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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3 | 칼럼·시평 [문화시평]
<시평>원초적 인간성의 회복
-오장군의 발톱을 보고-
김정수(2003-12-24 12:09:12)


 회적劇이 神과 인간의 문제를, 근대극이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다뤘으며 현대극은 상황과 인간의 문제가 가장 큰 주제라고 말한다. 그 만큼 복잡하게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산업화와 더불어 첨예하게 가속되어온 집단과 계층간의 모순구조가 수많은 劇的 상황들을 창출해내고 있어 현대를 사는 현대인과 현대 연극인들에겐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더욱이 급변하는 정치적, 문화적 여건 속에서 힘겨운 삶을 지탱해 나온 우리에게는 상황이 던지는 절대절명의 목소리가 제법 큰 중압감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월 11일 부터 극단「황토」가 무대에 올린 朴祚烈作 박병도 演出의「오장군의 발톱」은 그러한 우리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개인으로서는 저항할 엄두를 낼 수 없는 거대한 집단의, 어찌 보면 숙명적이라 체념해야 할 잔혹하고 조직적인 횡포로부터 한낱 휴지조각처럼 갈갈이 찢어발겨지는 한 인간의 순수와 존엄을 통해 이러한 것들이 맹세코 보호되어야 한다는 믿음 자체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공허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가를 상징적인 수법으로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70년대에 이 작품을 쓴 劇作家 朴祚烈씨는 「무지개 가족」 「꽃동네 새동네」등의 우리에게 친밀한 방송극을 쓰기도 했으며 「토끼와 포수」 「목이긴 두 사람의 대화」동의 희곡 작품에서도 보여주듯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주제를 우화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 접근, 날카롭게 부조시키는, 표현주의적 수법을 적절히 가미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오장군의 발톱」에서의 주인공「오장군」은 몹시 가난한 소작인의 외아들로 태어나 홀어미를 모시며 오로지 자연과소(이 작품에서는 사랑도 할 줄 안다)를 벗 삼아 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순박하고 우직한 농촌의 총각이다. 그는 잘못 배달된 징집영장을 받고 전쟁중인 군에 입대하여 폭력과 살상이 주임무인 軍이라는 특수조직에 적용하지 못하며 낙오만을 거듭하다가 그의 천진한 우둔함에 착안을 한 軍의지휘관에 의해 역정보 공작에 투입, 계획적으로 적군의 포로가 되지만 그의 순진함을 고도로 세련된 정보원의 연기로 판단한 적군에 의해 사형 당하고 만다.
바로 이 「오장군」이 겪는 사회, 잘 짜여진 조직과 체계적인 명령계통, 폭력을 기초로 하는 특수집단인 軍이 이 작품에서는 풍자의 대상이며 「오장군」의 비극적인 희생을 통해서 작가는 우리가 쉽게 보아 넘기는 원초적인 인간성의 회복을 부르짖는다.
또한 「오장군」은 물질문명이나 현대가 이야기하는 문화적 삶에 오염되지 않은 가장 자연에 가까운 인간의 전형으로서 실리와 집단성을 추구하는 사회조직과 극명한 대비를 보여 주고있으며 趙海一의 소껄 「멘드롱 따또」에서 「멘드롱 따또」나 게오르규의 소설 「25時」에서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와 흡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극단 「황토」는 이 「오장군의 발톱」을 일사 불란한 팀웍과 고른 연기로 안정감 있게 표현해 내면서 오랫동안 전북연극의 대들보 역할을 수행해 온 축적된 역량을 과시해 보였다. 좁은 공간을 최대로 활용한 짧고 간결한 動線과 정확하고 속도감 있는 연기, 빈틈없는 조명과 음향의 호흡은 그 동안의 연습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황토」의 이번 공연은 그 주제의 완성도 면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남겼다. 첫째로는 주인공인 「오장군」과 그의 약혼녀 「꽃분이」의 성격 연출 문제다.
「오장군」이 순진하고 우직한 사내임에는 틀림없으나 바보나 천지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오장군」의 순수가 대부분 우리네의 순수를 대표해야 만이「오장군」의 비극이 우리에게 비극으로 자리잡을 터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반부의 「오장군」은 엉뚱하게도 「칠뜨기」처럼 행세했고 軍에서는 순진무구하다기 보다 는 비굴해진 모습(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닌)까지 보여줌으로써 주제의식을 강하게 부각시켜야될 인물이 무거운 주제를 지나치게 희화화하고 극중 비극을 본인에 국한시켜 버리는 우를 범했다. 「꽃분이」 역시 지나치게 가벼운 인물로 전락시켜 사려 깊은 동양적 여인의 행동, 어떤 면에서는 성스럽고 숭고했어야 할 씨받이 장면 등이 타락한 여자의 역겨운 교태로 느끼게 한 것은 작품에 손상이 가는 바가 컸다. 둘째로는 개개인의 연기력 문제를 벗어난 전체의 연기조차 문체다. 특히「우체부」나 「군 고위 장성」동에서 간혹 엿보이는 자기 역 위주의 연기, 보기 거북스러운 오버액션 등은 관객으로 하여금 극 흐름을 원어 나가는데 장애를 주었을 뿐 아니라 주제를 위한 중요한 복선으로 착각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전반적으로 연습시작부터 집중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작품분석 과정의 미흡과 독자적인 인물소화를 지나치게 연출지시에 의존하는 경향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처럼 보였다.
또 하나는 공연장의 문제다. 물론 원작 자체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원작의 주제와 내용을 충분히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극장 이상의 무대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기 때
문이다. 연극은 전적으로 무대에 의존하는 공연 예술이기에 공연장의 규모나 무대의 구성이 어느 정도 그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오장군의 발톱」 무대는 13인의 배우가 서기엔 너무 비좁고, 또한 표현 예술에서 중요한 여백미가 없음으로 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불안감을 주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열악한 연극 공연 현실을 감안할 때 전북 연극 전체가 안아야 될 문제라고 생각된다.
17명의 관객을 두고도 13명의 배우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연기를 하는 열성을 지켜보며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원초적 인간성의 회복 내일을 향해 달리는 「황토」의 앞날은 늘 발전적이라 생각하며 그들의 다음 공연을 기대한다.
〈연극인 ·「우리동네」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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