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0.6 | 칼럼·시평 [저널초점]
"우리시대의 풍경" 과 "오월, 광주"
문화저널(2004-01-27 14:44:48)

문화 예술은 일단 일정한 형태로 완성되고나면 스스로자립적 구조를 갖게 된다. 그래서 그 발생배경과 전혀 다른상황에서도 공감을불러 일으킬 수 있다. 효서의 「캔터베리이야기」가 현대의 한국 독자에게도 감명을 줄수 있는 것은바로 이러한 속성에 기인한다.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의미의 획득이 보편성 자체에의집착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독특한 구체적 상황에충실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아이러니에 문화예술의 묘미가있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서곡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읽힐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당시 중세의 질서가 붕괴되면서 야기되는 가치의 혼돈상태는 물론 인간중심적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가고 있는, 다소 혼미스럽기는 하나 무엇인가로의 지향을 함축하는 열띤 분위기를 매우 사실적으로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의 보편적언어라 할 수 있는 라틴어나불어가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사용하고 있는-방언 정도로 여겨져 문학이나 학문의 공식적인 언어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던-영어를 사용했다는, 구체적인 것에의 충실이 바로 보편적 셜득력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보편적인것이며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역설의명제가 타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들을근거로 해서이다.그러므로 구체척인 삶으로의 복귀를 통하여 문화 예술이 새로운 활력을 확보하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있다. 이로 인해 영시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던 쵸서를 비롯한 워즈워스, 앨리어트 등의 예는 그 귀한 증거라 할수 있겠다. 이처럼 문화 예술이 일정한 자렵적 구조를 갖게됨으로써 야기되는 정체성, 삶으로부터의 괴리는 구체적삶으로의 복귀 흑 현장성의 획득을 통하여 극복된다.이를 통해서만이 문화 예술은 비로소 삶의 대체물이나삶으로부터 도피의 수단이 아닌 풍요로운삶을 위한 소중한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우리가 임옥상교수의 우리 시대의 풍경 이나 임진택씨의 오월, 광주 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프리카 현대사 의 탁월한 상징성과 뛰어난 총체적형상화를 통하여 80년대 말 우리 화단에 충격을 주었던임교수의 이번 작품은 왜 한반도가 아닌 아프리카의 현대사냐? 혹은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 중심이 되는 천상도 냐? 하는 혼한 의문에 대한답으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현대사 나 천상도 가 지니는 우리 현실에 대한 핍진한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그 제목들이 암시하듯 그것들이 우리의 구체적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조금은 추상화된이야기로부터 오늘 바로 우리가살고 있는 현장, 그 땅의현실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려는 치열한 자기쇄신의노력은, 그림이 결코 호사가들의 기호품이나, 골동품 수집자들의 투자 대상이 아니라는 우리들 대부분 건강한생활인들의 의식과 연관된다. 그것은 다시 그림이, 아니문화예술이 삶에 찌들린 사람들을 위한 위안물 혹은 그 불완전한 삶의 대체물이어야 한다는 예술지상주의자들의허위의식에 대한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기도 하다. 그것은바로 그림이, 가닥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는 우리사회현실의 착잡한 겉모습 이면에 숨어 있는 실체를 바로느낄 수 있게 해주며, 이를 통하여 우리 사회를 건강한방향으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삶을위한 그림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의 소산이기도 하다.작위적으로 배치한 정물에 대한 죽은 그림이나,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무상한 것으로 여기게하는 신선도가 아니라, 또 혼돈의 상징성 말고는 아무것도이해할수가없는 착참한추상 전위미술 같은 것이 아니라,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보고 느끼며 향유할수 있는 오늘, 이 땅의, 우리들의, 살아있는 그림올 그리려는 소박한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80년대초 똥바다 와 소리내력 으로 판소리의 민중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한 바 있는 임진택씨의 창작판소리 오월, 팡주 는 바로 그 가능성을 실현에 옮긴오늘, 이땅의, 우리들의, 살아있는 판소리에 다름아니다. 전래의 판소리 다섯 바탕에 하나를 더 보태게 되었다는 임씨 자신의 자부는 결코과장된 것이 아니다. 판소리가우리 문화유산중 가장 찬란한 것이라는 청송은 자자했지만그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은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이루어지고 있지 않다.(제10회 백제기행에서 빨치산중대장출신이 들려준 죽은 동지들을 기리는 대목-적벽가의 군사설움타령의 변형-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 드문 예라할 수 있겠다.) 양반귀족들의 풍류의 대상으로서 이미극복하고도 남았어야 할고루한가치관을담고 있는,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여, 이를 오늘날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것 자체가 그 고귀함에 대한명예훼손으로 간주되고 었으며, 그 기계적 답습의 정도로대사습의 장원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 민족문화계숭발전의부인할 수 없는 현주소인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우리 현대사에 있어 가장 극적인 사건인광주민주화항쟁의 여정을 가장 전통적인 문화유산의 틀로그리려 했다는것은, 그자체만으로도민족민중예술행위의귀감으로 간주될 만하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도 굳이전문가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다. 주최측의 체면을 생각하여 잠시 들렀다가 가려했으나 소리에 취하여 자리를뜨지 못하고 끝까지 듣게 되었다는, 이제껏 판소리를 진득하게 들어본 적이 없다던 사람의 고백이 가장 정확한평가일테니까 말이다. 이를 통하여 광주항쟁의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관련서적을 통했던 것보다 훨씬 더 총체적이고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그의 감사 인사는 우리의 건강한문화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그러나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다. 아프리카 현대사 가준충격적 감동에 미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기대가너무컸다거나, 조금은 익숙한 형태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라거나, 아니면 아프리카 현대사 가 긴 하나의 그림으로 대작의 풍모를지니고 있는 반면에 우리시대의 풍경 은토막토막의 그림이었다거나 하는 등의 소박한 인상에 기인하는것만은 아니리라. 똥바다 에 비하여 오월, 광주 가 느슨해 보인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느낌이다. 그 규모에있어 비교가 안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전체를 한 데로 모아주는 더욱 강력한 절정이 있었으면 싶다. 대금을 반주로한 노래는 그것 자체로 굉장한 감동을 주지만 이것으로절정을 대신할 수는 없으리라. 판소리가 이야기라는 점을인정한다 하더라도 사설이 지나치게 산문적이라는 점도지적을 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한정된 범위에서 이야기를풀어나가자면 시의 응축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전통 판소리의 한문투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소리의단순한 올림 이상의 내용을 느낄 수 있도록 좀더 함축적인·언어로 가다듬었으면 한다는 말이다.양쪽다 한마디로 덜 무르익었다는 말이 되겠다. 그 건강한 의식과 의도가 잘 익은 된장처럼 무르녹아 있어야하는데 숨 덜죽은 배춧잎처럼 생경스렵다. 특히 우리시대의 풍경 의 경우,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작가의 간곡한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림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한국사회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등의 사회과학적 왈가왈부가 주조를 이루었던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작가스스로가 자초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을 사회과학서적의 보조수단 정도로 여기게끔 사회과학적 관념이그림속으로 녹아들지 못했던 것이다.구색맞추기 트집일랑 그만 두자. 두 분의 작업은 분명문화 예술행위가오늘 우리들의 현실과 긴밀한 관계속에서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명제가 구호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감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구체적 작품으로 엄존함을증거해주고 있다. 이처럼 현실적 삶에 근거한 문화가 하루속히 사이비 귀족 문화나 상업적 대중문화의 대항 혹은대체문화로 성장하기를, 또 다른 6·29를 기다리며, 바란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