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2차례에 걸쳐 실상사의 몇몇 유물에 대하여살펴 보았다. 그 결과 실상사에 있는 유물에는 통일신라양식의 정통적인 속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과 그와는 달리 정통적인 규범을 벗어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는 실상사의 석탑, 중각대사의 부도,그리고 백장암의 석등이 꼽힐 수가 있으며 후자의 부류에는실상사의 석등, 수철화상부도탑비, 백장암 석탑등이 포함될 순 있다. 또 사찰이라는 속성과 얼마간 거리가 있는 것으로 언식되는 석장승이 사찰의 경내에 매우 근접하여자리하고 있는 점도 주목되는 점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실상사의 유물에서 보이는 이같은 점이 그 당시의 사회상에서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인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하여 이들 유물에 잠재된속성을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백제지역 민중들의 의식을 얼마간 추측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1. 시대적 배경-실상사 창건전후의 신라 사회실상사가 창건된 것은 9세기의 일이며 실상사는 선종9산중의 하나로 성립되게 된 것이다. 7세기 후반 한반도내에 있던 백제와 고구려라는 문화적으로 선진집단을 영역내에 편입한 이후통일전쟁과정에서 가장큰공이 있었던김춘추와 김유신의 가문을 중심으로 전제왕권을 강화하여 성덕왕, 경덕왕때에 이르러 국가체제를 정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같은 전제왕권은 혜공왕에 이르러 일어난96각간의 난이라는 지배계층내의 내분을 기점으로 급격히기반이 약화되고 혜공왕 이후에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게된다. 96각간의 난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가지게된사회적 구조의 모순에 기인하는것이었다. 즉 골품제도라는 신분제도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신라의 사회구조는 지배계급인 진골이 일정기간의 평화가 유지됨에 따라 수가증가하고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욕구가 증대하는데 반하여 그를 충족할 자원은 부족한 것에서 진골내부의 갈등이 야기되게 되었다. 또 신분제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으로상대적 열세에 놓이게된 6두품으로 대표되는 세력은 행정능력과 유학의 실력에서 자신들보다 열등한 진골계급에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당시의 지식인 계급인 6두품은 신라사회의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으나 기득권을수호하려는 진골에게는 수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6두품을 중심으로한 지식인 계급은 지방에 은거하는 경향을 가지거나 현실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불만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진골계급들이나 중앙 정치에서 멀어진 진골계급중에서는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지방의 근거지로 낙향하는자들이 있게 되었다. 이 진골들은 지방의 호족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지방으로 은거한 지식인계층은 이들 호족들과 결탁하게 되었다. 이들의 결합에는 또 정신적인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불교 숭려들의 참여도 있게 되었다.
신라의 불교는 통일이전 왕이 곧 부처라는 관념에 입각한호국불교로서의 속성이 강한 것이었다. 이 점은 진명왕의이름이 석가불의 아버지와 같은 백정(白淨)이었고 그의왕비가 석가모니의 어머니와 같은 이름인 마야부인(慶耶夫人)이었다는 것에서 분명한 것이다. 또 아마도 진골계급이었을 의상(義湘)은 통하여 왕을 중심으로하는 화엄 사상을 주장하여 신라의 반도통일에 정신적 기초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통일을 전후하여 의상과는 달리6두품 출신이었던 원효(元曉)는 화쟁사상에 기초한 화엄사상, 즉 만민이 평등하다는 기본원칙을 주장하였다. 그의입장은 의상 등의 입장 즉 공동체적 일체감을 기반으로지배계충에 의한 권력의 전제화를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같은 지배자를 중심으로한 화합과는 달리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평등이라는 토대위에서 사상적 융합을 이루는 화합의 사상이었다. 원효의 입장은 통일을전후하여 동장한 정토사상과 맥을 같이 하여 통일이후민중에게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통일되기 이전 왕정의하급귀족이나 평민계층을 중심으로 발생한 정토신앙은통일이후백제의 유민들을중심으로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에는 물론 백제유민만이 아니라 신라의 지배계층에 의하여 압박을 받는 피지배계층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백제유민의 경우 적지않은 귀족계층까지도 일반민중의 정토신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본디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정토에 가서 살고자하는 신앙형태로 이에는 민중만이 포괄되는 것은 물론아니었다. 극락정토에 갈 수 있는 계층은 차별적이라는주장도 있으나 원효에 의하여 그같은 차별이 없으며 모두가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이론이 전개됨으로써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었다. 극락정토에 가기 위하여서는 많은선행과 공덕을 쌓아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 민중은 절을 짓는다거나 불상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남에게 물질적도움을 줄수 있는처지에 있지 못하였다. 또그들은불경의깊은 뜻을 깨우칠만한 지식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또 지배계층이 현세에서 그들이 누리는 특권을 유지하며 오래오래 살기를바라서 또 죽은 자가 극락에 가기를 바라서 절을 짓거나 불상을 만들고 법회를 마련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민중들에게는 지배계층의 정토신앙과는다른방법, 즉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뜻인 나무아미타불 을 염불함으로써 극락에 갈 수 있다는방법이 제시되었다.
아마타불에 귀의한다는 염불만으로 고통스러운 현세를 벗어나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는 정토신앙은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이 있는 것이었다. 또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극락에 확실히 간다는보장이 있다면 민중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빨리극락에 가고자하는소망을가지게 되었올 것이고 이는 바로현실부정적이고 염세적 경향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고통스러운 현세를 할수만 있다면 빨리 벗어남으로써 극락에 한시라도 빨리 왕생하고자 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민중중심의 정토신앙은 당연히 일반민중에게 급속히 환산되었고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는데 크게 공헌 한 바가 있다.
이처럼 일반민중으로 확산된 불교는 다른 한편으로 신라사회가 미처 벗어나지 못했던 무격신앙으로서의 불교적인속성도 지니게 되었다. 즉 고구려나 백제의 불교와는 달리 병을 고쳐준다거나 복을 벌어주며 재액을 막는 샤마니즘적인 속성도 가미하게 되었다. 그같은 경향의 대표적인예로 신라의 사찰에서 기원한 당간지주를 들 수가 있다.
당간지주는 불교사원에서 깃발이나 패불을 달기 위하여세운 받침기둥으로 당간을 지탱하는 것이다. 당간은 그기원이 불교사원 고유의 것이 아니며 솟대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북과 방울을 달고 하늘의 뭇이전해지는 사다리와 같은 통로로서 수목을 숭배하던 관념이 불교사원과 결합된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며 이는 원시신앙의 요소가 불교사원에 도입된 것이다.
2. 선종의 등장과 실상사
정토신앙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선종이 동장하게 된다. 본디 선종은 고구려의 법량 등에 의하여 이미 알려진 바가 있으며 원효도이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것으로보이나 신라의 국가체제가 절대왕권을 유지하고 불교에서도 화엄종을 중심으로한 교종이 위세를 떨칠 때에는 이의 수용이 어려웠던 것으로생각된다. 그 이유는 신라불교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것이며 신라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선종의 특성에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의 유행은 신라의 전제왕권의동요와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신라선종9산의 성립은 신라헌덕왕 13년(821년) 도의선사의 귀국을 전후한시기부터로생각되고 었다.
실상사는 도의선사와 함께 중국에서 선종을 배운 홍척에 의하여 선종 9산파중 최초의 사원으로 창건되었다. 홍척은 신라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개혁하려는 의도가 있었던홍덕왕과 선강태자의 귀의를 받고 그들의 도움으로 실상사를 창건하였다. 이후각지에 선총사원이 세워지고 선종의 승려들이 배출됨으로써 선종 9산문이 성립되기에 이른다.어쨌든 선종은 교종불교가 가지고 있었던 모순에 대하여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측면이 강하였으며 더불어 신라의 중앙귀족과 왕실에 대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면이 적지않았다. 또 바로 이점에서 선종이 당시의 지방귀족이나신라왕실에 대하여 개혁적 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지식인계급과 연결될 수가 있었다.또 선종의 승려중에는 진골귀족출신도 없지 않으나 그보다는 하위계급 즉 6두품 출신이 주가 되며 실상사의 2대조인 수철화상도 진골에서 그의 할아버지대에 신분이강등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즉 기반자체가 중앙정부의 귀족이 아니며 선종사원의 사회적 기반이 지방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중앙정부와는 다른 양상의 미술이사원에 도입되었을 것이다. 다만 실상사의 경우 그 개창이 흥덕왕과 선강태자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얼마간의 한계가 있으나 실상사 이후에 개창되는 선종사원에서 보이는지방적 특색과 규칙성에서의 일탈을 보여주는 초기의 양상이 백장압의 석탑이나 실상사의 석등에 반영된 것으로생각된다.
3. 실상사 석장승
실상사에는이미 살펴본바와같이 석장승이 있다. 본디는2구씩의 석장승이 2곳에 마주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중 1구의 장승은 없어지고 현재는 3구가 남아 있다.장숭은 본디 불교사원과는 관련이 없으며 원시신앙적인 것으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인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장승의 기원에 대하여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솟대, 선돌, 돌성황 등의 민간신앙과 결부하여 생각하거나 남성의 상징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인도의 원시신앙을 포괄하고 있는 점에서 혹 불교와 더불어 생각될 수도 있으나 대체로 우리민족고유의 신앙형태에서 발전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것 이다. 장승에 대하여는 신라에서는 이를 장생(長生)이라고하였으며 이점에서 신라시대에 이미 장승신앙이 있었음을알 수가 있다. 실상사의 장승은 물론 신라때의 것은 아니며그 제작시기는 조선중기이후인 것으로 여겨진다. 장승에 새져진 명문은 上元周將軍 과 大將軍 으로 이들이 장군임을 말하며 형태도 상원주장군의 경우 창을 들고 있는점에서 이들이 장군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찰에서 이같은장군형태가 들어선 것은 이들이 잡귀를 물리치는 힘을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잘알려진 바와같이 불교 사원에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하여사천왕이 있으며 금강역사도 있고 그들이 있는 문이 사찰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어 장승의 위력을 빌릴 필요가 없는것이다.
또 이 석장승에 있는 명문이 불교식의 명운이라기 보다는 도교적인 명문이라는 점에서, 또 인근 운봉지역에 있는 장승중 미록불의 형태를 지닌 것이 있음에도 이들 장승은 일반적인 장승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점에서 이를 불교의 본래적 속성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이 장승은 실상사 인근에 있는 선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파악함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가 위치한 지역의행정구역은 산내면 입석리로 입석이란 선돌을 의미하며실상사의 경역외의 논가운데에는 선돌이 있다. 동리명은 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선돌에는 호랑이에게 섣달 그믐에 공양을 드리는 의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창건당시의 양상은 물론 아니겠지만 조선시기에 들어서실상사에서는 이같은 원시신앙, 측 호랑이의 재앙으로부터 민중을 보호하는 기능, 장승을 믿음으로써 마을의 안녕을얻으려는 기원을 대행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이같은 양상은 실상사의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금산사의 창건과 그 이후의 양상에서도 민간신앙의 수용이있었음은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4. 맺는 말
신라 하대에 성립된 선종 9산파중 최초로 개창된 지리산실상사는 신라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식을 기반으로 지방의 호족과 신라사회에 불만을 가진 지식인계급에 의하여 주도되던 선종의 보급을 일반화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 그 사찰내의 유물들에는 당시의 전통적인미술공예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도 있으나 그와는 달리새로운 양상을 보이는 것, 즉 정통성에서의 일탈을 반영하는 것이 었으며 이는 당시의 사회상과 관련이 있다.또 시기가뒤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경내에 있는 석장승은 불교 사원이 민간신앙을 수용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소승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불교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몇몇 승려나 지식이 있고 재력이 있는 상류계충의 불교에서 보편적인 민중의 불교로 발벗고 나선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민중의 신앙을 홉수함으로써 그들을 사원으로 끌어들이는 적극적 자세로 해석된다. 물론이는 자칫 불교의 본래적 모습을 상실한 타락으로 간주될수도 있으나 신라 하대의 피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정토신앙과 마찬가지로 일반 중생에게 불교를 보편화시키는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좀더 자세히 장을 달리하여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