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는 이름그대로 빼어난 자연경관 속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대웅전, 지장보살좌상, 금동보살좌상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또 선운사 두시편의 동백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선운산의 자연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선운사의 주변에는 특징적이라 할 정도로 많은 암자, 사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적기에 기록된 암자만도 30여곳에 이른다. 사적기에 의하면 지금은 참당암이라는 암자가 있는 곳에 본디 대참사라는 선운사에 버금가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1.창건설화와 주변 사찰
사적지에는 대참사와 선운사의 창건에 대하여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을 요약하면 선운사는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라나 이곳 선운산에 와서 머물러 있는데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깨치고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이곳에 중애사(重愛寺)등과 더불어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 선운사의 창건과 달리 대참사의 창건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현재 도솔암이 있는 곳의 앞에 법화굴이 있는데 그 법화굴에 신라 의운화상(義雲和尙)이 머물며 수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산아래의 포구에 한척의 돌배가 왔는데 배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 마음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가까이 가면 배도 물러갔다. 이를 의운화상에게 알려 그가 제자들과 더불어 포구에 가자 돌배가 다가왔다. 배안에는 불경, 석가모니불상, 나한상 등이 벌려져 있고 한 금인(金人)이 배위에 서있었다. 금인은 오른 손에 옥으로 만든 돛대를 잡고 비단 돛을 펼치고 있었다. 의운화상이 그와 더불어 불상틀 등 모실 것을 의논하였으나 마땅한 도장(道場)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그 금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자신은 우전국(于전國)왕인데 불경과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의 지세를 살피니 대참(大懺)의 氣가 있고 용당(龍堂)의 氣가 하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과 불경을 모시도록 하라고 의운화상에게 말하였다. 이에 의운화상이 금인으로부터 불경, 불상, 산가치, 나한상, 보인 등을 받아 이 산에 진흥왕의 도움을 받아 절을 짓고 대참사(大懺寺)라 하였다.
또 대참사의 남쪽에는 도솔암이 있는데 도솔암은 층암 절벽이 둘러있으며 절벽위에는 수백명이 앉을 만한 넓은 바위가 있어 만월대 또는 칠송대라고 한다. 이 만월대 또는 칠송대의 아래로 깎아지른 절벽에는 구멍이 있고 그 구멍에 쇠기둥이 있다. 또 절벽에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미륵이라고 하며 이 미륵불의 바깥으로는 몇 층의 집을 지어 불상을 모셨다고 하며 집을 짓기 위한 구멍들이 절벽 곳곳에 남아있다.
이외에도 선운사를 둘러싼 산줄기에는 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으며 그중 개태사(開泰寺)와 수다사(水多寺)는 옛날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살면서 그 아래 검단마을 사람들에게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 곳이라고 한다. 검단마을 사람들은 소금을 만듦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선사의 은덕에 감사하여 이후 선운사에 소금을 드렸다고 전한다. 검단 선사에 대하여서는 그가 통일신라때 금마에서 출생한 진감국사(眞鑑國師)라는 설도 있으며 마애불에 도참비결을 숨겨둔 장본인이라고 전한다.
2.도솔암 마애석불
선운사 도솔암 옆의 마애미륵불의 배꼽부분에는 검단선사, 또는 용당선사(龍堂禪師)가 숨겨두었다는 비결이 있었다고 한다. 이 비결이 세상에 나오게 되면 한양이 망한다고 하며 그것을 꺼내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도 비결이 벼락살과 같이 봉해져 있다고 하여 벼락이 무서워 꺼내지못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조 말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나기 2년전 고창을 중심으로한 지역에서는 동학도들이 그 비결을 꺼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이 소문에 민심이 동요되자 손화중 등의 동학도들이 선운사 중들의 방해를 뿌리치고 그 비결을 꺼내게 되었다.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민심이 더욱 흉흉해지고 이에 무장현감은 비결을 꺼낸 동학도 들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그들중 두령들에게는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자 체포되지 않은 동학두령들은 무장지방의 동학도들을 이끌고 무장읍성에 몰려가 비결과 사형선고를 받은 동학두령의 교환을 요구하였다.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무장현감은 그 교환에 응하였는데 세상에는 그 비결이 가짜이고 진짜는 동학 두령중의 하나인 손화중이 가지고 잠적하였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미륵신앙과 직결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도 우리 민간에 전래되고 있는 아기장수와 말발자욱설화 등과 관련되는 것이다. 즉 미륵불의 배꼽에 비결이 숨겨져 있고 그 비결이 세상에 나타나면 한양이 망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비결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기장수가 나타나서 얼마간만 지나면 아주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는데 그러기 직전에 기밀이 누설되어-또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그의 출현이 좌절되고 이에 그가 타고 다니기로 예정된 말이 슬피울며 하늘로 올라갔다는 식의 설화와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즉 세상을 바로잡아줄 사람, 도는 사건의 등장을 기대하는 심리가 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마애불의 배꼽부분에는 구멍이 있으며 이것이 현재는 봉해진 상태인데 동학도들이 비결을 꺼내면서 벼락살을 이미 피했기 때문에 이제는 위험이 없는 셈이다. 미륵의 배꼽부부네 있는 구멍을 비결을 모신 곳으로 보아야할 것인지 아니면 불사건립과 같은 실용적 기능을 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일반 민중들이 마애불을 미륵이라고 인식하였고 그 속에 비결이 들어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또 그 비결이 등장하기만 하면 한양, 즉 조선이 망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정감록을 믿는 것과 같은 식의 염원이며 조선왕조를 망해버려야될 왕조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비결을 동학도들이 꺼낼것이라는 소문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동학도들이 이를 꺼냈다고 하는 점이다. 그 소문의 진원지가 중앙정부와 관련된 조직이 아님은 왕조의 부외로 인하여 아무런 이득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받는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그러면 그 진원지가 전해지는 말대로 동학도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이 그저 민간들 사이에서 찾아야 하거나 아니면 동학도들에서 찾을 수가 있다. 민간에서 그 같은 발상을 했다면 동학도나 그 세력을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마련해줄 수 있는 집단으로 인식하고 빨리 그 같은 세상을 이루어주기를 기대하여 퍼트린 것으로 생각될 수가 있다. 이점은 당시 조선왕조가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 모순에 의하여 피지배계층에서는 충분히 가질법한 생각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런 동기가 낌새 없이 그 같은 소문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자칫 그 같은 소문은 대역죄에 해당되어 처벌을 받을 수 도 있다는 점에서 동학도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퍼진 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같은 소문은 동학도들에 의하여 유포되고 그 소문이 널리 퍼진 다음 어쩔 수 없이 비결을 꺼내게 되었다는 것을 합리화하는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동학도들이 비결을 꺼냈다는 것은 자신들이 비결에서 말하는 한양을 망하게 하는 주역임을 자처하는 것이 되며 이는 조선 왕조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문이 어떻든 동학도들이 조선왕조에 대해 도전할 생각이 없었다면 그 비결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결을 꺼낸 것은 그 비결을 빌어 조선왕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이며 그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그 같은 비결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비결을 꺼낸 이후 민심이 동학에 몰리게 되고 심지어 선운사 중들과 무장현의 아전들까지 동학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것은 미륵불에서 꺼낸 비결이 민심을 규합하는데 대단히 유용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살펴본 미륵신앙, 특히 하생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3.미륵하생신앙
미륵사지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에서는 미륵신앙이 매우 보편적으로 신앙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 신앙이 민중에게까지 보편적인 것이었는가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백제 지역, 특히 전라도지방의 경우 농경과 관련이 깊은 용신앙과 미륵신앙이 결합됨으로써 민중에게도 일반적인 신앙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 후 금산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지역에 사고 있던 민중들간에는 주술적 속성을 지닌 미륵하생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일반 민중에게서 볼 수 있는 불교의 양상은 크게 미륵신앙과 아미타신앙으로 나눌 수가 있다. 이 두가지 양상 중 미륵신앙은 백제가 자리하고 있어서 지역에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이는 우리나라에 산재한 미륵불중 많은 수가 이 지역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이에 비하여 신라가 있었던 지역에는 아미타신앙이 보다 우세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미륵하생신앙과 아미타신앙을 비교하면 전자가 후자에 비하여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속성을 지닌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아미타신앙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욈으로써 극락정토에 갈 수가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염세적으로 현실부정적인 속성이 보다 강하다. 즉 극락정토에 갈 수가 있다고 한다면 되도록 발리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내세에서 다시 맞지 않기 위해서는 부처에 귀의하는 것이 첩경이므로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처자식을 부양하는 것과 같은 의무를 버리고 깊이 은거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미륵하생신앙은 미륵이 이 세상에 나타나 이 세상을 극락으로 만들 것이므로 굳이 죽음을 열망할 필요가 없이 미륵의 출현이 있을 때까지 묵묵히 고통을 참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륵하생신앙은 정통 미륵신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피지배계층에게는 희망의 종교이자 믿음인 것이다.
아미타신앙에 비하여 적극적인 미륵신앙의 현실 긍정적 측면에서 현세를 미륵이 제시한 세상에 가깝도록 만들려는 노력이 자칫 미륵하생신앙을 개혁적인 것이 본질인 것처럼 인식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민중의 미륵하생신앙이 오도될 때에는 더욱 강조되는 속성으로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하여 미륵하생신앙을 지닌 민중을 끌어들인 경우나 이미 살펴본 갑오농민혁명전쟁과정에서의 검단선사 비결과 같이 정치적 목적의식을 가진 지도자의 의도가 민중이 지닌 미륵하생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비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미륵하생신앙은 현실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그를 개선하고 미륵의 출현을 기다리는 희망에 본질이 있는 것이지 혁명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선운산 주변에 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으며 검단선사가 소금을 굽는 법을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는 점에서 전남 화순 운주사처럼 종교적인 결사를 상정할 수도 있으나 이는 또 다른 글이 될 것이다.
4.맺는 말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몇몇 유적, 특히 전북지역의 유적을 중심으로 백제 문화의 본질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료의 부족이라든가 기존의 연구성과가 부진하다는 등의 핑계를 대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필자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으로 처음 의도했던 것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백제문화가 지닌 기본적인 속성으로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창의력, 하나의 규칙성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미륵신앙 특히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미륵하생신앙이 자리하고 있었음에도 알아보고자 하였다. 또 그 같은 미륵신앙은 백제왕조에 들어서 불교의 유입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이 지역에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민중신앙과 결합되었고 백제가 망한 이후에도 이 지역의 민중들이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바탕으로 작용하였음을 밝혀보려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의도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지면만을 어지럽힌 결과를 보이고 말았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그간의 횡설수설, 필자의 게으름과 재능없음을 모두어 사과드리는 것으로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