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상, 그는 부지런한 작가다. 이는 작품의 생산량과 속도에서 보다 그 소재들을 살펴볼 때 더 어울리는 말이다. 이미 「친구는 멀리 갔어도」,「십오방 이야기」, 「새벽기차」 등 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가 이번에 또 한 권의 소설집을 내어 그 부지런함을 발휘해 보였다. 그러나 본인은 작가의 말(“책을 내며”)에서 좀 더 열심히 성실하게 생활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는 겸손을 빠트리지 않는다.『아메리카 드림』에는 모두 여섯편의 중 ·단편이 실려 있다. 참교육 문제를 소재로 한 「마침내 사랑이」, 노동현장을 다룬 「사슬」, KAL 858기 참사사건 얘기 「희망」, 이철규 사건의「적개심」, 핵문제의 심각성을 깨우치는 「겨울꽃」 그리고 해외입양아 문제의 충격적인 고발 「아메리카 드림」이 그것으로 우리사회의 가장 첨예한 모순과 갈등의 현장을 찾아다닌 노력의 흔적이 한눈에 엿보인다. 그 중 「겨울꽃」, 「적개심」, 「아메리카 드림」둥에 속속들이 차있는 충격적인 사실들은 경악과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전에 「친구는 멀리 갔어도」에서 그토록 생생하고 처절하게 묘사되었던 물 고문, 전기고문이 급기야 이철규를 죽음으로 몰아 갈 때는 눈을 감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원자력발전소 잡역부의 아내가 사산한 기형아의 모습은 슬픔이라기 보다는 공포에 가깝고 미국으로 입양된 다섯 살짜리 아이가 그 또래 미국인의 병든 심장을 바꿔주기 위해 해체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질 땐 이미 슬픔이 아닌 절망에 찬 분노에 휩싸인다.
소재에 걸 맞는 아니 그것을 능가하는 세부묘사의 치밀함 또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의 탁월한 재능이다.
작가는 한 권의 책 속에서 독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한군데서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현장으로 서둘러 떠나야 한다. 「마침내 사랑이」는 교육현장에 와 있다. 참교육의 물결이 서서히 밀려드는 8학군의 명문고 영어교사인 명호는 단지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일 뿐이다. 그러나 급박하고 절실하게 진행되는 주변상황은 그를 양심에 충실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가 본드홉입사건으로 처벌받게 된 학생들을 교장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세력(학부모, 교육위원회)으로부터 보호하는데 급급해 있는 동안(결과는 실패로 끝나지만) 학생들은 학생회직선제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그 배후 주동자로 전부터 교장의 눈에 가시였던 문예반의 지도교사 김승호가 지목되어 국가보안법의그물에 걸려든다. 평소에 뜻을 같이하던 김승호 선생을 위해 아무 일도해 줄 수 없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사직을 결심한 명호는 본드흡입으로 부당하게 혼자만 무기정학에 처해져 자퇴서를 들고 온 민수의 제의로 서로를 구제하기로 마음을 돌린다(사직서와 자퇴서의 교환·보관).
“김승호선생님올 석방하라! ”를 외치며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 속으로 뛰어가는 민수를 바라보며 명호는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데 이후의 명호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는 미지수로 남겨진다. 덧붙여 지금의 교육현장에서 한창 치열한 쟁점이 되고 있는 전교조 활동에 대해한마디 구체적인 언급 없이 참교육 문제를 다룬점은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사슬」은 독자를 이제 상당히 익숙해진 노동현장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보여주는 대신 반공이데올로기라는 사슬에 철저히 얽매인 한 노동자(재구)의 어처구니없는 행동과 그에 따른 엄청난 결과를 이야기해준다. 왜곡된 ‘간첩신고’의선전효과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건
광주민중항쟁 연구
지역연구모임
올해로 광주민중항쟁 10주년 이 된다. 우리는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한국사의 한 분기점으로 설정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사에 있어서의 80년대는 해방 이후 계속되어 용 종속적 자본주의화의 모순이 구조적으로 표출된 시기이며 이률 극복하고자 하는 민중의 변혁적 전망이 과학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처럼 광주로부터 시작된 80년대는 그 이전의 시기와 비교하여 우리 역사에 있어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모순구조를 해명하고 그 극복의 대안을 마련하려는 이론적, 실천적 시도가 활성화되는데 비해서 광주민중항쟁 자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은-그것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그동안 미약했던 게 사실이다. 이것은 (최소한 공개적으로)광주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했던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 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진보진영이 지닐 수밖에 없었던 광주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광주민중에 대한 우리의 원죄라고도 할 수 있을 이러한 부담은 그러나 발전적으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80년대 말부터 비로소 본격화되기 시작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과학적 접근의 시도는 이러한 의미에서 또 하나의 항쟁계승투쟁으로 위치 지워질 수 있다.
올해 들어 항쟁 10주년을 맞아 자료집 및 증언기록 둥의 출판이 활기를 띠고 있다. 그 중에서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본격적인 학술적 접근을 시도한 두 편의 책에 특히 주목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연구』(사계절)와 『역사와 현장』 창간호에 실린 한국현대사사료연구회의“5·18 광주민중항쟁 9주년 기념학술토론회” 발표논문들이 그것이다. 한국근대사 속에서의 광주민중항쟁의 위치 및 그 성격과 의의를 해명하려는 작업의 본격적 출발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두 권의 책 중에서 우리가 앞의 것을 소개하기로 작정한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차별성 때문은 아니다.
다만 『광주민중항쟁연구』가 항쟁만을 주제로 한 단행본이어서 소개가용이하리라고 여겨졌으며, 또 이 책이 항쟁 10년째가 되는 바로 그날(90년 5월 18일) 출판되었다는 점도우리로 하여금 이책을 선택하게 한 이유가 되었다.
『광주민중항쟁연구』는 서장을 포함한6편의 논문과 좌담 및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서장에서는 그 동안 광주민중항쟁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했던 소위 지배계급의 논리와 항쟁의 역사적, 구조적 원인들을 덮어둔 채 광주시민의 순수한(? ) 자위적 저항으로 파악하려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도덕적 견해들을 부정하고 항쟁의 발생원인과 그것의 성격에 본질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구조’ 를 과학적으로 인식함으로써만 민중운동사 속에 항쟁을 올바르게 위치시킬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전체적으로 이 책의 필자들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계급적 ·민족적 모순이 만들어낸 지배층과 피지배민중간의 (민중 대 반민중적, 민족대 반민족적) 대립이 사회의 역사적발전의 특정 국면 속에서 민주와 반민주간의 대립으로 집약되어 나타나고, 이러한 대립이 다양한 여러요인들과 복합적으로 얽혀 전개되는 가운데 특정 시기와 특정 장소에서 적대적으로 폭발된 것으로 광주민중항쟁을 파악하면서 항쟁의 역사적 지위들 .
군무의 거대한 무력에 맞서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쟁취코자 전개된 민중투쟁’으로 인식하는데 합의하고 있다. 이러한 합의를 바탕으로 해방 이후의 한국근대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항쟁의 객관적 배경이 되는 정치적, 사회경제적 모순구조들을 분석하며(제 l,2,3장), 한국자본주의가 지닌 계급적 대립구조가 특정 지역에서 폭발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되는 항쟁주체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제2장). 또한 해방 이후(또는 최소한 한국전쟁 이후) 거의 논의조차 금기시되어 왔던 민중의 무장투쟁이라는 가장 고차척인 형태로 항쟁이 발전할 수 있었던 직접적 원인과 항쟁의 기간동안 나타났던‘민중적 사회질서(즉, 민중자치권력의 수렵)’올 분석하면서 항쟁이 지니는 민중운동사에 있어서의 새로운 의의와 그 한계를 검토한다(제4장). 한편 한국사회성격논의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논재의 요소가 되고 있는 제국주의의 규정성 문제가 광주민중항쟁에 있어서의 미국의 개입구조를 중심으로 검토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광주민중항쟁은 실천적으로뿐만아니라이론척으로도한국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종속적 자본주의화로 요약될 수 있는 한국근대사 과정에서의 외세의 역할에 대한인식을 새롭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배태된 계급적 ·민족적모순구조와 이를 극복할 민중적 대안의 모색도 80년대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아울러 변혁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전망에 대한 인식도 8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 될 수 있었다.
이 책은 광주로 인하여 가능해진 우리의 인식을 통하여 다시 광주를 과학적으로 조명하려는작업이라 할 수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좌담: 한국사회 지역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는 지역을 바라보는 역사적 방법론의 한 틀을 제공해준다.
지역감정의 역사적 근원까지를 검토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 글은그동안지역사회를분석하는올바른관점의 수립에 목말라 있던 우리에게 귀한 자료가 된다.90년은 우리사회의 민중운동에 지배세력의 탄압이 강화되는 시기라 여겨진다. 이러한 시기에 광주민중항쟁을 주제로 하는 연구작업들이 활성화되는 것은 여러가지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간 항쟁의 의미를 축소, 왜곡하려는 시도들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던바『광주민중항쟁연구』는 일차적으로 이러한 시도들이 지니는 본질을 폭로하면서 민중운동 인식의 민중적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민중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그리고 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하고있는 분들께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