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나는 서울에 가서 오페라 투란토트를 보고 왔다는 사람에게서 그 오폐라에 대해 전해들었다는 친구를 만녔다. 그는 오페라를 보고 온 사람이 스칼라의 솜씨에 완전히 매료되어 이번 공연이 진짜 오페라가 무엇인가를 실제로 보여주는 연주였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열광적인 관객이 사실은 그의 학교에 같이 근무하는 음악선생님이라 하였다.
한양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찾아가서 또 비싼 입장료까지 물어가며 구경해야 했지만 이번 나들이가 그 음악선생님께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입을 모았다.
우리는 그와 같은 열정과 귀-두 귀-를 가진 사람이 방방곡곡에 적지 않을테니까 기왕에 몇몇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는 우리의 서양음악이 아마 집중적인 투자를 한다면 오페라 분야에서도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도 하여 보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야기가 결국 단 한번의 오페라 공연을 위해 이십억이라는 돈을 쏟아 붓는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라는 물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기에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이 오페라의 공연을 위해 쓰인 돈에 대해서는 신문의 비명란에서도 다루고 있고 또,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라고 물을 때 그 부당함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는 것이니 여기서 내가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관람료에 대해서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질문은 관람료가 비싸다는 점을 들먹이려는 것이 아니다. 관람료와 공연을 위해 쓰인 돈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니 이번 공연과 같은 경우에 수지를 맞추기 위해 관람료가 비싸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나의 질문은 비싼 관람료를 내고 이런 공연을 구경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잠깐 말머리를 돌려 예술작품의 상품화에 대한 논의를 되살려보자. 서구에서는 브르조아 계급의 등장과 자본주의의 대두로 말미암아 구시대의 보호자를 잃어버린 예술가들이 신흥계급의 구미에 맞는 작품을 시장에 내놓아 직접 생계를 꾸려가야만 했다는 것이 작품의 상품화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한국에서의 작품의 상품화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는 내부의 변화와 서구와 접촉을 연관지어 설명해야 할 문제이지만, 우선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예술작품의 상품화가 시작되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상품화는 작품의 가치를 수량화하여 액수로 표시할 수 있게 만들고, 따라서 가격이 높아야만 좋은 작품으로 인정하는 풍조를 낳는다. 이 풍조가 기술의 발달에 따라 무한정 복
제가 가능한 분야에서는, 예를 들어 소설이나 영화의 경우에는 많이 팔리거나 관객이 많을 때 좋은 작품으로 인정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물론 읽히지 않는 소설이나 구경꾼없는 영화는 제아무리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득담고 있다할지라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종이꽃과 같다.
반면에 베스트셀러나 극장마다 만장의 성황을 이룬 영화가 훌륭한 작품인 경우도 극히 드물다. 시험삼아 작년이나 제작년의 베스트셀러를 한번 펼쳐 읽어보면 도대체 많이 팔린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이것적것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잡다한 원인을 끌어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비교적 공연기회가 제한을 받는 연극이나 오페라의 경우에는 비싼 입장료를 내는 관객이 많을 때 호평을 받을 기회가 커질 것이다.
싼 작품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싼 작품과 구별된다. 복제에 의한 가격의 하향조정이 가능한 영화등이 소위 향락적인 저급문화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없이 여러사람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다시 없는 잇점이다. 복제가 불가능한 부분도 제작이나 전시 또는 공연의 방법을 바꾸어 싼 작품을 생산할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값싼 저급작품과 구별되는 싼 작품의 땅이있다고 누구나 쉽게 보고, 듣고, 몸으로 느낄 수 있지만 작품의 내적 가치에서는 오히려 비싼 작품을 능가하는 싼 작품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문화저널」이 곁만 화려한 비싼 문화가 아니라 내적 가치를 풍부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싼, 그래서 다수 대중이 같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