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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9 | 칼럼·시평 [문화칼럼]
<저널칼럼>누가 存在함을 부정할 수 있으라
安 鴻 爆 ․전주문화방송편성부국장(2003-12-18 15:47:13)


 먼지 낀 책장에서 뽑아 본 어떤 책 어디쯤에선가 이런 문구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創造 되지도 않았고 存在할 하등의 이유도 없으며 다른 存在와 아무런 연결도 없는存在는 영원히 남아도는存在일 뿐이다. 실존철학의 거두 샤르트르는 이러한 存在를 즉 自存在 즉 善意讓的 存在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과연 어떤 事物에 이러한存在가있단 말인가? 더우기 宗敎的관점으로보면 이러한 存在란 생각할수도 없을 것이다. 거창하게도 감히 샤르트르를 논하고 宗敎가 어떻고 주전 없는 얘기라서 송구스런 마음이지만 다만 그런 假說 위에서 存在라는 것을 재조명해 보고자 할 따름이다. 충격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체험수기 「南部車」에서 어린애를 데리고 있는 女子빨치산이 토벌군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하여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입을 막아 위기를 모면하고 보니 애기가 죽어 있더라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무인도에 낙오된 패잔 일본병사들은 3년의 세월을 버티면서 병약한 順으로 동료를 실량 삼아 목숨을 이어갔다는 기록도 있다. 島山 安昌浩先生은 무덤속에서나마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을 볼 수 있도록 무덤의 비석에 두 눈을 새겨달라고 유언을 했다. 불후의 명작을 후세에 남긴 「고갱」은 집없는 유량의 세월을 보내다가 외로운 생애를 즐겁게 마쳤다고 전한다. 이 모든 사례의 주체들은 과연 어떤 存在들이란 말인가? 패잔 일본병, 여자 빨치산, 도산 안창호선생, 그리고 화가 고갱, 혹은 神은 죽었다고 흥분하는 善良한 사람들……, 事實이 말해 주고 歷史가 기록해 주며 심지어 신을 모독하는 극한의 상황을 통해서라도 이들의 存在는 대개가 절대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형성 됐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인 存在라고 해서 굳이 생물학적인 存在로만 고집할 수 있을 것인가? 神의 섭리로 설명하는宇寅의존재는 무엇이며 人間은 또 무엇일까? 바위에도 生命이 있고 한포기 풀에도 의미가 있다고 하는 종교적인 해석은 어떻게 볼 것인가? 따라서 歷史 ·宗敎·哲學심지어 생물학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모든存在의 실체는 절대 의식적이며 필연이라는 결론적인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에서 必要善뿐만 아니라 必要惡도 存在할 수 있게 된다. 正義가 있으면 까義도 있기 마련인 것이 存在의 美學이라고나 할까? 우주의 생성원리를 음양오행에서 찾는 동양철학이론으로 보아서도 存在의 실체는 상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歷史의 정통성도 宗敎의 우세도 善惡、의 한계도 심지어 물의 흐름과 바위덩어리의 노임새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문제는 주체에 대한 개체의 사고형태가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다만 창조적이고 긍정적일 경우는 문제가 훨씬 쉬어진다는 차이뿐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긍정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눈을 돌려보자 어떤 교육학자로부터 들은 얘기인즉 교사의 가장 중요한 태도는 학생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라는 것이다. 처음 보았는데도 공부도 잘하고 똑똑할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88올림픽도 꼭 성공할 것이라고 4천만 국민이 한결같이 생각해 주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교육학자는 자신 있게 얘기했다. 이러한 논리는 政治에서도 歷史에서도 文化에서도 科學에서도 인생살이에서까지도 예외가 아니리라. 그렇다면 더우기 存在에 대한 의미라고 할까. 實體에 대하여 강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存在의 확인 행위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확인에 지나지 않는다. 광주학생사건은 정의로운 기백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4·19의거는 민주주의를 향한 학생들의 열화같은 의지를 확인한 것이었으며 끊임없는 노사분규는 근로자의 강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시기능을 통해 언론의 존재를 확인하고 여론형성을 통하여 국민의 권리를 확인하며 권력의 남용을 통하여 오히려 권력의 존재를 확인시키게 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역사도 철학도 정치도 문화도 결국은 그 과정을 통하여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존재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생명력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당성과 영원성을 지니고 있어야 함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타당성과 객관성 그리고 영원성과 생명력간에는 불가분의 함수관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存在이던 반드시 영원한 生命力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영원이라는 개념속에는 非可視的이긴 하지만 끈질긴 혼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文化의 存在論的 永遠性을 통하여 우리는 민족의 혼을 느낄 수 있고 文化民族의 긍지를 느낄 수 있지 않았던가 우리는 여기에 이르러 無意識과 意識에 관계없이 存在란 모두 신성하다는 宗數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판소리를 예로 들어보자. 판소리라는 存在는 결코 창조적이고 의식적인 동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바닥을 기는 이른바 기층민중의 무의식적인 행위와 충동적 동기에 의하여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판소리는 우리민족의 혼을 담은 민족의 긍지로까지 격상된 것이다.
판소리가 있는 한 우리민족은 영원하다고까지 그 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한 셈이다. 어찌 이러한 현상이 문화에서 뿐이랴. 극단적으로 이론을 전개한다면 왕왕民生까지 불편하게 하는 극한적 학생운동이며 경우에 따라 理解를 곤란케하는 생야활동 그리고 종말을 보는 듯한 노사분규 등 이러한 문제들도 그 속에 확실한 生命力과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혼만 깃 들어 있다면 굳이 염려할 사건들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만 存在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다수가 지향하고 다수가 바라는 그러한 존재로 발전한다는 전제 위에서 말이다. 사람은 본래 善을 알고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택했을 것이다. 자기의 存在를 확인하자. 그리고 그 生命力을 가늠해 보자. 혼이 깃들어 있는가도 확인해 보자. 그리고 나서 확인한 存在라면 뉘라서 그 存在함을 否定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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