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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 | 연재 [문화저널]
[저널이 본다] 유화적 국면에서의 문화운동-문화주의의 극복을 위하여-
이종민 ·본지 편집위원(2003-12-18 15:17:56)


 억압적인 지배구조는 때로 유화적 제스처를 통하여 스스로의 모습을 은폐하려한다. 특히 다수의 저항에 부딪쳤을 때 그것은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개량적 문화정책 등을 표방하게 된다. 1920년대 3.1운동의 거대한 민족적 항거에 접하여 일제가 획책한 기만적 문화정책이나, 80년대 광주의 비극과 정권의 비합법적 탈취과정을 은폐하기 위하여 표방한 유화적 문화정책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7년 6월항쟁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는 현재의 국면도 이러한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6월항쟁의 일차적 의미는 물론 다수 계층의 자발적 항거를 통하여 지배세력의 반동적 음모를 스스로 포기하게 했다는 데 있다. 이를 통하여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개선과 사회의 개방적 분위기를 보장해주는 6.29선언을 얻어낼 수 있었으며, 또 패배주의적 체념에 찢어있던 기층민들도 스스로 역사변혁의 주체임을 자각하여 정치 경제적 질곡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또한 이것은 새로운 문화풍토 조성을 위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준다. 다소 자유주의적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적 모순의 해결에 문학적 실천을 통하여 기여하겠다는 의지로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발전적 변신을 꾀한 것이나, 창비, 문지, 실천문학의 복간 및 금서해금을 통한 출판문화의 활성화, 한겨례신문의 창간과 제도권 언론들의 자기혁신의 움직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언론의 민주화, 지방사회연구회와 호남사회연구회 등 자발적인 지역학술단체들의 적극적인 활동 및 이제까지 음성적, 자기수련적 차원에 만족해하던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한 학술단체들이 민족적 민중적 학문을 제창하며 기존학계에 토론적 도전을 시도한 공개 연합심포지옴 둥에서 확인되는 학술운동의 활성화 등도, 일차적으로는 자체 역량의 성숙과 연관되겠지만, 6월항쟁을 통한 유화적 국면의 전개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제3세대 음악제 구로동 연가 등 민중적 삶을 소재로한 노래패 풍물꽤들의 공연, 서구답습적 자세를 극복하고 참다운 민족 민중미술의 개발에 힘써온 민족미술협의회 등을 중심으로한 젊은 화가들의 적극적인 활동, 혹은 서구지향성이나 복고주의적 편향성을 극복하고 서양연극의 닫힌 양식 과 마당극의 열린 양식 을 복합적으로 수용하려는 연극인들의 자신감에 찬 자세, 단순한 통속 오락물이라는 불명예를 떨쳐버리고 참된 민족 민중영화를 시도하는 영화인들의 자기반성적 태도, 분단, 민중의식을

적극적으로 담아내려는 만화계의 움직임 등, 문화계 전반에 걸친 건전하고 성숙된 풍토 조성의 조짐도, 물론 그 출발은 80년 참담한 패배를 겪고 난 후 그간의 시행착오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6월항쟁 이후 구체화된 유화적 문화정책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의 조성은 분명 바람직스러운 것이다. 이는 6.29선언이 그러하듯 지배세력들의 선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간의 꾸준한 노력과 성실한 자기 반성을 통하여 얻어낸 것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러한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변화나 구조적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정책에 힘입어 언론이 활성화되는 등 전반적인 문화풍토가 다소 개선되는 듯 하였지만, 그 궁극적인 모순인 식민지적 상황이 전혀 극복되지 못했던 점, 오히려 그 모순구조를 심화하고 장기화하는데 기
여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문화주의란 궁극적인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동반하지 못하는 이러한 문화적 풍토의 변화에 만족해버리는 개량적 태도, 또 문화가 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구조와 무관한 것이며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 기능주의적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우러나는 문화는 그 구체적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게 마련이다. 정치나 경제가 질곡의 상황에 빠졌으니 문화만이라도 잘 가꾸어 보자라는 태도는 이러한 문화주의적 태도의 전형적인 것으로서 문화의 근본적 속성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데 기인한다. 왜곡된 정치 경제적 구조 속에서는 건강한 문화가 조성될 수 없다. 그래서 참다운 문화운동은 항상 건강한 삶의 구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회 구조적인 개선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주의는 위기에 몰린 지배세력들이 자신들의 허약해진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기 위한 문화정책을 펼 때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소시민적 문화인 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문화는 분명 싸움만을 위한 단순한 무기는 아니다. 그러나 삶이 바닥부터 왜곡된 상황에선 이의 개선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 아니 쓰일 수 있어야 한다. 문화는 분명 은근하고 부드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일정한 방향성을 띠고 지속적으로 작용할 때에는 거대한 바위를 뚫어내는 물의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문화의 일차적 의미는 백두산 천지의 깊고 심오한 물이나 지리산 계곡의 맑은 물처럼 그 즉각적인 효용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특히 가뭄이나 화재와 같은 재앙이 닥쳤을 때 무한한·효용성을 발휘하는 물처럼 문화도 뒤틀린 삶의 구조의 개선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또 다스려지지 않은 물이 그러하듯 방향을 잘못 잡은 문화는 만성적인 재앙의 원인이 된다. 문화를 구체적인 삶이나 그 삶을 규정하는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와는 무관한 고고한 어떤 것으로 여기는 태도야말로 위기에 몰린 지배세력이 유화적 문화정책을 펼 때 항상 겨냥하는 표적이다. 이러한 문화정책이 그들의 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사탕발림으로 펼쳐질 때 문화는 이렇게 확보된 공간을 바탕으로 그 구조적인 모순의 해결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 구조에 관한 과학적 인식들의 확보가 절실하다. 이를 근거로 해서만 운동에 있어 긴요한 정확한 전망을 획득할 수 있고 이의 실현을 위한 지속적 노력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들과 전망이 없으면 작금의 기회주의적인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선정적, 폭로주의적 고발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5공화국의 비리가 어떤 한 개인의 정신파탄적인 성격에 기인하고 있는 듯 요란을 떨고 있는 이러한 자세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은폐내지는호도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과거의 잘못에 관한 역사적 단죄는 역사발전에 있어 필수적인 단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정적 고발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과학적 점검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6월항쟁의 의미는 그것이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보다는 그러한 변화를 위한 분위기의 조성 및 그것을 위한 노력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어정쩡한 문화주의적 태도가 극복되지 못하면 어렵게 얻어낸 오늘의 유화국면도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데 기여하게 될 뿔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이 처한 가장 절실한 문제라 할 수 있는 외세 및 분단에 관한 문제제기는 그것이 아무리 거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해도 시기상조론이나 상황론을 들어 매도될 수 없는 일이다. 고도의 전술전략을 동반한 문화적 공세가 날로 교묘해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해결에 문화적 실천을 통하여 기여하겠다는 다짐은 그것에 관한 과학적, 실천적 인식을 바탕으로하여 개량적인 문화주의적 태도가 극복되었을 때에만 그 실효성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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