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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6 | 특집 [특집]
전북의 실학자2
반계 유형원
하우봉 한국사 전북대 교수(2004-01-27 14:49:26)

1. 생애와 학문
조선후기 실학의 거봉 반계(爾漢)유형원(柳聲遠)은 앞으로는 낙조가일품인 서해가 보이고 뒤로는 내변산의 아름다운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우반동에서 생애의 후반부를 보내었다. 그의 집은 비록 초라하였지만 대나무숲이 둘러져 있었으며 낮에는송림사이로 사슴들이 뛰놀았다. 반계는 그 속에서 조상대대로 내려오는만권의 책을 벗하며 독서와 저술활동에 몰두하였고 자신의 생활에 자족하였다고 한다. 반계는 이후 현종 14년(1673) 52세의 일기로 죽을 때까지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며 이곳에서 살았다. 자신의 호도 우반동에서따 반계로 정하였으며,『반계수록(睡溪隨錄)』을 비롯한 사회개혁론과 방대한 저술의 대부분이 이곳 우반동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그의 실화사상의터전이 바로 전북지역이었으며 이후 전북지역의 실학사상사에 그가 끼친영향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반계는 전북의 인물이라고 할수 있으며 전북의실학자에 채일 윗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고 여져지는 것이다.
반계는 광해군 l4년(1622) 서울의정릉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문화 유씨로서 세종대 우의정을 지낸 유관이래로 명문의 집안이었다. 가까이로는 할아버지 성민이 정량을지냈으며, 아버지 홈은 예문관 검열의 벼슬을지냈다. 외가로는 우참찬을 지내 고경사와 주역에 밝았다는 이지완이 외할아버지였다. 전형적인 사대부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반계의 유년시절은불우하였다. 즉반계의 집안은 대체로북인계에 속하였는데 인조반정(1623)으로북인이 몰락하고그의 나이2세때아버지가 유인몽의 옥사(광해군의복위를 꾀했던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던 중 돌아가셨다. 또 그의나이 15세에 병자호란을 겪게 되자 원주로 피난길에 올랐고, 그의 할아버지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반계는22세 때부터 30세까지 함경도, 금강산을 비롯하여 남으로 호남, 영남지방을 두루 돌아보며 울분을 달래는 한편 양란이후 피폐한 농촌과 농민들의 생활상을직접 살필수있었다.
그 사이에 할머니와 어머니를 잃고,이어 30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3년상을 마친 뒤 귀거래사를 옳으며가족들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부안군우반동(지금의 부안군보안면우동리)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가 이곳 우반동을 선태한 이유는무엇일까?
반계는 인조반정후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였고,이어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나라가 오량캐라고 멸시하였던 만주족에게 굴욕을 당하고 백성들의 참상을 목도하면서 당시의 조정과 위정자들에 대한분노를 느꼈으며, 나아가 벼슬길에대한 미련을 두기보다는 나라를 개혁하고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것 같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치국의 방도를 저술할계획이었는데 시끄러운 서울에서는 몰두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부안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부안은 그의12대조인 유관이 청백리의 사패지(眼牌地)로 하사받은 이래 반계집안의근거지의 하나가 되었고, 그의 할아버지도 말년에 여기에서 머물면서 터를닦았다한다. 이런 경제적 기반외에 전국을 돌아본 그가 우반동의 맑은풍치야말로 선비가 가히 머무르면서책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여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후 이곳에서펼쳐진 그의 개혁사상과 관련시켜 볼때 당시 농촌사회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였던 이곳 전복지방을 택한 것도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여져진다.
반계의 출생과 생애를 둘러싼 배경을 보면 전통적 요소와 전통적 세계에저항하려는 또 하나의 요소가 뒤섞여있는 것을 알게 된다. 전자적 요소는그가 명문사대부가의 출신이라는 점과주자성리학을 존중하며 명의 멸망에대해 통분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후자적 측면은 그가 지배적 신분층에 속하면서도특권세력의중심에서 배제되었고, 허목의 표현대로 재상이 될 수 있는 재주(王佑之才)를 가지고도 당세에 뜻을 버리고은퇴하였던 점, 그리고 그후 밀려오는 경제적 궁핍 등이 그것이다. 반계는자신의 불우했던 환경에서 당시 농민들의 비참했던 생활을 쉽게 이해할 수있었고 그들의 불만을 자신의 그것으로 인식하였으며 나아가 그들의 고통의 원인을 전체 사회구조의 불합리에서 오는 것으로 보고 총체적인 사회개혁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지니고 있었던 전통성은 그의 사상의 일정한 제약으로 작용하였음도 또한 엿볼 수 있다. 이두개의 서로 상극적인 세계에서 반계는 결벽할 정도의 청렴성과 농민들에대한 애정,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한 제도적 개혁론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대책을 제시하고 그들을교육하는데 모든 힘을 경주하면서 선비로서의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자 하였다.
반계의 학통을 보면, 그는 외축부인이원진(하멜표류사건시 제주목사 역임, 성호 이익의 당숙)과 고모부 김세렴(일본에 통신사행의 부사로 사행하고 후에 호조판서에 오름)으로 부터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당대에 이름있는 학자였으며 대외관계에도 밝았던 인물들이었다. 한편그의 저술에 나타난 바를 보면 율곡이이와 중봉 조현의 실천적 철학사상과 국정개혁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율곡과 중봉의사상은 또한 전남 광주출신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철학사상에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반계의 사상은 호남지역과의 연관성을일찍부터 가지고있었다고할수있다.
반계의 학문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그의 관심의 기본이 백성들의 실용에 도움을 주는 학문에있었던 만큼 철학에만 머물지 않고정치, 경제, 역사, 지리, 군사, 언어,문학, 방술, 의학, 약학, 산술학에이르기까지 실로 백과전서파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20여년 동안 우반동에서 칩거하면서 이루어진그의저술은 유명한 『반계수록』 외에도『정음지남(正音指南)』, 『동사괴설변(東史怪說辯)』, 『동국사강목조래(東國史網目條例)』, 『역사동국가고(歷史東國可考)』, 『동국문초(東國文妙)』 『기호신서절요(紀效新書節要)』 『서설서법(書說書法)』 『참동계초(參同契妙)』 『무경사서초(武經四書排)』 『기행목록(紀行目錄)」 『여지지(與地志)』『지리군서(地理群書)』 『중홍위략(中興偉略)』 둥 20여종이나 된다. 책이름만으로도 반계의 학문의 호한함을 바로 알 수 있겠는데 유감스럽게도 합『반계수록』을 제외하고는 현재 모두전하지 않고 있다.

2. 『반계수록』에 펼쳐진 개혁사상
『반계수록』은 그때그때 보고 들은것을 모아 쓴 것(隨錄)이라고 겸손하게 이름 붙였지만그가 임종시 오직이 책을 안고 눈을 감았다고 할 만큼l9년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쓴 책으로 여기에는 반계의 개혁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다. 총 26권에 달하는 대저로, 체재는 〈전제(田制)〉 〈교선(敎選)〉 〈임관(任官)〉 〈직관(職官)〉 〈녹봉(綠棒)〉 〈병제(兵制)〉 〈속편(續-篇)〉의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면에는 그 문제와 관련된 역사적인 문헌의 근거를 들어 자신의 주장근거를밝힌 고설(政說)이 있어 객관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그의 개혁사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반계 이전에도 이이, 조현, 김육 등에 의해부분적인 정책개혁론이 제시되기도하였지만 『반계수록』처럼 국정제도전반에 걸친 총체적인 개혁론은 되지못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반계수록』은 실학파의 사회개혁론 가운데서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쌍벽을 이룬다 할 것이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이상국가론올제시한사상가는 많다. 그런데 반계는 윤리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두고 국정과 사회제도의전반에 걸친 일대개혁을 논하고 있다는 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다.『반계수록』에 나타나 있는 그의 개혁사상을 조감해 본다면, 일차적으로토지의 균분에 의한 자영농민의 육성보호를기본목표로하고 있다.
그바탕위에 국가재정의 확립, 인적자원의기획화, 교육재도와 인재등용제도의재정비, 행정기구의 간소화 등으로써 중앙집권의 강화와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론은 동양 고래의 이상국가론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록 조선조 봉건사회에 대한근본적인 도전은 아닐망정 당시의 정치와 경제를 농단하여 온 관료귀족,대토지사유자, 서리와 같은 중간착취계급 둥의 이익과 상반되는 급진적인정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국가 사회의 전반에 걸친 체계적이고 일관된하나의 구상아래 체계화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반계의 개혁사상은 그 이전의 이이나 김육 등의 부분적이고점진적인 개혁론과는 성격을 달리하는것이다.『반계수록』은 그 내용이 급진적인개혁론이었던 만큼 서인집권하의 조정에 바로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숙종대에 부안에 있었던 그의 제자들에의해 조정에 바쳐졌고, 영조대에 이르러 비로소 빛을보게 되었다. 영조는 양득중의 상소에 의해 이 책에 관심을가졌고자신의 개혁정치에 『반계수록』을 기본적인 참고자료로 삼았다 한다.또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이 책을 읽도록 권하였으며 동왕46년(1770)에는이 책을 간행하여 조정과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3. 반계 실학사상의 의의
조선시대 실학이라고불리는새로운사조는 임란후 조선사회 내부적인 요소와 청을 통해 들어오는 양명학, 고중학, 서학등의 새로운학풍의 영향을받아 l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중엽에이르는 시기에 한백겸, 이수광, 김육둥에 의해 그 싹을 피우고 있었다.그런데 이 시거의 실학은 새로운 사조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의 단계를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사회전반에 걸친 문제에 대한 개혁론을 모색하고 고증학, 고학, 서학등에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는 것은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인데, 유형원, 박세당, 이익,안정복, 이중환, 신경준 둥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반계는그 선두에 서서 실학을 하나의 학문으로서 체계화했다 할 수 있다. 그런점에서 반계는 일반적으로 조선후기 실학의 비조로 평가받고 있다. 그후반계의 사회개혁론은 성호 이익을 거쳐 다산 정약용에 이르러 만개하였고,우리나라의 역사를 비롯한 국학의연구도 이익과 안정복에 의해 계승발전되었다.한편 『반계수록』을 비롯한 대부분의저술이 부안의 우반동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반계의 실학사상에는 전북이라는 지역적인 요소가 결합되어있음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당시전북지방은 비옥하고 넓은 토지를 가진 만큼 귀족들의 수탈대상지로 화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어느 지역보다열악하였고 토지소유관계를 비롯한 모순이 치열한 곳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숙된 반계의 사상의 줄기가중농적인 성격을 띠고 농촌사회의 제모순의 해결과 그것의 연장으로서 국가체체의 제도적인 개혁으로나아갔던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또한 부안에서 20여년간 있으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이들이 비록관리로 현달하거나 대학자로 이름을날린 이는 별로 없었지만 이른바 호남실학의 뿌리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상상할 수 있다. 반계의 실학사상은그후 다방면에 걸쳐 이 지역의 학문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후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신경준, 황윤석,위백규, 이복원, 하백원, 이윤성 등 이곳 출신의 훌륭한 실학자들이 많이배출되었다. 그런 점에서 반계 유형원은 한국실학의 비조이기도 하면서동시에 호남실학의 비조이기도 하다.
부안의 우반동에는 반계의 유적이많이 남아있다. 반계는마을사람들을위해 그가 직접 고안한배 네 다섯척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말을 기르기도 하고 활과 조총 수십자루를 두어 마을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하고 우물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한다. 그가 자신의학문을 몸소 실천하고자 하였던 증거이기도 하다. 또 부안사람들은 예로부터 활쏘기와 총쏘기를 잘했다고 하며 특히 우반동 사람들 중에 명포수가많았다고 하는데, 반계가 이곳에서가르친 결과라고 하는 이야기가 지금도 그곳에서는 전해지고 있다. 한편 부안의 사람들과 그 제자들도 반계가 죽은 후 19년만인 숙종 19년(1693)부안현 동쪽에 서원을 세우고 그를길이 기념하고자 하였으며 상소를 올려『반계수록』을 조정에서 간행하도록 호소하였다. 그가 마을사람들을 위해직접 만들었다는 우물이 지금도 남아있으며, 그가 살았던 고택과 그를 기념하는서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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