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이 건강한 시민성과 합일(合一)되어야 함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건강함은 진실을 토대로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시민성은 가족간의 연결끈이 튼튼함을 연상케 할 수도 있다. 튼튼한 연결 고리는 가족 구성원들간의 애정으로 표출될 수 있고 그 밖의 사회와의 관계 끈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 가족들 간의 연결 고리가 사회와의 연결망과 동일 선상에 놓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싹튼다. 사회의 정의를 목놓아 외치면서도 시위현장에 앞장서는 자식들을 모든 부모는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연극 〈까라부인의 무기〉(브레히트 작 ·정초왕 연출)는 대개의 부모들이 범하는 자기 모순을 통렬히 고발하고 있다. 외세의 지원을 업은 군부의 살상행위에 스페인 국민은 분노한다. 까라 부인이 사는 마을 사람들도 분연히 일어나 민병대의 전투 행렬에 참가한다.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다. 까라 부인만은 전쟁 참여를 반대한다. 심지어 자식들의 전투 참·여 욕구와 그 성화가 빗발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완강히 반대할 뿐이다. 관객의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군부의 잔인한 만행을 규탄하는데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전쟁터에 자식을 보내지 않으려는 까라부인의 의도도 관객 모두는 이해하고 있다. 작가 브레히트의 미학적 역량은 이 같은 갈등구조에 머물지 않고 한단계 넘어서는 성찰 영역을 통해 확인된다. 심각한 현실을 외면한 평화론자의 허구성이 비판과 토론의 도마대 위에 오른다. 중립을 지키는 것이 경우에 따라 엄청난 오류임이 이 공연을 통해 입증된다. 그녀의 큰 아들은 물고기를 잡는 도중 군부의 순시선에 의해 사살 당한다. 민병대가 열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오히려 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 판명된다.
정의가 압살당하는 위기 상황에서 마을 신부와 그녀는 ‘살인하지 말라’는 교리에 얽매일 뿔이다. 민병대원 빼드로의 반박은 신부와 까라의 불합리성을 명쾌하게 확인시키는 데 기여한다.“예를 들어 한 남자가 있는데 곧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고 그래서 자신의 몸을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말린다면 그 사람은 닭모가지 비틀려 죽듯이 죽음을 당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이 살인에 가담한 결과가 되지 않을까요” 관객은 빼드로나 신부의 토론을 통해 누가 이 상황에서 옳고 그론가를 성찰하게 된다. 신부가 부르짖는 평화주의는 이 상황을 통해 허구적 모형으로 전락된다. 이 작품은 심각한 현실 풍토와 그 불합리를 방관해 왔던 동시대적 풍토를 통렬히 고발하고 있다. 역사가 퇴행하고 사회는 더욱 중병에 시달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간의 끈에 얽매어 구경꾼의 입장에서 무력한 형태를 반복한다. 브레히트는 스페인 반란 정권의 만행을 방관한 당시의 서방 민주 국가들의 형태와 중립성의 병폐를 꼬집기 위해 이 작품을 쓴 바 있다. 작가의 교훈적 의도는 틀극과 극중극이라는 이중 구성을 통해 확인된다. 틀극은 프롤로그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수용소의 난민과 보초병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강대국의 침공시 싸울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대화 내용의 주종을 이룬다. 대지주들이 민중 탄압과 수탈을 위해 강대국의 침공을 오히려 환영하고 있음이 통렬히 고발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강대국과의 싸움은 패배만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왜 싸워야하느냐’하는 의문 자체가 패배 요인의 하나임을 노동자는 강변한다. 그는 수용소의 난민인 자신의 누이와는 아들들을 예로 들면서 극 중극의 형식을 벌어 관객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접근토록 유도한다. 불합리한 사회와 세계가 변혁되어야 한다는 브레히트의 기본 자세는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배여 있다. 브레히트의 다른 작품이 이화효과(異化效果)를 겨냥한 서사극적 틀거리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오히려 이 공연은 재래 유형의 갈등 구조를 취하고 있다. 관객은 소시민적 삶의 안이함이 어떻게 무너지고 그 허구성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된다. 평화주의나 종교적 구호의 허구성에 함몰된 채 심각한 현실 인식을 거부한 주인공의 소외상은 점차 중폭된다. 그녀의 언어는 소위상황의 흐름과 그 심리 변화를 농밀하게 체험케 한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法”이라든지 “장군들은 아주 나쁘기는 하지만 인간이며 말상대가 되지 않는 지진과는 다르다”라는 언어는 심각한 현실 상황을 외면한 채 중립병의 무기력성을 은폐시키려는 현대적 소외상을 단적으로 환기시켜 준다. 연출자 정초왕은 관념적 요소의 지나침이 지루함을 야기시킨다는 점에 대비하여 고심한 혼적을 보이고 있다. 신부(조민철해)와 노동자 빼드로(홍석차해)의 토론 장면은 흡인력을 발휘하면서도 동시에 성찰의묘미를 불러일으킨다. 까라부인(김순자初)과 아들 호세(김숭현해)의 대립은 극적 긴장감과 소극적(笑劇族) 요소를 동시에 유발시켜 준다. 포성이 울려 퍼지는 심각한 현실 그리고 사회 참여의 강한 분위기는 한 소시민의 허구적 평화 의식과 입체적 균형을 이룬다. 관객은 주인공의 소외상황에 대해 경우에 따라서는 비판적 우월의식을 갖기도 한다. 스크린에 투사된 슬라이드 화면은 극적 박진감을 유발시키면서 미적 효능 외 힘찬 에너지를 체험케 한다 주인공 까라부인의 성격 창출이 확실치 못하다는 비판은 몇 장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아들 호세의 전쟁참여를 막기 위해 그녀는 몸싸움을 벌인다. 그와 몸싸움 도중 발이 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그와 힘겨루기에서 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만류 작업은 중단되고 포기된다. 타당성을 상실한이 장면이 불확실 환성적 창출의 요인이라고 끝까지 우긴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보면서 결여 행위는 오히려 분열되고 인식력마저 상실한 주인공의 소외상을 증폭시키기 위한 면밀한 처방임을 우리는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상황변화나 장면 변화가 거의 대부분 창문보고 형식으로 대체된다. 제한된 무대 공간의 맹점이 보고 형식의 지원을 얻어 극복되지만 볼거리나 들을 거리의 취약점을 노출시키고 만다. 시청각적 쾌감의 부족을 압도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극적 처방은 사변적 연극의 최대 난제이다. 액자 무대가 아닌 열린 형태의 소극장 무대가 이 작품의 새로운 묘미를 일깨워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새로운 소극장 무대와의 싸움은 브레히트 연극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상기해 볼 때 이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양식의 실험과 탐색 작업만이 지역 무대를 더욱 살찌게 할 수 있음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