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서 백제문화에 대하여 몇몇 유적, 유물을 통하여 살펴보았으며 백제이후의 문화유적에 대하여도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접근하였다.
여기에서는 백제문화의 특질을 보다 잘 파악하기 위하여 미륵사지와 황룡사지롤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두 사지의 창건 배경과 가람배치, 그리고 두 사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그 차이올 살펴보겠다. 그리고 그에서 드러난 백제문화의 특질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두서 없이 접근했던 결과를 모두 정리하여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이 지역 민중문화에 그 같은 특성이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고창 선운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미륵사와 황룡사의 창건설화
미륵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제에서 가장 큰 사찰로 그 전모가 1980년 이후의 발굴조사에 의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미륵사지의 창건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맛동( 童)과 관련된다. 오금산에서 홀어머니와 마를 캐어 먹고살아서 맛동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신라의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신라 서울에 가서 공주를 데려오는 얘기는 서동요라는 향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뒤 왕이 된 서동이 왕비와 더불어 사자사를 찾아가다가 용화산 아래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연하므로 그를 위하여 절을 짓고 미륵사라고 하였다고 하며 이 서동을 무왕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미륵사를 짓게된 것은 무왕이 왕위에 있었던 600∼640년사이의 일로 추정되며 발굴조사에서도 7세기 초반으로 생각되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를 방증한다. 황룡사에 관계되는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있다. 이에 따르면 진흥왕 14년(553년)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절로 고쳐짓게 되어 566년에 완공되었다. 그 후 진흥왕35년에 장육존상이 만들어지게 되고 다시 10년 후인 584년에 중금당이 완공되었다. 장육존상은 신라의 동해안에 배 한 척이 도착하였는데 그 배에는 서천축(西天竺)의 아육왕(阿育王)이 석가상 3구를 만들려했으나 못 만들어 쇠와 금을 보내니 인연있는 곳에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공문과 불상의 모형이 있어, 신라에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장육존상과 그를 모시는 금당이 만들어진 다음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의 건의를 받아 9충 목탑을 만들게되었다. 목탑은 백제사람 아비지를 초빙하여 기술지도를 받았으며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완공되었다.
목탑을 세우게 된 것은 이 탑을 세우면 신라의 이웃나라들이 항복을 하고 신라가 9한을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며 탑의 높이는 80m이고 자장이 당에서 가져온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어쨌든 이 목탑이 완공된 이후의 황룡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라 최대의 사원인 것이다.
미륵사와 황룡사의 창건에 얽힌 설화에서는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2가지 점만을 언급하겠다. 첫째 창건동기가 미륵사의 경우는 미륵삼존이 나타났기 때문이며 황룡사는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 절로 바꿔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못에서 미륵이 나왔다거나 황룡이 날았다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며 이에는 그 같은 신비로운 일을 통하여 반영하고자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미륵사의 창건에 대하여는 이미 몇 차례 말한 바와 같이 미륵신앙을 통한 왕권의 강화, 또는 마한 잔존세력에 대한 회유라는 점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왕 자신도 미륵에게 예배를 드리는 신자로서의 성격을 보인다. 이점은 무왕의 아버지인 법왕이 일체의 사냥, 어로 도구를 버리라는 금살령을 내리는 것에서도 분명한 것으로 왕도부처 앞에서는 일개 신도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계율을 지키는 존재인 것이다. 황룡사의 경우는 궁궐을 짓다가 절로 바꾸게 된 점에서 당시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일천한 신라왕실에서 새로운 절을 짓는 것에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왕실에서 불교를 진흥하기 위하여 절을 짓는 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고, 그 반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황룡의 출현을 핑계삼아서 황룡사라는 절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세력에서 절의 건립을 반대한 이유와 책략을 동원하면서까지 왕실에서 절을 건립한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있게 된다.
두 번째로 미륵사와는 달리 황룡사가 일시에 이루어지지 않고 오랜 기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미륵사는 대체로 무왕의 재위기간 중에 완공되었음에 비하여 황룡사는 법흥왕대에 시작하여 선덕여왕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가람이 완성된 것이다. 이는 두 사원 건축에 있어서 미륵사와는 달리 황룡사의 건축에는 어려움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황룡이 나왔다하여 지었던 사원을 보다 크게 확대하는 과정에서 아육왕이 쇠와 금을 보내 장육존상을 만들게 되었다는 점은 실제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반대세력에 대한 명분으로 파악된다. 장육상을 만들면서 동시에 그 불상을 모실 건물을 짓지 못하고 그 후에 중금당을 지어 장육상을 모시는 것에도 그 같은 사정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점들은 목탑을 건립하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즉 목탑의 건립이 그를 통하여 주변의 나라들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9한이 조공을 하게 된다는 이유로 추진되는데 이는 황룡사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하여 조영되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이 사원의 건립 배경이었음은 미륵사지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미륵사의 경우는 신도인 왕이 민심을 수렴하는 방안으로 창건한 것임에 대하여 황룡사는 주변세력을 항복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반발이 자체 내에서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얼핏 신라에 비하여 백제가 보다 강화된 왕권을 가지고 미륵사 조영을 추진한 것처럼 보이나 달리보면 미륵사의 조영애는 이를 반대하는 입장의 세력이 없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면 황룡사의 경우 조영을 반대한 세력은 누구인가? 이 문제는 황룡사의 건립을 통하여 이익을 침해받는다고 생각하는 집단일 것이며 왕권과 대립되는 입장에 있는 지배계층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황룡사의 조영이 왕권의 강화와 직결되었을 가능성을 뜻한다. 황룡사가 왕권의 강화와 연결되는 점은 신라불교의 특성에서 찾을수가 있다. 신라불교에서는 왕이 부처와 직결되는 존재로 왕이 곧 부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왕이 부처라는 관념은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명왕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와 같은 백정이며 왕비는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다. 따라서 그의 아들은 석가모니가 되는 셈이 되는데 딸만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석가모니의 출현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왕이 부처라는 인식하의 불교는 왕권을 불교에 대한 믿음으로 통하여 자연스럽게 강화할 수 있으며 불교신도인 일반 민중은 부처를 위하듯 왕을 위하여야 되며 왕을 위하여 죽는 것은 부처의 세상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고급 이념체계인 불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인식하지 않고 정치적인 지배자인 왕과 종교적 지주인 부처를 동일시하는 이 같은 신라불교의 특성은 신라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문화수준이 제정일치 사회 단계를 극복하지 못한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 같은 사회단계에서 특권을 누렸던 집단들이 왕권의 강화를 통하여 자신들이 미분화된 사회에서 누리던 정치적, 경제적, 원시주술적인 특권을 위협받게 됨으로서 황룡사의 조영과 같은 불교의 강화를 반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자신이 불교신자였던 백제의 왕과는 다른측면이며 기본적으로 신라의 불교가 가지는 한계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같은 호국적 성격이 강한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아우르는 원동력의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2. 가람배치와 조영
미륵사의 가람은 소위 1탑 l금 당식의 가람이 3곳에 마련된 것으로 이를 3운 병립식 가람배치라고 한다. 즉 중앙에 목탑이 있고 그 북쪽에 금당이 있는 중원이 있고 그 동, 서쪽에 각각 석탑과 금당이 있는 가람 배치양상을 보인다. 이에 대하여 완공된 황룡사는 목탑이 중앙에 있고 그 북쪽에 금당이 있으며 그 금당의 동, 서쪽에 다시 금당이 있는 형태로 이를 1탑 3금당식 가람이라고 부른다. 통합적으로 생각할 때 두 사지에서 모두 금당이 3곳에 마련되어 있는 점은 같으며·단지탑이 미륵사지에서는 3곳에 있는데 비하여 황룡사지에는 1곳에만 탑이 있는 점이 다른 셈이다.
미륵사지의 이 같은 가람배치는 미륵이 이 세상에 와서 행하게 된다는3번의 설법을 위하여 별개의 가람을3곳에 마련한 것으로 설명된다. 이와는 달리 황룡사지는 금당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목탑을 만들었으며 그 시기는 미륵사의 완공보다 얼마간 늦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미륵사지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목탑 또는 전탑에서 벗어나 석탑이라는 독자적인 탑을 건립하고 있다. 이 석탑의 건립은 같은 사찰내에 그보다 규모가 큰 목탑이 존재하고 있는 데에서 분명한 것처럼 기술의 부족에 의한 것이 아니며 외래문화를 수용하여 독창적인 문화를 창안한 결과이다. 황룡사의 경우는 그 같은 독창성을 찾을수가 없으며 가람배치에서도 같은 형태의 1탑 3금당식 가람은 고구려나 백제의 사원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인 것이다.
신라에도 삼국통일 이전의 석탑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황룡사 인근에 있는 분황사에는 모전석탑이 존재하고있다. 그러나 분황사 석탑은 전탑이 벽돌을 사용한 것임에 대하여 돌을 벽돌처럼 잘라서 만든 석탑이라는 점에서 전탑의 모방일 따름이며 석재를 이용하여 새로운 양식의 탑을 창안한 것으로는 볼 수가 없다. 이처럼 주어진 문물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여 자신의 문화를 만드는 것은 문화적 역량에 기인하며 동시에 백제 지역이 가지고 있는 문화환경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점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 지역에서 파악되는 특성의 하나인 것이다.
3. 불교 신앙적 차이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미륵사와 황룡사 사이에는 적지않은 차이가 있으며 이는 두 사원이 신라와 백제라는 집단의 문화가 결집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두 집단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창건 설화에서 분명한 것처럼 황룡사는 그 창건 자체가 왕권의 수호, 또는 왕권의 강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음에 대하여 미륵사는 신자로서의 왕이 미륵이 3번의 설법을 행하도록 조영한 것이다. 이는 신라의 불교가 호국불교이며 왕을 중심으로 하나를 이루는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것임에 대하여 백제의 불교는 미륵신앙이 큰 줄기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미륵신앙은 억합 받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복음이며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신앙형태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처음부터 왕권과 결탁된 신라의 화엄사상은 지배충의 종교이며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이론체계로서 가능한 것이다. 민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미륵신앙은 고급의 이론체계를 갖춘 미륵상생이나 미륵성불경과 같은 본래적 미륵신앙보다는 미륵 하생경에 바탕을 둔 미륵신앙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특히 백제가 멸망한 다음의 미륵신앙은 더욱 그 같은 속성이 강화되며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대두되는 정토사상과 결합됨으로서 현세부정적이고 염세적이며 동시에 현실세계에서 복을 받고자 하는 현세 구복적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된다. 이점은 금산사에서 이미 얼마간 언급한 바가 있으며 그 같은 성격이 조선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남아있게 되었는가를 장을 달리하여 선운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