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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3 | 연재 [문화저널]
백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2
윤덕향(2003-12-24 12:10:38)


미륵사지 석탑과 석등
백제의 문화, 특히 불교미술을 말할 때마다 예외 없이 거론되는 유적으로 미륵사지가 있다. 미륵사지에 대하여서는 널리 인식이 되어있고 또 이곳저곳에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또다시 미륵사지의 몇몇 유물에 대한 설명과 개관을 시도하려고 하는 이유는 백제의 문화, 특히 전북지방에서의 백제문화를 말하면서 미륵사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빈번하게 얘기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유적이 지닌 가치가 크고 백제문화에서의 위치가 넓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륵사지는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사지의 북쪽으로는 미륵산이 자리하고 있다. 1980년부터 이 사지의 발굴조사가 실시되고 있으며 10년째가 되는1989년에 발굴조사가 완료될 예정이다. 또 최근에 발표된 바에 따르면 사지에 대한 정화작업과 더불어 동탑의 복원작업이 계획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부여박물관에 가면 박물관 앞의 잔디밭에 있는 석재중에 미륵사지에서 수습된 유물이 적지 않게『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들 중에는 石燈部材가 적지 않으며 앞으로 미륵사지에 대한 발굴작업에서 출토된 것들과 종합할 때 백제의 석동양식을 구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여기에서는 복원이 추진된다는 동탑에 대한 것을 같은 형태로 추정되고 있는 서탑을 참고로 살펴보고 미륵사지의 석등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미륵사지의 석탑은〈동국여지승람〉에 동양에서 제일 크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석탑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또 그 시가도 약간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석탑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한반도에 불교를 전래해준 중국의 경우 탑은 주로 목탑과 전탑이며 삼국시대에 처음 한반도에 전래된 탑도 목탑과 전탑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 같은 탑을 돌로 만든다는 발상이 바로 미륵사지의 석탑을 조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탑은 목탑의 양식에 비교적 가까운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미륵사지의 석탑을 대할 때 다른 탑에 비하여 크다는 느낌과 더불어 받게 되는 일반적인 느낌은 탑이 무게가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 같은 느낌은 단지 규모가 큰 것에서 연유되는 것만은 아니다. 또 다른 느낌으로는 다른 탑에 비하여 어딘가 다르며 보편적이 아니라는 느낌일 것인데 그러면서도 그리 큰 거부감이나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같은 느낌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우선 거부감이나 이질감이 없는 것은 이 탑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일반 기와집의 양식에 근사하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측 목조 건물의 모방품이라는 점 때문에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이다. 이 탑이 목조건물을 모방한 것이라는 점은 여러 곳에서 파악될 수 잇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이 탑에는 다른 탑과는 달리 탑 내부로 들어가는 문과 그 문에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는 것이다. 문이 있어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탑은 몇 몇 개가 있으나 실제로 성인 남자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이 미륵사지의 석탑이 유일한 것이다. 또 탑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의 경우 아래쪽이 넓고 위가 좁은 형태로 되어있는데 이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목조기둥의 앤타시스수법을 표현한 것이다. 앤타시스수법은 수직기둥의 경우 멀리서 보았을 때 아래쪽이 실제보다 가늘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탑의 기둥에 표현되어 있음은 목조건물의 기둥수법을 비교적 충실히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또 그 기둥을 받고 있는 주초돌이 탑의 기단석과 독립되어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일반적인 석탑의 경우 기단석의 윗면 뚜껑돌이 넓게 자리하고 그 넓게 자리한 뚜껑돌 위에 탑의 기둥과 몸체를 바로 올려놓고 있는데 이 탑의 경우는 기단돌은 주초돌의 앞쪽에 마련되어 있으며 주초돌은 기단돌의 안쪽 흙바닥위에 놓여있다. 이것은 일반 기와집의 경우 기단의 안쪽에 주초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는 것과 똑같은 양상이다. 이외에도 기단자체가 탑의 규모에 비하여 낮은 것이나 지붕선의 표현이 실제 기와지룡의 처마선과 같다는 점 등이 목조건물을 모방한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석등 중 많은것이 부여 박물관의 뜰에 있으며 발굴작업을 통하여 출토된 것이 사지내에 남아있다. 부여박물관과 사지내에 남아있는 것을 종합할 때 미륵사지에는 3곳에 있는 탑의 북쪽, 즉 금당과 탑과의 사이 중간지점에 1기씩의 석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등의 부재는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석등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더구나 그 형태를 복원할 수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랜 것에 속한다.
석등은 불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그 구조는 불을 밝히는 것이 핵심이 되는 셈이나 본디 집안을 밝히는 조명도구가 집밖으로 옮겨지면서 의식적인 속성이 가미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조명이라는 실제적인 기능외에 불법(佛法)을 밝힌다는 의미를 겸하게 됨으로서 장엄함을 더하게 된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명이라는 속성 외에 불법이라는 의미가 강조되고 화엄경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體을신앙하는, 또는 등을 밝힘으로서 불법을 얻는다는 소박한 신앙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 전해진 등의 초기 양상은 분명하지 않으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석등으로의 변환이 이루어진 분명한 예는 이곳 미륵사지에서 볼 수가 있다. 미륵사지의 석등은 기본적으로 8각을 이루고 있다. 측 8각의 하대석(아래받침돌)이 있고 그 중앙에 홈이 둥굴게 파여 있어 그 홈에 긴 8각의 기둥이 꽂히게 된다. 이 8각 기둥의 위에는 하대석과 거의 크기가 같은 상대석(윗받첨돌)이 역시 8각을 이루며 그 중앙에 홈이 있어 기둥이 꽂히도록 되어있다. 상대석의 위에는 불을 밝히는 등이 놓이게 되는 火舍石이 역시 8각을 이루고 있으며 화사석의 위로는 8각 지붕이 자리하고 있다. 하대석과 상대석에는 각각 연꽃이 陽刻되어있는데 하대석의 연꽃은 땅 쪽으로, 상대석의 것은 하늘쪽으로 치켜진 형태를 하고 있어 伏蓮과 仰蓮이라고 부른다. 미륵사지 석등의 이 같은 양식은 그 후 한반도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고정되다 시피하며 비슷한 예를 사찰에서 흔히 볼 수가 있다. 다만 하대석과 상대석을 잇는 기둥의 형태에서 얼마간의 변화가 있을 뿔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은 거의 석등의 원칙처럼 계속되는 것이다. 미륵사지 석등은 우선 양각된 연화문의 양식이 각기 다른 점에서 주목된다. 즉 東院의 석등과 中院지역의 석등에 새겨진 연꽃의 형태가 각기 다르며 西院지역에서 출토된 것과도 다르다. 이것은 이들 연꽃의 형태가 모두백제의 전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시기적인 차이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
다. 또 비록 지금은 남아있지 않으나 화사석에 남아있는 흔적에 의하여 추정되는 문의 존재는 실제적인 기능에의 배려로 여겨진다. 즉 8각 화사석의 8면중 4변에는 네모난 창이 있으며 그 창의 바깥쪽 부분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화사석의 안쪽 윗면과 아래쪽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어 이 석등이 불을 밝히는 실제적인 기능에 사용되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미륵사지의 여러 유물중 위의 2가지 유물, 즉 석탑과 석동의 예에서 약간의 결론을 끌어낼 수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석탑과 석등이라는 것의 창안을 이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측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목탑과 전탑이라는 것을 발전시켜 주변지역에 풍부한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석탑을 만든다는 발상은 전래된 문화에의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자체적인 발전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은 미륵사지에 있는 3군데의 탑 중 가운데 있는 탑이 목탑이라는 점에서 목탑의 존재를 몰랐거나 목탑을 만들 재주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해진 목탑을 알고 있으면서 이를 새롭게 변용 하여 석탑을 만든 것은 백제인의 문화 창조력의 발로인 것이다. 이점은
자료가 빈약하여 분명하지 않으나 석풍의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족 현존하는 자료 중 비교적 빠른 미륵사지 석등의 양식이 이후의 석등양식의 始源的인 형태라는 점에서 이도 또한 백제문화의 창조적 속성으로 추정하여 큰 잘못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창의력은 문화의 수용과 외래문물을 자체내에서 소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며 그 같은 문화 포용력은 황룡사의 9충목탑을 만든 백제사람 아비지의 예에서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문화의 다양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측 탑의 경우 목탑과 석탑이라는 재료상의 차이가 있는 탑의 배치를 하고 있다는 정은 획일적인 문물의 배치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점은 석등의 경우 더욱 분명하다. 측 석등 하대석과 상대석의 연꽃모양이 서로 다른 점은 시간적인 차이에 의한 것이라거나 획일적인 문화의 소산이 아니고 다양한 문화에 의한 것임을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미륵사지의 석탑과 석등에서 추론되는 이 같은 백제문화의 두 가지 속성, 창의성과 다양성은 앞으로 살펴볼 유물 유적에서도 파악되는 것이며 미륵사지의 석탑과 석등에서 뚜렷히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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