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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6 | 칼럼·시평 [문화칼럼]
갑오농민전쟁 준비하자
신순철(2004-01-27 11:35:12)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리.
황토현 동학혁명기념탑 뒷면에 새겨진 동학군의 구전 명문(觀찌은 갑오년의 실패를 예견한 듯하다. 갑오농민의 한은 을미 병신년이 되면서 숨을 죽였다.
동학농민의 실패는 갑오년의 사실들을 한동안 입에 올릴 수 없게 하였고 농민군에 가담한 사실도 꼭꼭 숨겨야 했었다. 어느 시대에나 실패한 혁명은 보수체제의 강화를 불러오고 그 관련자들이 숨죽이고 살아야 했을 것을 생각하면 하물며 왕조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일어섰던 “동학란”에 있어서랴. 이러한 사정은 갑오년의 일이 불과 100년이 채 못된 일이었지만 우리에게 동학농민군에 관한 초보적인 사실들 조차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형편에 있게 한다. 가령 전봉준의 출생과 성장지가 어디인지, 농민군이 최초로 정부군을 격파한 황토현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조차도 각양각설이다. 갑오농민이 우리 역사에서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 된 뒤였다. 농민군에 참여한 세대들이 거의 사망하거나 노인이 되고 나서야 “동학당이 일으킨 반란”은 조선당조 지배체제가 지닌 보순의 폭발로 밝혀지고 또 한 세대를 지나면서“농민혁명”, “농민전쟁”으로 명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학문적 명가일 뿔, 그들의 후손들에게 그해의 변혁운동에 나섰던 그 할아버지들의 영광을 가슴 벅차게 느끼게 해주지 못하는 현실에 있다. 식민지 아래에서 민족독립을 위해 목숨바친 사람들의 후손들도 그러하지 못한 차제에 동학농민군의 후예들이 어찌 엄두를 낼 수 있으랴만.
× × ×
이러한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근대사가 실패한 역사였기 때문이다. 혹자는 우리 근대사를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지만 민족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보면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조선이 개항되면서 세계 자본주의 열강의 국제질서에 강제 편입된 이래, 당시 우리 역사가 가야할 방향은 왕조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이를 이룩하기 위하여 갑신정변, 갑오농민전쟁, 독립협회 동의 변혁운동이 있었지만 보수지배권력은 외세의 보호와 지원 아래 이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혁의 요구를 일정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 갑오개혁이나 광무개혁 등의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보수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의 개혁이었고 보면 그것은 지배권력유지의 한 방법이었다. 청국, 러시아 일본세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지배권력은 이 민족의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같은 과정에서 보면 보수세력에 의한 개혁이 얼마나 역사모순을 심화시키는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똑같은 사정이 해방후에도 계속 되고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현실에서도 민족국가의 수립은 좌절 되었다. 미 ·소의 냉전체제에 편승한 이승만정권은 반민특위를 좌절시키고 식민지 관료충과 식민지 지주, 매판자본과 결탁하여 독립운동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들을 하냐씩 제거하면서 분단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따라서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사에 있어서도 권력구조의 개혁을 통한 국민국가 수립의 과제는 실현될 수 없었고 식민지적인 보수체제가 유지되면서 식민지 파쇼권력을 모방한 분단 독재체제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시대모순은 4·19혁명으로 청산될 수도 있었지만 군부독재체제의 등장으로 다시 화절되고 보수체제가 강화되
었다.
반 역사적인 유신체제는 권력내부의 갈등으로 와해되었으나 이를 유지하기 위한 음모를 80년 광주시민의 희생 위해서
강화된 독재체제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켜 인권탄압과 민중생존권을 억압, 빈부격차의 심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87년 6월항쟁으로 위기에 처한 보수지배권력은 위장된 민주화를 내세워 집권연장을 실현하였고 최근에 와서야 우리는
민족사의 요구에 부웅하는 민주화와 통일에의 길이 보수권력에 의하여는 얼마나 수용되기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참다 참다 못해 일어선” 동학농민군의 생폰에의 요구가 폭도와 비도(展힘로 규정 되었듯, 여의도 농민집회와
노동자들의 생폰권적 요구가 폭도와 좌경혁명세력으로 규정되고 참교육을 실현하자는 선생님들이 동학농민군처럽 줄줄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른바 6공화국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80년 광주항쟁 뿔만아니라 4·19와 갑오농민군이 학문적 차원이 아닌 현실로서 민족사의 대의에 복권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국민국가와 수립되어야 한다.
× × ×
이제 5년이 지나면 갑오농민전쟁 100주년인 1%4년이 다7댄다. 농민전쟁의 본거지였던 전라북도에서 그들의 후예들이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우리 전북인은 갑오농민전쟁 100주년을 앞두고 두가지 준비를 해야한다.
그 하나는 농민전쟁의 100주년 기념사업이다. 금년으로 200주년을 맞는 프랑스혁명은 가히 세계적인 행사들이 이루어지고 었다. 그들은 이미 100주년에 각종 학회가 설립되고 저 파리의 에펠탑을 기념사업으로 건립하지 않았던가 물론 조형물이 혁명정신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을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였던 선인들에 대한 후세인의 의식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그간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학회조차없고 농민군에 관계된 자료도 어느 한곳에 모아놓지 못했다. 그리고 사적지의 보폰 정화도 정부예산에 의존하고 있고 당시 농민군에 가담함으로써 집안이 망해버린 농민군의 후예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동학민군의 후예인 전북인들이 이 일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우리 선인들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 디흔 하나는 갑오농민군의 요구. 4·19혁명의 요구. 80년 광주항쟁의 요구를 반영하는 진정한 자주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일이다. 갑오농민전쟁의 고장인 전북인들이 한국근대사의 가슴 뿌듯한 영광으로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민족사의 방향을 민주화와 통일의 길로 접어 들 수 있는 변혁운동에 적어도 농민군의 ‘후예인 전북인이 앞장서야 한다. 해방후의 독재권력 하에서 노동자 농민의 희생 위에서 달성된 경제성장은 이제 마땅히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농민군의 반외세의 기치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반봉건 반외세의 함성은 반독재 반외세의 변혁운동으로 실천하여 농민과 노동자를 폭도와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자주 민주정부를 세워야 한다. 적어도 1994년 갑오농민전쟁 100주년에는 민족사의 발전을 한단계 높이는 새로운 전기가 되도록 하는 것이 전북인에 부여된 임무이다.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어 못간 농민군의 한은 우리세대에서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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