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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8 | 연재 [저널초점]
'지리산 옆에서 살기'와 "좋은 언어"
이종민 편집주간(2004-01-27 15:24:52)

60년대 말 군사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한 음모가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목소리가 높다’고 불온시 되어오던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외치지 마셰요/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허잘것 없는일로 지난 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때는 와요./ 우리들아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허지만/ 그때 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며칠 전 전교조 관련 교사의 해임무효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려 화채가 되었던 판사는, 자신의 판결이전교조의 주장이나 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법리적 해석의결과일 따름이라며 언론의 ‘호들갑’올 유감스러워 했다. 그는 요즘 감명 깊게 원은 책으로 서정인의 『지리산 옆에서 살기』를 권했다. 목소리를 높히지 않고 소박한 원칙들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요즘처럼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삶의 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지리산 옆에서 살기』라는 서정인 최초의 유일한 산문집에는 욕에 대한 재미있는 고찰이 실려있다. 그는 이 글에서 욕을 “구어체의 꽃”이라 부르며 이를 글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의식의 이중구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의식의 이중구조는 우리들을 가식적인 사람이 되게 한다. 가식적인 삶은 진실이 없는 삶이고, 진실과의 접촉이 없는 삶은 오래되면 마비가 된다. 마비는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의 욕에 대한 예찬(?)은 이렇게 지속된다. “욕은 상스럽고, 미풍양속에 어긋나고, 반문화적이다. 따라서 욕을 해서는 안될 이유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순응의 동물이 될 수는 없다. 점잖고 잘 길들여지고 우아한 삶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욕이 전문명의 누더기를 벗어 던져 버리는 것처럼 통쾌할 수가 있다.”그는 과연 욕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도 차분하다. 지리산을 이야기하면서, 그 ‘산사람’들파 ‘딴 군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말하면서도 그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다. “마치 누가 오라고 라도 하는 듯이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듯이 안가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철따라 부지런히” 탔다는 지리산을 얘기하면서,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연작 『달궁』의 ‘영감’을 얻은 곳-물론 이 글은 이 연작소설이 완성되기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도 남얘기 하듯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산문집에는 지역감정, 단일창구, 반미감정, 황금주림 등 최근의 정치문제나 사회문제에 대한, 그의표현을 빌자면, “격앙된 비난”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격앙된 비난”들 속에서도 언어가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다. 보편적 의미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도 여실히 확인된다. 흥분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여유가 있다는 얘기이다. 문체도 소박하다. 대부분이 평이한 단문으로 이루어졌으며 제국주의니 신식민주의니 하는 복잡한 개념의 용어들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소위 ‘적적 성성’(的的, 性性)의 착잡한 한문투 용어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줄여 말하기(understatement)’때문에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래서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그렇다 ! 여기에 그의 글의 묘미가 있다. 큰목소리로 자신의 논리를 남에게 강요하거나 주입시키려는 게 아니라 차분하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 논리를 정리하여 감화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서정인 글의 묘미이며 강점이다. 이것이 자신의 일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꺼려하던 판사를 감동시킨 점일 것이다. 바로 이점이, “껍데기는 가라”“사월은 갈아엎는 달” 둥으로, 오히려 목소리가 너무 높다고 얼치기 문학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던, 시인이 “외치지” 말고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한다고, 힘차게 그러나 목소리는 낮춰 ‘외친’ 이유일 것이다.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소위 ‘과학성’을 내세워 자신의 동지를 개량주의자니 교조주의자로 매도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에는 특히나 목소리를 낮추고 원래의 소박한(?) 원칙들을 확인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사상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갖가지 분열의 작태들을 볼 때, 복잡할 때는 소박한 원칙들을 확인하며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 판사의 말이 실감나는 것이다.
그러나 대원칙에 있어서조차 의견이 다른데도 여유를 부리는 것은 허위일 수 있다. 기본적인 상식조차를 지키지 않는데도 침착하고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한 일이다.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무시한 채 각종 악법들을 여론의 수렴 없이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범 민족회의를 지원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절차상의 문제를 이용하여 교묘히 방해하며, 또 야권통합의 의미를 희석하기 위하여 실현할 의사가 전혀 없는 대북한특별담화를 불현듯 발표하는 등의 파렴치한 짓들을 자행하고 있는 마당에, 욕 한마디 하지 못하는 것, 욕을해도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하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비행을 암암리에 방조하는 것이 된다.
여유로움은 한 인간의 인품으로 또 그 인품의 외현으로서의 글로는 의미있을지 모르지만 뒤틀린 상황-각종 파렴치한 짓들이 차행될 수 있는-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효과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세태로부터 초연하여 좀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시시콜콜한 세상살이에 흔들리거나 연연해하지 않고 자신의 소박한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은 부러운 일이기조차 하다. 이러한 초연함은 분명한 개인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훌륭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도 쉽게 흥분하지 않는 여유는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문제는 한 개인의 구원이나 그 개인이 훌륭한 성인군자가 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따로 있다는데 있다. 가능한 많은사람이 바람직한 인품을 유지하며 욕되지 않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가 그러한 여유로움과 침착함으로 성인군자가 되면 되지 않겠느냐는 반문은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한계를 너무도 도외시한 말이다. 우리가 발버둥을 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도 홈이 많고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욕은 서정인의 지적대로 우상파괴의 징후이다. 이로부터 거듭남은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피곤을 풀어주는 주문(呪文)”의 차원에 머물러서 만은 안될 것이다. 그것이 “부지불식간에 분노를 조금씩 발산시키는” 것으로 기농해서만도 안 된다. 이는 그 욕된 상황을 해치려는 의지로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파계조차가 자연스러운 도사(道士)들이 허허로이 뱉어내는 육두문자와 같은 것으로 승화( ? )되어서 도안된다. 거기에는 한파 분노가 서려있어야 한다. 서정인 스스로가 산문집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악쓰는 것이 망측하기도 하지만 “죽은 듯이 잠잠 해지”는 것도 “괴괴”하고 “흉측하다.” 분노해야 할 때 여유를 부리는 것도, 그의 말대로, 의식의 이중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며 이러한 가식은 곧 죽음과 연결되는 것이다.
성인군자나 도사가 아닌 우리 평범한 중생들은 소박한 원칙들을 확인하면서 “좋은 언어”로, 그러나 “목에 핏대를” 세워야 할 때면 세우면서 이 타락한 세상을 부둥켜안아야 하리라. 불완전한 우리로서는 “지리산”의 의미도 지나치게 차분하게 새기기 보다 일부러라도 확대 해석하면서 “옆에서 살기”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미미한 우리의 삶에 다소나마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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