작품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 그러하듯, 이 두 가지를 별개의 것으로 전제해 버리는 우리의 상식적 태도에 의미 있는 충격을 준다. 그러나 이 소설의 묘미가 이러한 점에만 근거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역사적 변혁기를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그러한 변혁의 주체로서, 조직적으로 살아간 이들의 삶은 분명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 통시적 삶의 모습이다. 이들의 치열한 삶의 자세는 소시민적 안락에 짖어버리기 쉬운 우리에게 많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분단문제에 관한 인식이 새로워지는 지금, 북한에서 드라마로 방송되어 대단한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이 작품은 점점 심화 되어가는 의식의. 편차를 극복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