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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0 | 칼럼·시평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국두」
박현국, 전북 이리시 신동 청솔아파트 5동 855-9678(2004-01-27 16:35:26)

그간 장감독의 영화로서 '붉은 수수밭(紅高량)'을 본적이 있어서 이번에 그의 영화로 '국두'가 소개된다기에 보게 되었다. 국두는 몇가지 점에서 붉은 수수밭과 유사점이 있으면서 대조가 되는 좋은 작품이었다. 두 영화를 서로 비교하여 붉은 수수밭이 일제의 중국침략이라는 역사의식을 바탕에 깔고 한인간의 처절한 운명을 그려냈다면 국두는 역사의식보다는 한인간이 본능적 욕구와 인륜 사이에서 어떠한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이 이뤄내는 처참한 인간 고뇌를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작품이 모두 진한 묽은 색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전자가 자연의 빛에 의한 황혼이나 넓은 평원에 시어진 붉은 수수밭이 이뤄내는 자연의 붉은 빛이라면 후자는 염색공장을 무대로 붉은 색으로 물들인 긴 천을 높다랗게 걸어놓고 말리는 모습이나 옷감에 물을 들이기 위해서 물감을 풀어놓은 큰 물웅덩이의 붉은 빛이 강조된다.
국두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로 나이 많은 숙부에게 팔려와 후사를 이으려는 숙부의 온갖 성폭행에 시달린다. 그런데 이때 국두는 조카의 출현으로 조카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국두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숙부는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줄 안다. 결국 숙부는 하반신을 못쓰게 되어 국두와 조카의 도움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중 숙부는 아기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고 조카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어 아이를 살해하려고 시도하는데 그간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않던 아이가 그때 아빠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숙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잘돌보며 아이 역시 커나갈수록 아빠의 수레를 끌면서 같이 잘 논다. 그런데 이 아기가 수레를 잘못 끌어 불구의 아빠가 물감을 풀어놓은 물속에 빠져버린다. 아이는 처음에 물속에서 허부적거리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흥미로운 듯 웃는다. 죽어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웃는 아이의 천진스러움은 보는 이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결국 이 아이는 숙부와 국두와 조카 사이의 미묘한 불륜의 모습을 보고 어린 아이이지만 말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숙부가 죽자 마을 노인들은 숙부의 재산상속인은 아기(청백)이며 국두는 부도를 지켜 정절을 지키고 조카는 숙모인 국두를 도와 정절을 지키게 하라고 명한다. 이제 숙부를 장사지낸다. 청백은 자기아빠의 상여에 타고 장지로 향하는 장례절차를 치른다. 이때 국두와 조카 청천은 가는 상여를 막으며 49회의 통곡을 한다. 청백은 상여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다.
청백은 성장해갈수록 청천과 국두의 불륜을 못견디게 역겨워하며 반항한다. 청천과 국두는 다른 곳을 도망하려 하나 그것도 마땅치 않아 실현시키지 못한다. 결국 청천과 국두가 지하실에서 살을 섞고 자살을 기도 했을 때 청백은 두 사람을 찾아낸다. 그는 어머니인 국두를 등에 엎어 어머니의 침실에 눕히고 청백을 끌어내어 물감을 풀어놓은 물속에 던저버린다. 그러자 청백이 나오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때 청백의 나오려는 기도를 봉쇄하여 죽여버린ㄷ. 이때 위층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국두가 기어내려오면서 청백에게 소리치지만 청백은 끝내 청천의 기도를 차단시켜버린다. 결국 국두는 염색공장에 불을 질러 불태워 버린다.
인간이 인간과 살을 섞고 정을 통하고자 발버둥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에는 어떤 형태로든 분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현실에는 윤리규범이 자리잡고 있어서 인간의 본능적이고 천부적인 원리가 좌절되기 일쑤이다. 그래서 현실의 윤리규범과 인간의 본원적인 뜻 사이에서 오는 괴리가 곧 비극의 씨앗이 영화는 좁은 배경과 세명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그러한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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