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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6 | 칼럼·시평 [저널초점]
유월의 창조적 계승을 위하여
이종민(2004-01-27 11:28:34)


 ‘쇠항아리’를 하늘로 알고 살아온 이들에게 ‘구륨 한자락없이 맑은하늘’을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충격이요 환회이다. 봉건적 압제의 사슬을 필연인양 살아오던 ‘농투산이들’에게 갑오년의 해방이 그러했고, 일제의 수탈통치를 기정의 사실로 알고 하루하루를 연명해오던 식민지 백성에있어 불현듯 찾아온 독립이 그러했으며 국민학교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오직 한사람의 대통령을 모시고( ? ) 설아온 사람들에게 10·26이나‘80의 봄!이 그러했다. 더구나 그 ‘쇠항아리’를 깨부수는 데, 그 검은 구름자락을 걷어내는데 미력하나마 일조를했던 이들에게 있어 그 기뽑은 이루형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6·29의 항복에 그렇게도 흥분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전개는 ‘티없이 맑은’ 하늘이 영원이 아니라 검은 먹장구름이 영원이며 언돗 나타난 과란 하늘은 우연한 돌연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심어주고도 남을만큼 염려스렵다. ‘항복문서’의 미사여귀는 어느새 그 이전의 폭력적 협박의 말로 바뀌어 버렸고, 꼬리를 사라며 취구멍을 찾던 수구세력이 다시 이전의 위용( ?)을 과시하며 들었던 백기를 채찍과 칼로 바꿔버린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앞뒤를 가릴 수 없었던 혼미의 상황에서 자행된 언어적 물리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또 유난히도 짜증스러웠던 무더위와 이를 더 배가시켜주던 최루까스에도 불구하고, 일신상의 안락을 버린‘ 채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우리 시민들이 자신들 요구의 실현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이는가를 확인하지도 않고 증권투자나 부동산투기, 혹은 프로야구에의 열광 등의 소시민적 일상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표면적인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대통령직선을 확보했고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으며 구속되어 있던 양심수들의 석방을 얻어냈고 출판과 언론에 있었어도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했을 뿐만아니라 민족민중 문학예술의 입지를 더한층 강화시킬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5공시절의 주도적 인물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실질적인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거나 극복하지 못했으며, 광주학살이나 삼청교육대 및‘언론학살’의 진상만이 일부 밝혀지고 있을 뿔 그 책임소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더 많은 민주인사들이 또 다시 구속되고 있으며 언론과 출판은 엉뚱한 다양성만 향유하고 있을뿔 가장 중요한 부분에는 엄청난 탄압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렵게 스스로의 입지를 확보한 민족민중 문학예술도, 전혀 극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는 서구 모더니즘적 입장에서, 다양한 문학예술의 하나 정도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민주화의 걸림돌이 곧 분단이요, 이를 강요한 세력이, 제국주의 세력이며, 이에 편숭한 독점재벌 및 과쇼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이에대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좌경용공의 폭력으로 매도되고 어정쩡한 ‘선민주 후통일론’이 현실적 온건론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었다. 다함께 잘살기 위한 민주화에 기충민중은 당연히 제외되고 있고 사람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한 민주화임에도 이를 지향하는 교육만은 여전히 불온시되고 있는 것이다. 다수의 참여 로만 보장될수 있는 민주화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제는 계속해서 정치꾼들의 흥정의 대상으로서만 떠오르다
미루어지고 있으며 자치단체의 장들도 여전히 독점세력들에 의해서 임명된 아첨꾼들이 차지하고 있다. 유월항쟁의 그 숭고한 정신은 어디로갔는가? ‘티없이 맑은 영원의 협’을 볼수 있음으」로 인하여 갖게된‘외경'과 ‘차마 삼가서 발걸옴도 조심’하는 마음은 어디로사라져버렸는가? 파란 하늘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의 확보를 위해 ‘쇠항아리’를 찢으려 했던 그 염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녕 유월의 그 함성이 한 여름날의 기분풀이였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그것이 욱하는 군중심리의 발로나 요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일시적 한풀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마음을 추스려야 한다. 그것을단순히 지나간 역사의 하나로 기리기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급박하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유월정신의 일차적 의미는 인간에 대한 마음에 었다. 민주화에의 의지는 모든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있어야 한다는 사랑의 발로인 것이다.
이는 곧 인간에 대한 신뢰와, 이와 비슷한 정도의 인간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한다. 즉다수의 참여로 인한 결정이 최선의 것은 아닐지라도 가장 합리적인 것일 거라는 믿옴과, 이러한 다수의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는 제도적장치를 확보하지 봇했을 경우에는 소수의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세력에 의하여 임의적으로 결정되기 십상이라는 염려의 소산이라는 말이다. 유월정신의 참된계숭은 민주적 제제도의 확충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이는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동 각종 반민주 사회악법들의 철폐를 우선적으로 요구한다. 또한 단위조직체에서의 의사결정은 다수의 참여가 보장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전제이다. 지방자치제나 노동조합 동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더욱 유념해야 할 점은 이러한 사랑(물론 이는 감상적 연민과는 전혀 다른것이다)의 대상으로 이제까지 소외되었던 기충민중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나 이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제도가 전혀보장되지 않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노사간에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겉으로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전혀 ‘몰역사적 훈계’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곧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는 모든 불의에 대한 항의 즉 정의에 대한 염원과 연결된다. 이는 단순히 자기 개개인의 삶이 불편하고 방해받고 었다는 것에 대한 불평의 차원이 아니다. 박 종철군이나 이 한열군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단순히 우리의 자식과 형제도 저런 끔찍한 회생의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의 소산만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이는 이를 통하여 여지없이 드러내보여준 지배세력의 실상-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을 뿔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효}는 제도적 폭력도 스스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불사하는-에 대한 원천적 분노인 것이다. 유월정션의 계송은 이제까지 저질러져 왔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어느곳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각종 사회적 불의의 척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치적 보복은 하지 않겠다’는 미명하에 과거의 비행에 대한 단죄가 유보된다면 이는 더욱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는 일이될 것이다. 5공비리의 청산은 물론 광주학살 및 삼청교육대 동의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그 유죄를 준엄하게 물음으로써만이 똑같은 범죄를 방지할 수있다. 아울러 국가경제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기충민중들의 희생만을 강요해왔던 독점재벌에 의한 파행적 정국운용도 하루빨리 청산해야할 과거의 비행이라 할 수 있겠다. 유월항쟁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주정신의 발로라는 데 있다. 학원문제의 해결을 문교부에 기대할 수는 없다. 노사문제에 대처하는 노동부의 태도는너무도 구태의연하다. 주된문제의 해결을 아파트투기를 조장하는 주택공사에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 하물며 통일의 문제를 미국에 의흔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의 해소를 위한 철저한 책임의식을 견지하고 있지 못할 경우에는 어떠한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소시민적 일상에 함몰되어 우선 당장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폐해가 업보처럼 스스로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다. 지하철노조의 파업이나 교직원노조의 결성에 출퇴근시의 불편이나 ‘당신은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않을거요?’라는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이는 숭고한 유월정신에 어긋나는 일일 뿔만이 아니라 이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요 도전인 것이다.
‘쇠항아리’는 그것이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정확한 인식과 이를 제거하려는 자발적 의지의 노력에 의해서만 사라질 수 있다. 유월정신은 단순히 이를 기림으로써 계숭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의 현실에서 그것이 갖는 정확한 의미를 점검하고 이를 구체적 현장에서 구현하려 노력할때만이 창조적으로 계숭될 수 있는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는 어느시인의 절규가 단순한 구두선이 되지 않기를 파란 유월의 하늘 아래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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