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89.4 | 연재 [문화저널]
백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3
윤덕향·전북대 교수 고고인류학(2004-01-27 10:35:09)


* 나주 반남면 고분군
1980년대에 들어서서 한일 양국의 고대문화를 둘러싼 논쟁은 87년과 88년에 이르러 후지노끼고분의 발굴을 중심으로 첨예화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미처 그 발굴조사가 완료되기도 전에 내시경(內視鐵)에 의해 알려진 유물을 둘러싸고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에 틀림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또 이 같은 결론을 매스 미디아에서 특집의 형태로 취급함으로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은 그들의 고대문화, 더 나아가서 그 지배계층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라는 점을 숨기기 위하여 후지노끼 고분의 발굴을 의도적으로 늦추고 있다고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후지노끼 고분을 둘러싼 논쟁은 그 직전에 있었던 소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문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전라도지방이 백제문화에서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나주 반남면 일대의 고분 중 2개를 살펴보겠다. 나주지방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발달되어있는 충적평야지대로 이들을 배경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을 l,000여기에 이르는 고인돌에서 알 수 가 있다. 이 나주평야 중 반남면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낮은 구릉에는 대형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고분들은 행정지명에 따라서 대안리 고분군, 신촌리 고분군, 덕산리 고분으로 나뉘며 각각 사적 76, 77, 78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하여 1917년~1918년, 1939년 2차에 걸쳐 이루어져 1271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이 고분 중 신촌리 6호분은 1939년에 조사되었는데 전방후원분으로 알려져 있다. 족 앞쪽의 평면이 사각형을 이루며 뒷쪽의 평면이 원형을 이루는 무덤형태를 보이고 있다. 발굴조사 당시의 실측도에 의하면 남북으로 긴 이 무덤의 남북길이는 30여 미터이고 높이6미터라고 한다. 이 무덤을 최근에 다시 실측조사 한 바에 따르면 전체 길이 4215미터, 전방부(前方部) 폭 2523미터, 후원부(後圓部) 폭21.63미터, 높이 1.1~7.1미터에 이른다. 발굴조사는 먼저 후원부를 제토하였는데 아무런 유구(遺構)나유물(遺物)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에 전방부를 제토하자 5개의 독널(毒格)이 조사되었다. 5개의 독널 중 상태가 양호한 것에 의하면 두개의 대형 독을 맞붙여서 널을 만들었는데 길이가259 미터이며 큰 독의 아가리는 직경 122미터에 달한다. 이 독널 안에는 유리구슬 약간과 청동고리, 그리고 철기들과 더불어 토기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이 신촌리 9호분이다. 신촌리 9호분에 대한조사는 1917년에 실시되었는데 이 고분은 평면형태가 모를 죽인 사각형으로 크기는 9.2×9.6미터이다. 높이는 5.5미터 내외였으며 127l의 독널이 조사되었다. 이 고분에서 출토된 독널은 그 전체 길이가 각각2미터이상의 크기이며 역시 2개의 독을 맞불여서 만든 것으로 그중 큰 독의 아가리 직경은 1미터내외의 크기를 보인다. 이 독널 들에는 각종의 유물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그 중 비교적 유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주목되는 을(Z)호 널에서 출토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독널의 내부 주인공의 머리부분에서는 금동제의 관(冠)이 출토되었으며 폼의 왼쪽에는 긴 칼과 창, 화살이 놓여있었다. 또 목과 팔부위에는 구슬과 팔찌 등의 장신구가 있었으며 발치에는 금동제 신발과 구슬이 있었다. 이 독널에서 출토된 구슬은 감색유리구슬 750개롤 비롯하여 수정, 마뇌 등 1300여점에 이른다.
위에서 살펴본 나주지방의 독널무덤 2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주목되는데 크게 2가지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신촌리 6호분의 평면형태와 관련하여 전방후원분에 관한 것이다. 두번째로는 신촌리 9호 을호 널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전방후원분이라는 무덤은 그 평면형태가 양쪽이 사각형이고 뒷쪽이 원형을 이룬다는 점과 그 크기가 이미 말한바와 같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만 주목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방후원분이 고대 일본에 있어서 천황(天皇)의 무덤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韓¥島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성립될 당시 고대 한일간의 문화적 교류는 비교적 활발했었으며 이점은 당시의 여러가지 한반도계 유물이 일본에서 출토되는 점에서 분명하다. 또 최근 논쟁이 이었던 후지노끼 고분의 출토유물에서 한반도의 남부지역으로부터 문화적 영향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문화는 한반도로부터 전혜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로 남는 것은 일본의 천황무덤인 전방후원분이 일본의 독창적인 무덤이냐 아니면 한반도나 주변지역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측 입장은 다른 모든 문물이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방후원분만은 일본의 독창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천황은 그 무덤으로 일본의 것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일본인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무덤은 보수적인 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소속집단의 무덤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 나라의 일부 학자들은 전방후훤분도 다른 문화요소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이 만약 받아들여진다면 일본의 천황은 소속집단의 무덤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인물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다. 이 주장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그 유력한 근거를 신촌리 6호분에서 찾고 있다. 신촌리 6호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같다는 것은 이를 조사한 일본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일본으로 전래된 것이 아니고 역으로 일본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사랍의 무덤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측 소위 임나부-(任那府)가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있었고 그 임나부의 일본인을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신촌리 6호분을 중심으로 한 정방 후원분의 논쟁은 최근에 들어 한반도의 남부지역, 특히 전남지방의 영산강유역과 경남의 서남부지역에서 전방후 원분으로 추정되는 대형무덤들이 발견 보고됨으로서 다시 한일고대사에서의 논쟁꺼리로 등장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에서 전방후원분을 조사하여 그 무덤의 구조가 한반도의 경우와 같은 독널인가, 또 신촌리 6호에서처럼 후원부에는 유구가 없는가, 그곳에 부장된 유물의 성격이 어떠한가 등이 밝혀져야 될 것이다. 또 근래 남부지방에서 발견보고 된 무덤들이 신촌리 6호식으로 일본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전방후원분이 라는 것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이 일본의 그것보다 앞서는 시기에 만들어졌음도 확인되어야할 것이다. 이 같은 점들이 밝혀지면 우리는 고대 한일관계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의문을 해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본에서 전방후원분이 조사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이는 얼마 전 일본 천황의 장례기간 중 일부 일본인들이 전방후원분의 발굴을 요구했으나 천황의 신성함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서도 분명한 것이다. 다음으로 신촌리 9호 을관에서 출토된 금동판은 금동이라는 점에서 금관과는 얼마간 차이가 있으나 같이 출토된 금동제 신발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금동판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분되는데 내관은 두 장의 금동관을 오려불여서 고깔형태로 만든 것으로 이음부분은 덧씌웠으며 점을 찍어서 인동꽃무늬를 표현하고 있다. 외관은 금동관으로 둥글게 만든 테의 정면과 화우에 풀꽃모양의 장식을 세운 것이다. 이 금동관의 풀꽃무늬는 신라의 금판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형태에 의하여, 또 그와 같이 나온 유물들에 의하여 백제가 전남지방을 정복한 것으로 알려진 369년 이후의 것이다. 따라서 이 금동관은 백제가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 이 지방의 유력한 지배자가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점은 이 지방의 대형무덤이 전형적인 백제의 무덤형인 돌방(石室)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독널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 백제의돌방무텀이 출현하는 것은 6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이며 그 이전에는 독널무덤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가 전남지방을 정치적으로 4세기 중반에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정복되기 이전의 정치적 지배자의 특권을 인정하는 형태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또 정치적으로 정복되었다고 하더라도 문화까지 정복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남지방의 독널과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는 독널은 전북지방에서도 고창, 부안 지방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지역적으로도 전남지방과 인접된 남부 전북지방에서는 전남지방과 비슷한 양상을 보일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이 같은 추론은 전북지방에 전혀 백제문화의 영향이 없었다거나 전북지방이 백제의 문화권내에서 제외되었다는 말하려는 것이다. 문화라는 것이 그 문화의 주체인 사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은 토착문화, 또는 백제문화에 흡수 동화되는 과정 속에서의 토착문화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야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더불어 한일고대사에서의 논쟁이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근거 위에서 펼쳐져야 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전북지역에서의 확인작업이 부단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