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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8 | 특집 [특집]
전북의 실학자3
여암 신경준
하우봉 한국사 전북대 교수(2004-01-27 15:29:38)

1. 실학으로서의 ‘국학’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당시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한 사회개혁론을 제시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문화에 대응하는-조선의 전통문화를 재발견하고자 했던 이른바‘국학(國學)’의 연구이다. 유교사상이 전래된 이래 한국에서는 유교사상의 문화적 보면 주의에 입각하여 유교적 내지 중국적인 문화를 보편적이고 우수한 것으로 인식하는 대신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를 특수하고 후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사에 있어서도 가장 강렬한 중화주의적 성격을 띤 주자학의 영향을 받자 이러한 모화주의(幕華王議) 내지 문화적 사대주의 경향이 강화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와서는 이러한 세계관에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또 종래 오랑캐라고 야만시하였던 청(淸)이 중원을 차지하게 되자 유교문화의 정통을 우리가 계승하게 되었다는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 내지 조선중화주의적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l7세기의 이러한 의식은 아직 숭명반청척(崇明反淸的)인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18세기에 이르러 이익, 안정복등의 실학자들에 의해 그러한 한계성이 극복되면서 조선중화주의가 본격화되었다. 한편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의 북학파 실학자들과 한치윤, 정약용 둥에 이르러서는 화이적 세계관 자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와 이론적 체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비로소 ‘근대적 민족주의’의 싹을 보게 되며 새로운 국제인식£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바탕 위에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게 되었다. 즉 18 ·9세기의 일부 지식인들은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중국문화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우리문화와 전통에 대한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하였다. ‘국학’의 연구라고 불리는 이러한 조류는 사회개혁론의 제시와 함께 실학사상의 양대 지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실학자의 범주를 이야기할 때 진보적인 사회개혁론을 제시한 인물뿐만 아니라 국학을 연구한 학자들을 실학자로 인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여암 신경준도 후자에 속하는 실학자이다. 그는 사회개혁론에 있어서는 주목할 만한 업적이 없지만 지리학과 언어학을 중심으로 한 국학분야의 발전에 있어서 탁월한 저술을 남김으로써 실학사상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보면 8대조가 이조판서를 지냈을 뿐 그 후로는 크게 현달 한 인물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관직에 나가지도 못하였다. 즉 여암은 기개 있는 명문의 후예였으나 가까운 선조로서는 크게 현달하지 못하여 다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양반가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유복하지도 못하였고, 어릴 때부터 타향을 돌아다니며 생활근거지를 자주 옮겨야 하기도 하였다.
여암은 8세때 유학차서울로 갔다가 여의치 못해 이듬해강화로 옮겨 수학하였고 12세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26세에 부친을 여의고 이듬해에는 경기도 소사로 이주하였고 3년 후에는 다시 직산으로 옮겼다가 33세 되던 해에 순창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암의 학문적 경력을 보면 다양한 경로를 거쳤음을 알게 된다. 그는 박학다식하기로 당대제일이라고 청해지기도 하였으나 학맥이 불분명하고 교우관계도 활발하지 못하였다. 단지 그가 젊은 시절 경기도 지역에서 살았던 만큼 이른바 근기(近難)지방 실학파들의 학문적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또 북학파실학자로 손꼽히는 홍양호와 깊은 교류를 하면서 그와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암은 유학자들의 필수적인 교양이었던 성리학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을 기울어지 않았고, 관계에의 진출도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가 관계로 진출하게 된 것은 영조 30년(1754) 중 광향시(增廣獅試)에 합격하면서부터 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였고 그의 중요저작 중의 하나인 『훈민정음운해』 둥이 저술된 후였던 만큼 그가 처음부터 관직에 마옴을 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시험을 관장했던 장시관(훌試官)이 이계(耳螢) 흥양호(洪良浩, 1724-l802)였다. 그는 여암이야 말로 호남 최고의 선비라고 하면서 여암의 지식과 식견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후 여암은 25년간에 걸쳐 관직생활을 하면서 승문원, 사헌부, 사간원, 성균관, 승정원 둥에서 청직과 요직을 역임하는 한편 말년에는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업적은 역시 『여지편랍(異地便賢)』, 『팔도지도』를 감수하고 『여지고(與地考)』를 편찬하는 등 지리에 관한 저술을 통해서였다. 영조의 총애를 받게되는 계기가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영조의 각별한 신임과 총애를 받았는데 한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해 보자. 영조대의 대표적인 문화사업 중의 하나인 r동국문헌비고』 중 여지도27권을 여암이 편찬하였다. 이 책이 완성되자 영조는 직접 ‘여지도서(與地圖書)’를 썼는데 여기서 여암의 공이 가장 컸음을 기리고 그를 승정원 부승지로 제수하였다. 또 그후 〈동국여지도〉를 완성하자 영조는 이를 대전안에 걸어두었고, 여암을 승지로 발탁하였다. 이때 어느날 여암이 왕을 입대하자 영조가“승지는 백발이 되었고 나도 이렇게 늙었으니 임금과 신하의 뜻있는 만남이 왜 이렇게 늦었는가”라고 탄식할 정도로 여암의 재능을 아끼었다한다. 여암의 나이 88세 되던 해인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그는 3년간 상복을 입고 영조의 은혜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68세에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순창에 퇴거하였다. 그후 조정에서 여러번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였고 70세를 일기로
2. 신경준의 생애와 인간상
신경준(申景樓)은 조선후기 숙종 38년(1712) 전라북도 순창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며, 자는 순민(繹民), 호는 여암(旅암)이다. 가계를 보면 그의 10대조가 유명한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申末빼)이다. 말주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형 숙주와는 달리 당시 전주부윤(전주시장격)의 관직을 버리고 전북 순창으로 들어와 귀래정(歸來亭)올 짓고 은거하였다. 이것이 고령 신씨가 순창에 세거하게 된 시초인데 꿋꿋한 기개를 지닌 집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선대를 1781년 사망하였다. 여암은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실학의 대가이기도하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아주 소탈하였던 것 같다. 정인보의 평을 잠시 인용해 보자.“(여암은) 문과급제로 관계에 나가 3품에까지 이르렀으나 가슴에 지닌 포부를 펴지 못하였다. 박학함으로는 당대에 제일 일뿐 아니라 모든 일에 밝고 정연함이 또한 비교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홍양호, 이면백 등이다 중히 모셔 희대의 석학이라고 일컬었다. 여암은 누구와 든지 학문을 가지고 논쟁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명사거유(名士巨橋)들과는 별로 통하지 아니하였고, 오로지 보통마을의 무식한사람을 만나서 속된 이야기나 시골노래로 우스개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교우관계에 있어서도 “교류하기를 삼가하여 조정에 들어간 지 20여년에 권세가와 귀족들의 문에 발을 들여놓지 아니하였고, 오직 문학으로 깊이 사권 사람으로는 홍양호 한 사람뿐이었다.”(申敵求擺 旅암行狀)고한다. 이로 보아 여암은 날카로운 논리와 개혁론을 전개한 학자형이기 보다는 과묵 실천형의 선비이고 소박한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지리학과 언어학에 탁월한 업적
여암은 다문다재하였고 관심분야도 호한하여 여러 방면에서 저술을 남기고 있다. 우선 그의 저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리학관계로는 『강계지(彊界志)』,『산수고(山水考)』, 『도로고(道路考)』, 『사연고(四沿考)』, 『가람고(伽藍考)』, 『군현지제(都縣之制)j, 언어학관계로는 『일본중운(日本證龍)』,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題解)』, 『오성운해(五聲題解)』 『언서음해(證書音解)』 등이 있고, 천문학관계 저서로 『의표도(歲表圖)』, 『부앙도(부仰圖)』가 있다. 그밖에 논문형식의 간단한 글로서는 〈논선차비어(論船車備續)〉, 〈차제책(車制策)〉, 〈병선제(兵船制)〉, 〈수차도셜(水車圖說)〉둥이 있다. 저술목록을 보아도 그의 학문의 성격을 바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지리학과 언어학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27세 때에 『소사문답(素沙問答)』이란 책을 지은 바 있으나 그 이후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오히려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지리학과 언어학 외에 수차, 병선, 수레 둥 농사와 교통, 군사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였다. 이런 부분을 보면 유학자의 그것 이라기 보다는 과학자의 논문집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당할 정도로 여러 가지 설계도와 투영도가 제시되어 있고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되어있다. 여암은 이와 같이 치밀하고 과학적인 두뇌와 사고방식과 함께 실용적인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지리학과 언어학상에 있어서 여암이 남긴 학문적 의의를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여암은 우리나라의 산천과 도리에 가장 밝았다고 명가를 받고 있었는데, 그가 우리 나라의 지리에 그 처럼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한 것은 ‘근대민족주의’의 한 요소인 영토의식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추측컨데 여암이 스스로 순창을 주된 생활근거지로 하면서도 여러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경험과 서산군수, 장연현감, 북청부사, 강계부사, 순천부사, 제주목사 둥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전국을 두루 돌아볼 수 있었던 경험도 한요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호를 여암(旅암)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경력과 관련이 있을 것같다. 그는 『여지고』,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 등 영조대 관찬지리서의 편찬사업을 주도하였고 1756년에 우리나라 역대 국가들의 강역과 지명을 고증한 역사지리서인 『강계고』, 1770년에는 우리나라 각 도의 리정(里程)올 기록한 『도로고』, 우리 나라 연해의 지리를 상술한 『사연고』, 전국의 모든 산과 강에 대해 지리학적으로 정리한 『산수고』, 우리 나라 사찰의 위치와 연혁을 서술한 『가랍고』, 전국각지의 군현의 연혁을 설명한 『군현지제』를 차례로 저술하였다. 지리학에 대한 그의 저술을 보면 자연지리, 인문지리, 역사지리 퉁 제분야에 통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강계고』에서는 많은 중국과 일본측의 문헌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강역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였다. 『도로고』에서는 도로의 공공성과 공익적 성격을 강조하였는데 이 점은 ‘모든 국토는 왕의 땅(普天之下 莫非王土)’이라는 사상이 지배하였던 전제 군주제 하에서는 혁신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실학자들 가운데 도로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적지 않지만 여암 만큼 절실하게 느끼고 본격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없었다. 도로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한 그는 나아가 정치의 기본을 도로를 다스리는 것(治道)에 있다고 까지 강조하였다. 도로가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에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도로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기 때문에 도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대책을 강구한 것은 오늘날 보아도 탁견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다음으로 언어학에 있어서 여암은 한문이 판을 치던 조선왕조사회에서 한문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떠나 ‘조선지식’을 추구하여 우리 삶의 근본이 되며 민족공동체의 사회생활에 기본적인 역할을 하는 우리말의 음운과 문자를 연구하여 『훈민정음운해』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폭어학면에서 실학의 민족자주적인 성격과 실용적 성격에 부합하는 것이다. 문자생활과 언어생활이 분리되었던 조선 초 사회에서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실상 문맹이 되었고, 양반지식인이 만들어 내는 문화도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의 민족문화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어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하나의 민족적 자각과 자존에 대한 절실한 요구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암은 그의 치밀하고 꼼꼼한 태도로 언어학에 대한 깊이있는 저술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훈민정음운해』이다. 그는 여기서 소리와 글자에 대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관찰에 의해 기술하는 과학적인 분석방법으로 접근하였다.
『훈민정음운해』가 지니는 국어학사상의 가치에 대해서는 정인보와 최현배의 명가를 빌림으로써 글을 맺고자한다. 정인보는 조선어학회에서 『훈민정음운해』를 간행할 때 그 해제에서 “훈민정음 연구로서 가장 깊은 연구일 뿐 아니라, (여암을) 국어학의 중흥시조(中興始租)로서 추존하여 지나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최현배는 『한글갈』에서 “음운학과 역학적(易學的) 설명을 시험한 것으로 자가학(自家學)으로 향하는 학문적 노력으로 볼 때 정음학(正音學)의 중흥주라 할 수 있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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