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녕왕릉(武寧王隆)
1971년 7월 충남 공주군 공주읍 송산리(현재의 공주시)에 있는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5호분과 6호분의 배수시설을 하던 중 무녕왕릉이 발견 되었다. 당시 5호분의천정에서는 물이새고 있었으며 6호분의 벽에도 습기가 차기 때문에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무녕왕롱은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고분이다. 그것은 단지 도굴되지않은 백제의 무덤이 발견되고 부장품이 많았다는 점에서만이 아니고 또다른 점에서도 우리나라 고고학에 기념할만한 것이었다. 우선 무녕왕릉에 대한 조사를 간단한 살펴보고 그 조사가 가지는 의미 몇가지를 정리하도록 하겠다.
무녕왕롱은 벽돌로 방을 만들고 그방의 바깥쪽에는 흙을 씌운 전축분(벽돌무덤)이다. 바깥쪽 흙(이를 봉토라고 함)은 직경 2Om내외의 원형을 이루며 안쪽에 있는 방의 바닥에서 7.7m
높이를 보인다. 봉토에는 석회가 섞여 있었으며 봉토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위하여 봉토의 외곽에는 돌을 돌리고 있었다. 안쪽에 있는 방은 남북방향으로 긴 직사각형 명변에 남쪽벽의 중앙에 바깥쪽으로 길게 무덤길(쫓道)이 있는 형태이다. 방의 남쪽과 북쪽벽은 천정부까지 수직으로 벽돌을 쌓았으며 동쪽과 서쪽벽은 아래쪽은 수직이나 위쪽에서는 차츰 안쪽으로 좁아드는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즉 터널처럼 방의 천정을 만들었는데 벽돌을 쌓는 데에는 중간중간에 석회를 발랐다. 사용된 벽돌은 방의 안쪽으로 면하는 곳에 연꽃무늬가 있는 것들로 몇개의 벽돌이 이어졌을 때 연꽃과 인동문이 완성되도록 개개의 벽돌에는 부분무늬가 양각되어 있었다. 방의 동쪽과 서쪽벽에 각 2개소, 그리고 북쪽벽에 1개소의 작은 퉁감(燈감)을 마련하고 있다. 이곳에는 등잔을 두어불을 밝혔는데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청자 등잔이 놓여있었다. 이 벽감의 주위에는 주황색으로 불꽃무늬가 그려져 있었으며 벽면에는 곳곳에 15cm정도 길이의 쇠못이 박혀있었다. 방의 바닥은 연도쪽의 1m남짓한 곳이 21cm깊이로 낮으며 다시 그에서 높아진 바닥은 관대(植臺)처럽 보인다. 이 관대처럼 보이는 곳에는 동쪽에 왕의 관, 서쪽에 왕비의 관이 놓여있 었으며 머리는 남쪽에 두고 있다. 따라서 왕의 왼쪽에 왕비가 있는 것으로 이처럼 남자의 왼쪽에 여자가 있는 것은 중국 한(漢)나라식이다. 다만 머리를 남쪽에 두고 있는 것은 중국이 북쪽에 머리를 두고 있는 것과 다른 양상이다. 목관의 측벽은 한장씩으로 되어있으나 천정은 여러개의 긴판을 겹쳐서 만들어 방의 천정과 같은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관의 바깥에는 금과은으로 만든 장식못을 박아서 화려하며 관의 안에는 그림과 금장식으로 장식된 두침과 족좌위에 왕과 왕비를 모시고 었다. 방의 바닥은 암반을 평평하게 깎은 다음 그 위에 두겹으로 벽돌을 깔았으며 벽돌의 이음새의 암반의 상면과 벽돌과의 사이에는 석회를 발랐다. 방의 크기는 남북 길이 4.2m,동서 폭 272m, 관대가 있는 곳의 바닥에서의 높이 293m이다. ’방의 남벽 중앙에 있는 연도는 폭1.04m, 길이 2.9m, 높이 145m이고 천정은 방의 천정과 같은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연도의 바깥쪽에는 주로 깨진 벽돌과 석회로 쌓아서 연도를 봉쇄하였으며 이 연도에서 봉토의 외부까지 약 9.3m길이의 통로가 었다. 이통로는 풍화된 암반을 파내어 만들어진 것이며 연도에서부터 시작된 배수 시설이 이 통로를 따라서 바깥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108종 2906점으로 그중에는 국보로 지정된것이 12점 었다. 이 부장품중 우선 주목되는 것은 돌로 만든 묘지석(墓誌石)과 동물상이다. 묘지석은 왕과 왕비의 것이 각 1매씩인데 국보 163호로지정되었다. 왕의 지석에는6cm폭으로 사이를 가르고 6행 52자의 기록이 있으며 뒷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서 음각선을 그리고 그 선에 일부 걸쳐서 십간십이지(十千十二支)의 문자를 역시 음각하였다. 황비의 지석에는 4행40자의 명문이 있으며 뒷면에는 6행58자의 기록이 있는데 왕의 무덤을 위하여 무덤이 자리한 땅을 땅의 신으로부터 산 내용이다. 동물상은 묘지석과 함께 연도의 중앙에 놓여있었는데 머리를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투박한 생김을 하고 있으며 이마 위에는 쇠로 만든 뿔이 있고 몸의 좌우 앞뒤 다리 위에는 날개가 도안되어있었다. 이 동물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중국 한(漢)나라 무덤에서 무덤을 지키는 사자와 같혼성격의 것으로 여겨지는 상징적인 동물이다. 왕과 왕비의 관(冠)을 장식하는 금으로 만든 관식(짧m)이 출토되어 각각 국보 154호와 155호로 지정되었다. 순금판으로 만든 이 관식중 왕의 것은 불꽃이.타오르는 형태로 가운데·줄기를 중심으로 초F우에 인동당초푼이 투각되어있다. 관식의 아래에는 가는 꼬다리가 있고 그 꼬다리에는 가는 구멍이 있어 관에 부착, 고정시켰다. 왕비의 관식은 중심부에 꽃이 꽂혀있는 꽃병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작은 연꽃이 있으며 이 중간부의 좌우에는 인동문과 보상화문이 대칭을 이루게시리 투각되어있다. 이 관식들은 두께가 0.2cm이며 높이 226cm, 폭 134cm내외이다.
국보 156호와 157호로 지정된 왕과왕비의 금제 귀걸이중 왕의 것은 가는 고리에 두줄기의 수식이 달려있다. 이수식중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 장식의 아래애 심엽형(하트형태)의 장식을 달고 있는데 이 심엽형 장식의 앞뒤에는 그보다 크기가 작은 심엽형의 장식이 덧불여져 있다. 원통형 중간식에는 누금세공(金板에 작은 金함이나 金絲를 불여서 무늬를 표현하는것 ; Filigree)의 금선(金線)과 작은 금구슬이 장식되어있다. 다른 하나의 수식은 여러개의 가는 고리로 이루어진 구슬모양의 장식에 5개의 영락(瓔珞)을 금실로 매단 것을 5개 연결하고 맨 아래에는 2개의 영락이 달린 금모(金!閒)를 씌운 푸른 색의 곡옥을 달았다. 왕비의 귀걸이도 가는 고리에 두줄기의 수식이 달려있는 것인데 그 중 한 줄기는 금사슬로 연결된 나뭇잎 형태의 영락이 4개 있고 그 아래에 투각이 있는 금모를 씌운 유리구슬이 달려있다. 다시 그 아래에는 4개의 나뭇잎 모양의 영락이 있고 그 아래에 초실형(草實形)의 장식이 었다. 나뭇잎 모양의 영락과 초실형 장식에는 가장자리를 따라서 누금장식이 었다. 다른 한 줄기는 각4개씩의 둥근 영락이 금사슬로 7매듭이 연결되어있으며 그아래로 다시 8개의 둥근 영락이 었다. 이 영락의 아래에는 누금세공에 의하여 모자를 씌운 것처럽 보이는 형태의 끝이 뾰쪽한 장식이 있다. 국보 160호로 지정된 은으로 만든 팔찌는 왕비의 것으로 그중 왼쪽팔에 끼었던 것에는 명문이 있다. 팔찌의 바깥쪽에는 두마리의 용이 양각되어 있는데 용은 머리를 뒤로 돌리고 길게 혀를 내민 힘찬 모습이다. 안쪽에는“康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라는 옴각범문이 있어 팔찌를 만든 때와 제작자의 이름을 전하고 었다.
이외에도국보 158호금제 목걸이, 159호 금제 뒤꽂이, 161호 청동거울, 164호 왕비의 두침(頭뼈, 165호 왕의 족좌(足座) 등과 환두대도, 각종구슬, 각종 청동그릇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녕왕룡의 발견과 그 조사는 백제의 왕릉으로는 처음으로 도굴되지 않은 것이 조사되어 당시의 문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우선 묘지석에 의하여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가가 분명하였으며 또 묘지석의 뒷면에 자리하고 있던 동물의 존재와 땅을 사는 문서 등은 당시의 매장관습을 밝혀주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묘지에 의하면 무녕왕은 523년에 세상을 떠나서 525년에 매장되었고 왕비는 526년에 세상을 떠나서 529년에 매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떠난지 2년, 또는 3년 뒤에 매장을 하고 있는 것은2차장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같은 장례풍속은 오늘날에도 일부 섬지방에서 행해지고 있는 초분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또 매장을 위하여 땅의 주인이라고 인식한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로부터 땅을 사들이고 있음은 모든 땅은 왕의 땅이라는 후대의 관념과·다른 것임이 주목된다. 그리고 땅의 주인으로 신이 아니고 계급적 서열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왕, 백, 부모가 거론된 점도 흥미있다. 왕릉이 주변지역에 일반적인 석실분이 아니고 벽돌무텀야라는 점은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부장품중에 중국제의 거울이라든개 동전, 자기 등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비교적 강한 보수성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진 무덤, 그것도 왕의 무덤이 외래의 것이라는 점은 얼핏 문화적 종속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었다. 그러나 벽돌을 쌓아서 벽을 만드는 수법에서는 중국과의 차이가 보이며 유물중에도 중국과는 다른 속성들이 보이고 있어 외래문화의 한 아류로서 등장한 무덤이라고 볼수 없다. 오히려 당시 전반적으로 채용되고 었던 왕릉급의 석실분중에 고구려의 벽효}무덤에서 영향을 받았옴에도 틀림없는 것들이 있다는 점과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외래의 문화를 자체문화에 수용해보려는 시도로 파악된다. 즉 다양하게 전해지는 외래문화를 자체내에서 소화 흡수하기위한 노력의 하나로 파악함이 타당하다. 이 무덤은 발견 당시부터 일반인의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이 무덤자체가 가지는 학술적,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는 197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이 무덤에 일반인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였고 이후 언론매체에서 고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암울한 정치적 상황과 결부됨으로써 소위 “신문고고학”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은 언론과의 활발한 제휴는 고고학적 성과의 대중화와 사회교육적인 자료로서의 활용과 국민의 문햄구에 부웅한다는 측면에서나 그같은 대중화를 통하여 고고학이 양적인 성장을 이루어내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의 감성에 호소하는 흥미위주의 내용과 그 본질적인 문제에의 접근보다는 허황하다고 표현될 수도 있는 겉치레만의 학문으로 고고학을 의곡시키고 골동취미에 영합하는 학문으로 고고학을 전락시키기도 하였다. 또 무녕왕릉의 발굴에서 행해졌던 시행착오가 그 내부의 화려한·부장품에 눈이 가려 은폐된 것처럽 이후의 발굴도 ‘부장품위주, 눈에 보이는 화려한 유물의 경쟁적 발견에 중점이 두어지게 되었다. 1988년에는 이같은 분위기에 문화전시적인 행정적 구상이 가미되어 무녕왕릉지구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왕릉급 고분의 탐색조사가 시도되었고 이는 이 무덤이 발견조사될 당시 이미 가지고 있었던 숙명의 재현인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