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현대미술을 대때 북한의 미술을 알려주는 몇점 안되는 사진도판을 보고 느낀 소감은 사실주의 미술의 발전이 주는 감동이었다. 그들의 사실주의 미술은 인간의 역사에서 사실주의가 자기 삶을 드러내면서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 그 사회를 발전시키려 노력해온 세계 예술사 발전의 결과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북한의 미술은 남한미술의 개념과 형식과는 상당히 다르게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던져주는 충격적인 것은 개인주의적 창작행위를 내세워 예술이 역사와 현실을 소훌히 하거나 괴리된 채 진행해 온 남한미술의 문화 식민지적 흐름에 대한 반성이고, 아직도 자주적 미술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미흡한 자괴감이나 무력감의 표출이었다. 그리고 북한미술이 주는 감명은 우리 민족의 뛰어난 농력을 새삼 일째워 주는 것이었다. 또 그것은 그동안 가리워지고 왜곡 선전된 북한사회와 문화에 대하여 을바른 이해와 인식의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이렇게나마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동안 남한사회에 뿌리내린 변혁운동과 민족미술운동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80년대 이후 발전해온 민족미술이 아직 변혁의 무기로 써나 대중의 요구수준에 미약한 점에 비추어 북한미술의 대중성은 남한미술운동의 한 방향성을 일깨워준다.
해방이후 건셜해낸 북한미술은 철저하게 관객을 위하고 대중을 먼저 생각하며 창출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미술이다. 즉 북한의 미술은 ‘인민대중의 정서에 합당한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는 것이며 당성과 계급성과 인민성을 견지하면서 조선혁명과 인민대중의 정치 문화생활에 이바지하는’문예이론을 기반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미술 중 공예와 건축분야에서는 대중적 삶의 질적 발전을 위한 민족적 생활양식으로의 창조적 노력이 눈에 띄며, 사실적 조각과 회화는 사상교양적 방향성이 두드러진다. 측 분단체제의 산물로서 민주기지건설과 사회주의 개조를 위해 봉사하는 지침 아래 변화발전하여 온 것이다.
그 회화와 조각의 내용은 항일투쟁과 그들의 입장에서 본 6·25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체험들, 일하는 근로대중을 비롯한 함께사는 사람들의 건강한 삶의 모습, 조국땅의 애정을 표출한 풍경화나 화훼도, 그리고 김일성의 생애와 일화에 관한 것 퉁이다. 이런 내용들은 북한에서의 주체사상의 확립과 더불어 대체로 앞의 것에서 후자로 중심이 변화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 현대사회의 변동과 무관하지 않은데, 특히 북한의 현대미술이 개인주의적 창작보다 사회 현실의 반영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북한미술을 을바로 이해하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북한현대사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분단아래 서로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북한의 현대사률 을바로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북한미술에 대한 이해도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민족적 형식으로서 조선화의 발전 북한의 현대미술 가운데 가장 크게 가슴에 와닿은 분야는 역시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민족형식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낸 ‘조선화’로 생각된다. 〈계간미술〉47호 (1989, 가을)의 “북한 미술의 어제와 오늘”에 소개된 김의관의‘남강마을 여성들’은 좋은 사례의 한작품으로 보여진다. 이 작품은 전쟁때 남강마을 여성들의 삶을 형상화한 내용이다. 늦 가을 추수한 혔단을 지고 총을 든 여인과 볏단을 이고 등짐을 지운 소를 끄는 여인들이 강을 건너는 장면을 담았다. 긴장감 넘치는 내용을 간결하고 힘차게 구성하였고, 수묵담채와 채색의 섬세하고 정교하면서 선명하고 맑은 수법은 조선화의 전형적인 특정을 잘 보여준다. 북한미술의 전모를 모르는 상태에다 작품을 실견하지 못하여서 그 작품이 북한 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비중을 셜정할 수 없으나, 사진도판을 통해서 보더라도 새로운 민족형식으로서 사실주의적 조선화의 예술성과 발전적 단면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남강마을 여성들’은 제9차 국가전람회에서 1동상을 받은 작품이며 그 제작시기는 조선화의 툴이 잡히는 1966년이다. 이때 북한미술의 방향성은 ‘우리의 미술을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미술로 발전시키자’로 압축되어 나타난다. 그 내용은 현재 북한미술의 이념적 배경을 이해하는 요체가 되기 때문에 해심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민의 생활감정과 정서에 맞아야 하고 당과 혁명의 이익을 위하여 복무하는 혁명적인 미술로서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을 것.
둘째, 조선화를 강조하는 것은 복고 주의적으로 옛날 것을 그대로 본따는 의미가 아니고 선명하고 간결한 전통적 화법을 연구하여 그것을 현대의 시대적 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시킬 것.
셋째, 인민대중을 위하여 대중들이 보고 누구나 다 좋아하며 보고 또 보아도 더 보고싶어 하는 작품, 혁명위업과 사회주의 건셜을 위하여 몸바쳐싸우는 대중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혁명의 시대에 사는 인민대중과 같이 숨쉬고 그들과 함께 발맞추어 나아가는 그러한 작품을 많이 창작할 것.넷째,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가들이 생동하는 현실속으로 들어가 창작할 것 등이다.북한 현대회화의 민족적 형식은 조선화뿐 아니라 서구미술인 유화, 수채화 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유화나 수채화 역시 조선화와 같은 수법과 양식으로 발전시켜 함께 통합시킨 것이다. 이와같이 북한회화의 고유성과 방향성이 정립되는 것은 북한현대사에서 천리마운동시기(1959-1966)를 거쳐 기술혁신과 문화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기(1966이후)의 출발과 같이 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전화를 복구하고 기초사회주의 단계에 접어 들면서 사회경제 문화 학술연구 등 여러분야에서 모색과 창조의 합일기 내지 그러면서 생산된 집약체를 드러낸 때이다. 그려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통합해내고 민족사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회망이 자리하면서 자기 삶의 자신감을 표현한 회화의 기법은 섬세해지고 밝아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그이후, 즉 주체사상의 확립이후에는 지도의 일관으로 조선화에는 타성적인 면모도 없지 않을 것이다. 조선화의 성립과정이 조선화률 중심으로 볼 때 그 고유성이 정착하기까지에는 창작방법에 대한 논의를 거친다. 먼저 월북한 화가로 미술사 분야에서도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김융줌은 “조선화 표현 형식과 그 취제내용에 대하여”(〈력사과학〉, 1955. 1), “18세기의 선진적 사실주의 화가 단원 김홍도”(〈력사과학〉, 1955. 4) 등을 발표하였다. 조선시대 수묵화의 전통형식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화의 방향이 정리된 셈이다. 이런 경향은(1950년대 중후반 김용준이 그린 ‘춤(1957)이나 정종여의 ‘임민의 전선원호’(1958) 등 수묵담채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상 두 작품은〈계간미술〉47호에 소개됨) 그러던 것이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 수묵화의 봉건성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형식의 창조방향이 제시되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여성의〈초선미술개요〉에 대한 김용준의 비판으로 시작된다. 수묵확의 전통계숭의 입장에서 김용준은 “사실주의 전통의 비속화를 반대하며-이여성져〈조선미술기요〉에 대한 비판(1)” (〈문효냐「산」〉, 1960. 2)과 “회화사 부문에서의 방법론상 오류와 사실주의 전통에 대한 의혹-비판(2)” (〈문화유산〉, 1960. 3)을 발표하였다.한편 전통적 수묵화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으로 채색화 중심의 사실주의적 조선화를 내세운 주장은 60년대초〈조선예술〉에 한상진 이능종 조준오김무삼 등의 논문으로 구체화된다. 이들은 사대부 지배충 문화인 수묵화를 봉건시대의 잔재로서 현대의 인민대중의 사상감정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조선화의 정통을 채색화에 두었다. 그 뿌리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중심으묻 해서 찾는다!
또 그 내용과 형식의 혁명적 이념과 발전 기반은 판화와 만화, 선전확 등 항일투쟁 속에서의 실천적 미술과 진보적 사실주의 미술에 두었다. 이러한 논쟁에서 채색우위의 조선화가 주된 형식으로 정립되는데 이는 1961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재건과 함게 이루어진 것 같다. 이시기는 정치적으로 남로당계열의 사람들과 문학과 옴악 등의 분야에서 상당수의 월북자들이 숙청된 이후이다. 김용준(1904-1967)은 1962년 이후 활동이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앞의 논쟁에서 채색화를 우위에 두어야한다는 주장에 밀렸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북한의 미술발전과 미술사연구의 기초는 김용준에 의하여 마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김용준은 본래 서양화가이다. 그는 서울에서 〈조선미술사대요〉(1948)를 썼다. 그 머릿말에 보면 ‘미술사가가 아닌 사람이지만 남의 나라 미술을 배워온 사람으로서 내나라 미술이 어떤것인지 살펴서 조선미술을 공부해보자는 욕심에서 시작하였다.’고 소박하게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활동지률 옮긴 김용준의 시각은 해방후 민족적인 것을 회복하려는 대중적 열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일단 전통양식의 복권을 가능케 하였고 그것으로 사회적 현실적 요구에 따른 새로운 내용을 담아낸 것이다. 그러면서 퇴폐적 허무주의,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며 새로운 사회건설에 따라 조선화가 정립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대중성을 기반으로 사실주의의 양식적 통일을 이루어 내었다.
맺음말 ’
이상의 북한 현대미술에 대하여 교조적이거나 몰개성적이라거나 혹은 제도미술같다는 비판적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좀더 열린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문화적 통합때까지 유보할 문제라 생각된다. 해방후 지금까지의 남북미술은 분단시대의 산물로서 철저히 단절된 상태에서 각기 다른방향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북한의 미술은 대중성을 핵심으로 하는 사실주의 발전에 전력을 해왔고 현재의 남한미술은 사회운동으로서 현실모순을 표출해내고 변혁의 힘을 고양시키는데 역점이 주어져 있다. 거기에다 남쪽의 미술은 제도권따술과 민족미술운동이 대립양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아직도 제도권미술은 순수주의나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헤어날 줄을모른다. 이처럼 분단이후의 다른 체제 다른정서에서 전개된 남북한 현대미술사의 통합문제는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차이는 현실적으로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나 있어 인정할 수 밖에없다. 이는 따로이 분단된 국토에서 자주적이거나 종속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더라도 남북 민중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사회발전이 이룩된 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간격은 우리가 분단조국을 자주적 민족통일로 이끌어내려는 열망속에서 좁히고 해소해내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남북의 미술은 타분야와 마찬가지로 역사발전의 을바른 방향에서 민족적인 것을 기준으로 명가되고 정리될 것이다. 또 그러면서 수천년을 함께 해 온 우리민족의 큰 동질성은 분단 45년의 작은 이질성을 극복하고 완성된 민족미술사가 자랑스럽게 만들어 질 것이다. 측 오랫동안 이 땅위에 다져온 문화적 동질성의 회복은 현재의 이질성의 격하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주체적 통합의 지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눈을 안으로 돌리면, 남한의 미술운동은 할일도 많고 가야할 길이 험난하다. 그렇지만 해방이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좌절과 작은 승리, 또 더 큰좌절을 겪으면서도 문화적 동질성을향한 열망속에서 민족문화의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막율 수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역사적 대세를 믿으며 쌓은 경험으로 우리의 통일된 민족미술을 창조해내고 발전시키는 데 힘써 노력해야 할 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적 외래문화를 청산하고 그동안 쌓아온 성과를 바탕으로 역사진보의 바른 전망 위에 서야 한다. 또 사회실천으로서 민족미술은 민족형식의 창조적 입장에서 민족내부의 정확한 기반을 둔 진정으로 민중의 것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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