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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 | 연재 [사람과사람]
열린세계속의 예술과 삶의 문제화가 유휴열
김은정 본지 편집위원(2004-01-27 16:11:52)

서양화가 유휴열(柳休烈)에게 있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을 찾는 일’이며 그것은 곧 삶의 본질을 밝혀내는 일이다. 잘라진 나무 판 위에 붙여진 헝겊조각, 그가 창조해낸 화려한 색채들, 얼키고 다시 설키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삶의 편린들··열린 형식 속에서 또다시 열린 세계를 향해있는 작가의 형상적 인식의 분신들은 ‘삶의 실체’를 밝히는 강렬한 언어로 조합되어 있다.〈삶〉과 〈놀이〉, 그의 그림은 놀이의 개념으로 삶의 한중간에 서 있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그림은 난삽한 이 물질의 혼합으로도 항상 놀이의 절정을 이루는 〈신명〉같은 것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놀이란 것이 축제의 그 화려한 분위기의 그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즐겁고, 분노하고, 슬프고, 기쁜 감정을 총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독특한 신명을 표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 삶에 쫓기고 찌들리어 결국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들 삶에서조차 그는 오히려 삶에 대한 회의와 갈등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으로 충만해 있으니 작가의 〈놀이〉는 결국 일상적인 〈놀이〉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 모악산 한 자락의 끝, 논파 산이 맞닿은 그 곳에 집과 작업실을 들여놓은 화가를 찾았던 날은 무더위 끝의 살랑 바람이 짙푸른 산과 평야를 넉넉하게 적시고 있었다. 작열하는 햇빛으로 쑥쑥 커 오른 해바라기와 잡초들 사이사이의 들꽃들을 보며 화가는 여름 속에서 어떤 〈놀이〉로 신명을 얻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유롭다. 오 십명 남짓한 작가의 작업실을 들어서며 그 자유로움이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화가 유휴열은 1970년대부터 전북지역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걸머쥐고 나온(? ) 작가다. 1948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대 미술교육과를 거쳐 작가로서 첫발을 내딘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역작가로 건강한 모습을 보여온 그는 40대를 넘어선 지금도 그의 창작활동에 대한 열정으로 청년작가의 새로움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작가로 비쳐진다.
1985년부터 1년 남짓한 뉴욕생활이후 서울서 가진 개인전(1986. 11. 아르꼬스모 미술관)으로 한국화단의 큰 관심과 호평을 받아냈고 그해서울미술관이 주관한 〈1986년 문제작가〉로 선정되면서 우리 미술문화의 건강한 발전을 이어가는 튼실한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은 그의 활동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재질(? )을 폭넓게 인정받았던 그는69년 전주 금란 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는데 인물 ·풍경 등을 주소재로 한 당시의 그의 그림을 기억하는 스승이나 선배화가들은 한 동안 그 의 작품이 추상쪽으로 돌아선 것을 안타까와하며 그때의 그림 돌에 대한 평을 꽤 오래까지도 들려줄 정도로
구상 쪽에도 그는 밝았었다. 표현주의에 심취했던 시기를 지나 70년대 초 추상미술에 다가서기 시작한 그가 71년 전주 명다방에서 가진 두 번째 개인전엔 그의 변모를 예고해주는 반 추상작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처음부터 구상보다는 추상쪽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소재나 주제 또한 보편화된 그것과는 거리가 먼, 특별한 것들이었다. 그가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던 중학교 시절에도 화폭에 담는 소재란 유별난 것이었다. 꽃 대신 새까만 빵굽는 기계가 그의 그림 속에선 더 아름답게 살아났고 공사장 풍경등 일상 속에서 버려진 사물과 풍경들이 실체화되어 드러났다.
그에겐 참으로 소중한 기억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그가 일하는 건강함이 끈끈하게 배어있는 빵 굽는 기계에 묘한 감동을 갖고 그려낸 그림이 교실 복도에 붙어 있을때인데 하루는 신석정 선생(당시선생은 전주고 교사로 있었다)이 그를 집으로 불러 그의 그림에 대한칭찬을 해주셨다.“너의 그림이 퍽 인상적이었다며 하시는 말씀이 ‘예술은 멀리 있거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진정한 예술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고 하셨어요. 당시엔 알듯 모를 듯했던 그 말씀이 내겐 소중하고도 가장 큰 깨우침이 되었지요.” 그 후로도 석정선생은 그에게 예술에 대한 눈뜨임을 주는 가르침과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자신의 첫 시집을 어린 제자에게 선물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었다.
삶의 즐거움보다 고통스럽고 절박한 상황에 맞닿았을때 창작에 대한 용기와 힘이 더욱 강렬해 진다는 그는 71년부터 5년 남짓한 동안에 교단교사로 지냈으나 직장을 벗어버린 후 철저하게 창작에만 매달리는 생활을 해왔다. 아파트 지하실,퀴퀴한습기와물감냄새가끈적하게배인 그 작업실에서 그는 삶의 절박한 상황을 몸으로 껴안으며 자유롭고 강렬한 표현의 세계와 만났고, 창작 정신의 용기와 힘을 응집해냈다.
그렇게 70년대를 보내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스스로 영원한 주제로 인식하고 있는 〈生一놀이〉를 창조해냈다. ‘이 시대와 사회의 물질문명의 발달에 의해 침식되고 파괴되는 인간성 회복’을 골 깊게 담고있는 〈生一놀이〉연작은 10년여 동안 줄 곧 그의 작업 한중간에 있는 요체가 되고 있다. 그의 〈生一놀이〉는「더러는 오랜 기억 속에서 꺼낸 사건들이고 읽혀진 책들, 간밤의 꿈들과 오늘밤 안고 싶은 꿈들」로 시작돼 현대사회의 인간과 그들의 삶을 농밀 하게 드러내는 강렬한 색채언어로 접합돼 비정형적인 화판을 가득 채워놓으며 그 신명을 풀어낸다. 현란한 색채 속에서 떠오르는 그의 〈生一놀이〉는 그러나 그 화폭이 담고 있는 화려하고 환상적 분위기와는 달리 거개가 고독하고 쓸쓸한 세계를 토해낸다. 그것은 현대인의 절망과 방황, 나약한 의지, 잃어버린 도덕성이 맞물려 있는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나의 그림의 소재와 재료는 바로 내가 서 있는 곳의 모습이고, 주변이며 버려지고 흩어져 있는 것까지를 포함한 모든 것이다. 일상(日常)에서 버려진 물건들, 진부한 것들도 애정을 갖고 애정을 쏟고 조형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생명을 갖고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우리가 갖고 있는 고식적 회화의 개념으로 챈다면 그의 그림들이 관객들로부터 제대로 이해 받고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예술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고 일정한 형식의 틀을 부수어 낸 그의 예술이 갖는 열린 형식의 진정한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겐 공감과 인식의 장을 제공할 수 있을것이란 확신은 설득력이 있다. 그의 작업에 대해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아 온 미술평론가 장석원은 「예술이 축제와 같다면, 그때의 축제는 역시 기쁨과 슬픔을 동반한 삶 전반의 것들을 제한 없이 수용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다. 유휴열의 작품은 예술과 삶의 문제를 무한대로 열어가면서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어떻게 나타나 보이는 가를 묻는 것이기에 한정된 방법론이나 의식의 틀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어쩌면 유휴열에 있어 예술행위는 삶을 확인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력을 획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85년부터 86년까지 1년 남짓한 기간동안 미국에서 생활했다.
그 이전인 82년엔 4개월 좀 파리에 머물기도 했다. 이 두 곳의 외유는 그에게 좌절과 자신감을 동시에 얻게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에 돌이켜보면 좌절은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에 의한 개인적인 위축감에서 비롯된 순간적인 것이었고 보다 큰 것은 자유로움에 대한 자신감과 힘이었다고 말한다. 그동안의 자기 그림은 만들려는 의지에 의해서 그려진 것이었다는 인식이 바로 자유로움에 대한 자신감과 이어졌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말처럼 뉴욕에서 돌아온 직후에 가진 서불 아르꼬스모에서의 개인전에선 그가 구가하는 자유로움, 열린 세계에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드러난다. 합판을 주제재로 한 비정형의 평면작품과 또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는 업체작품, 그리고 드로잉으로 담아낸 자화상까지 수많은 작품들이 가득 채워진 전시실. 2층 공간은 그가 자유롭게 표출해낸 형상과 색채가 혼합되어 새로운 또 하나의 생명력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일상적인 생활과 창작의 시간들을 따로 놓을 수 없을 만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해온 그지만 한동안 작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생활을 맞아야 했다. 자유로움을 구가하는 틈틈이 자기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더욱 치열한 창작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큰딸 가희(그에게는 국민학교 6학년인 가희와 2학년인 가림이 두딸이 있다)가 삶과 죽음의 한중간에 놓여있던2년 동안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충실하고자 했다. 딸의 대 수술과 입원을 치뤄내면서 生에 대해 새롭게 눈떴다는 그가 다시 본격적인 창작에 들어선 것은 3년이 채 못된다. 그의 희망이었던 딸이 투석과 정기검진으로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이 그 고통을 나눠가 질 수 없다는 상황이 너무도 절망스러웠을때 그는 붓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20년여 동안 그의 창작정신은 더욱 치열해져 세 차례의 개인전을 서울과 전주, 그리고 일본에서 가졌다.“절망스러운 그만큼 나는 삶의문제를 화폭속에서 무한대로 열어갈 수 있기를 열망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 동안의 작업은 더욱 강렬한 색채와 다양한 형상들로 채워졌고 소재 또한 천조각과 나무, 폐품에 이르기까지 난삽한 이 물질들로 이어지고 풀어졌다. 장석원씨의 평처럼 그것은 「삶에 관한 리얼리즘적 접근방식이나 모더니즘의 방법론적 문제제기가 통하지 않는」 “삶과 예술의 일체성”올 향한 가능성으로 보여지기에 족했다.75년엔가 몇몇 선배 ·후배들과 함께 마련한 〈물꼬전〉을 시작으로 이 지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해온 그는 금년 봄부터 작은 화랑(전주시중앙동 얼화랑)올 맡아 운영하고있다. 경제적 부담을 혼자 짐 지면서까지 그가 맡고 나선 이화랑은 젊은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북 돋는 자리로 정착되어가고 있는데 그는 자신이 열심히 그려낸 그림이 때로 좋은 주인(?)올 만나고 또 그로 인해 후배들에게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긴다.
그는 이즈음 바쁘다. 그의 20여년 창작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업실은 발 들여 놓을 틈 없이 번잡하다.“l0월 1일부터 일본 아마노 화랑

에서 개인전이 있고, 내년엔 서울금호 미술관 초대전이 계획돼있어요. 요즈음 캔버스를 합판에서 FRP로 새롭게 바꿔보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재미있는 것이 나올 것 같아요.”그의 자유로움이 빛을 낼 수 있도록 지켜주면서 때로는 가장 호된 비평가도 되어주는 화가의 아내(그의 아내 최명순은 전주 완산여상 영어교사로 있다.)가 조용히 웃었다.“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밀도 있게 접근할 수 있느냐가내 작업의 주된 과제예요”단순한 형식실험에 머물지 않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화가의 집을 나서는 길, 널찍한 앞마당에 엉켜있는 잡초와 그의 손길을 받은 해바라기와 초목올 보며 일전 어느책 에선가 밝혔던 그의 글을 떠올렸다.‘압축되고 이지적으로 다듬어진 화면이 훨씬 멋있어 보이지만 잘 못 그려진 비현실적인 형태의 일그러진 형상, 내키는 대로 그어진 선, 붓자국, 효과 없이 칠해진 부정적인 색채들 그런 것들을 나는 소중히 간직한다. 그것은 없어 보이는 것처럼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없으며 불분명한 것이 더욱 선명하게 고정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화가 유휴열은 전주와 서울 뉴욕·일본 등에서 1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임팩트아트패스티벌, 칸느국제회화제, 1986문제작가작품전, 80년대 한국미술의 위상전, 오늘의 지역작가전등 국내외의 각종기획전에 출품, 87년엔 예술평론가협회가 제정한 최우수작가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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