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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0 | 특집 [특집]
"불평등함"에 대한 몇가지 단상
김영재·전북대교수(2004-01-27 16:38:26)

풍요로운 세상이 되면 불평등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우리는 흔히 가난하게 성장한 아버지가 그 가난함을 내세워 아들을 교육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나는 말이다. 너만 할 때 읍내 중학교까지 하루면 들길 산길로 해서 왕복 오십리씩 걸어다니며 공부를 했다. 하숙? 하숙은커녕 자전거 탈 형편만 되었어도 공부에 도움이 되었을 게다. 하루에 학교 오가는 데 서너 시간씩 빼앗기고 나면 지쳐서 언제 책 볼 시간이 있었겠니? 글쎄, 네게도 지금 불만이 있다고?"
아버지는 어린 시절 집안 식구들이 잠든 틈에 책상도 없는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 호롱불 빛에서 그을음으로 코가 새까맣게 되면서 숙제했던 일까지 들추어내며 훈계하지만 아들에겐 전혀 감동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투의 훈계를 한철에 한번씩은 들어왔기 때문이다. 수학 점수가 안 좋아 걱정인데도 다른 아버지들처럼 개인지도를 받게 할 수 없는 아버지가 불만스럽고, 새벽이면 신문을 읽느라 화장실을 독차지하여 집식구들을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하면서도 화장실이 둘있는 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을 전혀 세우고 있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어느 사회에든 불평등하다는 인식은 있게 마련인, 어쩌면 완전히 평등한 유토피아의 수립은 인간의 꿈일런지도 모른다. 설혹 그것이 실행된다 해도 그 사회는 자칫 전체주의적 "결함사회"(Dystopia)가 될 가능성이 많다.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으며, 물질의 욕구가 충족된다 해도 정신이 요구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그 욕구가 넘칠 때 누구나 불평등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아들의 불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옛날에 비해 훨씬 풍요로워진 현실이 고마워, 할말 있어도 국 참으며 주어진 직장 일을 열심히 하는 아버지 역시 서울 바자들의 알라스카 곰 사냥 여행 뉴스를 듣고서는 세상 참 불평등하다고 한숨을 쉬며 살맛나지 않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려 새로운 각오를 할는지도 모른다.
칸트는 이러한 불평등을 "악은 물론이고 선의 풍성한 근원"이라고 말하며 불평등의 인식으로부터 인간의 좌절이 아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불평등의 인식은 결국 평등을 쟁취하려는 활력소를 얻게 하여 오히려 세상을 한판 팔 벗고 뛰어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평등도,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그러하듯 그것이 강한자, 억누르려는 자, 혜택을 받은자 혹은 지배자에게 이용 되어질 때에는 철저히 "악의 근원"이 되고 만다. 불평등이 악의 근원으로 나타나는 양상은 다양하겠으나 대게세가지 유형으로 나누너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지배계층이 피지배층들에게 자신들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불평등이 사라졌거나, 아니면 아예 없는 것이라는 환상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불평등의 골을 가능한한 메워보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양심 대신 부패한 사회의 지배층들은 그것이 어떤 연유, 혹은 위대한 통치의 마술에 의해서 그 사회로부터 사라졌다고 피지배층으로 하여금 믿게 한다. 이 방법은 사악하기에 앞서 어리석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환상의 마력도 특권을 누리는 지배층들의 추한 모습을 끝가지 감추어 주지 못하며, "우리매하게만 보였던 민중"은 자신들과 지배층 사이에 극도로 버려진 불평등의 골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에 분노하여 혁명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 불평등이 사라졌다는 환상을 주는 방법이나 다를 바 없이 사악한 방법은 불평등이란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다는 허위 신념을 피지배층에게 설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로 제국주의 혹은 팽창주의 지배층들이 피지배층들을 신앙심의 포로로 만들어 인간은 죽으면 동등하다는 "선한 신의 뜻"을 주입시키는 방법이다. 그들은 설혹 사회에 불평등한 현상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한밭 연극에서의 신분 차이나 다를 바 없는 허상이라고 믿게 한다. 그들은 이백여전 디데로가 그의 '사회'라는 글에서 비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피지배층들을 설득한다.
"연극의 등장 인물들 사이에 불평등이 없듯이 실제 인생에서도 서로 다른 지위 사이에 불평등이 없다. 극이 끝난 뒤에 모든 배우들은 다시 같은 신분으로 돌아간다. 연극을 하는 짧은 시간동안에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방보다 신분이 높거나 낮다는 사실을 습득하지도 못하고 또 습득할 수도 없다."
죽은 뒤에 모든 인간은 평등할 것이기 때문에 불평등의 고난을 참고 견디라는 팽창주의 지배자들이 보내는 희망의 교시는 일종의 아편일 따름이다. 실제 인생은 연극처럼 짧지도 않을뿐더러 재미가 없다. 시간이 흘러 아편기운이 없어지면 피지배층들은 갑자기 성경을 들었던 지배자들의 손에는 자신들의 땅문서가 들어 있고, 땅문서를 들었던 자신의 손에는 성경만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평등은 저 세상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음 두 번째 유형은 첫째 유형과 달리 인간 사회에 불평등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기존하는 몇가지 불평등을 치유해주고서 다른 모든 불평등이 없어진 것인양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가령, 앞에서 이야기한 아들이 겪는 불평등을 아버지가 겪은 불평등과 비교하여 불평등이 아니거나 견딜만한 불평등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순하고 착한 아들이면 호롱불 대신 형광등 밑에서 공부하는 자신의 처지를 하늘의 뜻으로 알고 참고 견디기만 할 것이다. 이런 도식으로 불평등을 이겨내게 하는 사회에서는 대게 이런 말들을 듣게 된다.
"그들이 언제 껌과 커피를 먹어오았겄소? 칼라테레비? 지금 밥술이나 먹으면 없는 집이 없오. 농촌에 가보시오. 냉장고 사는 계 모임까지 있다고 합디다. 육십년대에 비하면 천국이구 말구요."
반상회에서 나올법한 소리들이다. 농촌 사람들이 냉장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갖지 않기를 바른 넋은 그들이 "발육부진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들은 냉장고의 시원한 김치를 즐기는데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땀으로 거둬들인 농산물이 적정가격으로 팔려 자녀들이 받고 있는 불평등한 교육여건을 개선하고 싶은, 더 정도 높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위생시설을 구비하여 도시의 부자들처럼 건강한 채 오래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사회의 불평등의 인식이 산업화와 더불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이 더 해감에 따라 깊어졌음은 역설이 아니라 순리이다.
셋째 유형은 불평등의 원인을 선천적인 것으로 돌리는 경우이다. 인간은 모듬살이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 역할의 차이에서 오는 불평등의 원인을 자연의 우열의 법칙과 연관시켜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가령, 미국의 백인들은 흑인들은 영원히 노예의 사슬에 묶어 놓기 위해 많은 생체실험을 통하여 그들을 "사람 같은 짐승"의 열등한 위치로 전락시켜버렸다. 백인의 피에 흑인의 피가 섞이는 정도에 따라 백인의 지능이 감소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생체실험 보고서는 흑인들을 노예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데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스의 사회구조가 노예와 여자가 피지배자로서의 역학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변한 그리스 지배층들은 그들이 노예와 여자들을 지배해야하는 타당성을 선천적인 자연법칙에서 구한 것이다.
지배구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인간 사회 구조의 불평등을 자연법칙화 하려는 지배층의 횡포는 우리 사회의 여러곳에서 크고 작게 행사되고 있다. 학력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하는 시골학교와 그 반대인 도시 학교의 내신 성적이 같아서는 안되다고 TV프로에서 주장하는 서울 어느 혜택 많이 받은 계층의 한 어머니에게서도 불평등을 자연법칙과 연관 시켜보려는 의도를 다소 엿볼 수 있다. 과목당기십만원씩의 기쁨을 넣어주는 서울의 "공부기계들"과는 달리 어쩌다 불운하게 지방에서 태어나 팔학군 학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달과 별과 나무와 들풀들과만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야 하는 "자연의 아들들"의 낮은 점수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단 한번이라도 제 자식 일처럼 뼈아프게 생각해본 어머니였으면 그녀는 사회구조적인 불평등함으로부터 받고 있는 "자연의 아들들"의 불이익을 정당한 댓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높은 점수 받는 자기 아들의 선천적 능력을 인정하고 있는 연유로 해서, 지방 학생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내신성적의 이점을 받게 하려는 문교부의 잔꾀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 탓할 사람이 그 서울 어머니 한 사람 뿐이겠는가. 아직도 후천적인 열악한 환경의 지방학교 학생들을 지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부 못하는 "멍청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하는 선생은 없는지, 혹은 자기 회사에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기업인은 없는지 옆을 돌아봐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지능지수란 주어진 문화적 맥락관계에서만 타당성이 있다."라는 원리조차 모르는 "멍청한 녀석들"임을 하루 빨리 알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남녀 불평등의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조선소 용접공들이 받는 처우에 대해서도 자꾸 아리스토텔레스적 사회 모델로부터 그 불평등의 타당성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법칙"을 "자연의 법칙"과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부당성을 지적하며,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이탈하면서부터 불평등이라는 "일종의 원죄"를 짓게 되었다는 루소에게 있어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란 악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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