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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1 | 특집 [특집]
전북의 실학자 ④이재 황 윤 석 (2)
하 우 봉·전북대교수(2004-01-27 16:41:22)

④역사·지리학 : <본조조종진전사실변(本朝祖宗眞殿事實辨)>, <월송황씨선적고(越松黃氏先跡考)>, 동국역대향년도, 동국지지략, 의중수동국여지승람예인, 금옥토석초목고, 온천초천급이적고 등과 『이수신편』제6권에서 이 분야에 관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그는 서구의 지리와 중국의 지리, 물산등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대의 사서와 지리서를 참고하면서 한국이 역사와 지리에 관해 깊이있게 연구하였다. 이 점에 대한 관심으로 하여 그는 동향의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과도 토론을 주고 받았다 한다. 또한 『자지록』에 수록된 <심의회통신제> , <부인회두제도설> 등은 한국복식제도사 연구에도 귀중한 참고문헌이다.
경세치용학 : 정치와 경제, 사회에 대한 제도개혁론으로는 『이수신편』의 <군도>, <치도>가 있다. 그러나 이 면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도덕의 근본을 우선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면서 제도적인 문제는 그 다음이라고 보았던 만큼,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이나 체계적인 개혁사상이 제시되어 있지는 못하다. 다만 위의 저술에서 그가 다방면에 걸쳐 통치의 근본을 밝히었다는 점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하겠다.
음운·국어학 : 이 방면에 관한 저술로는 <화음방언자의해>, <자모변>, <문자음의급자모고>, <운학본원>등이 있다. <화음방언자의해>에서는 과학적인 비교방법으로 우리말의 어원을 연구하였고, <자모변>, <운학본원>에서는 음운학적인 입장에서 훈민정음을 중국과 일본문자와 비교 하였다. 또 최세진의 <사성통해>를 참고해서 연구한 <통고사성도>도 학술적 가치가 높은 연구서이다. 음운학과 국어학에 대한 그의 연구는 여암 신경준의 그것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국어연구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의 연구는 우리말에 대한 적극적인 비교연구의 효시가 된다.
자연과학 : 이재가 서양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특히 홍대용과 교류를 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그의 서양 자연과학에 관한 관심과 연구는 <윤종기>라는 저술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자명종에 관한 연구서로서 현재 유일하게 전한다. 자명종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제작한 것은 전남 화순의 숨어있는 과학자 석당 나경적이었다. 이 작업에는 당시 나주목사의 아들이었던 홍대용이 제작비를 부담하였다하며, 홍대용이 나경적을 만난 이후로 자연과학에 심취하게 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자명종의 제작법과 도설이 기록되어 있는 『석당집』이 없어져 버린 지금 이재가 쓴 <윤종기>는 자명종을 처음 본후 비싼 값을 주고 자명종을 사들였따. 그리고 그 전체를 해부해서 관찰하고 자세히 구조를 기록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31세때 김원행문하에 들어가 홍대용을 만난 이후로 자명종과 지구의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는 혼천의를 제작하였다.
이재의 기록에 따르면 영조 42년 (1772)이재와 홍대용은 스승 김원행을 모시고 홍양군(지금의 홍천)으로 가 염영서가 만든 자명종을 구경하였다고 하며 홍대용이 천원군에서 농수각을 만들었을때도 함께 방문하여 천문기기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김원행, 홍대용 등 당시 석실서원의 분위기가 얼마나 실학적인가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함녀서 이재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알수 있게 해준다. 천문학에 대한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이재는 <선기옥형>이라는 천문학서적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혼천의에 대한 도설이 자세하게 나와있다.
3. 인간적인 면모
이재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이재는 나면서부터 체모가 비범하고 눈동자에 광채가 났으며,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았다고 <행장>에 전한다. 그는 남달리 학문에 취미와 정력을 쏟아 5살때부터 학문을 배운 이래 평생동안 책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었다 한다. 10세 이래 문장이 이미 숙성하였고, 13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하였다 한다. 또 그는 암기력이 뛰어 나서 한번 보면 바로 외어 쓰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하는데, 이 점은 그의 박학성과 저술에도 그대로 발휘되었다. 이재는 일찍부터 학문의 뜻을 과거시험에 대비하는 '과문'에 두지 않고 경학에 두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관념적인 성리학에만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찍이 '차라리 참된 사대부가 될지언정 가짜 도학자가 되기는 싫다'라고 하였다.
이재는 성품이 겸손하였으면서도 실질을 중시하였따.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항상 아는 채를 하지 않고 겸손하였으므로 영조가 '참으로 지식이 있고 실질이 있는 사람' 이라고 칭찬하였다. 한번은 영조가 신경중과 함께 불러 다같은 재사를 한 사람은 늦게 알게되어 등용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고 말하였다 한다.
그의 인품과 기절을 잘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이 있다. 영조 49년(1773,공45세) 당시 집권층과 신경준 등의 천거에 의해 특별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이재는 답안지에 왕의 잘못에 대해 비판하였고 또 별시를 남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한다. 그 답안은 시관들에 의해 왕에게 올라가지도 못하였고, 이재도 등용되지 못하였다.
천성적으로 학문을 좋아한 이재는 평생 관직에 별 뜻이 없었다. 38세 이후 천거에 의해 관계에 나갔지만 부친의 명에 순종하고 경제생활을 부양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관직생활중에도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고 실학자들과의 교류를 더 즐거이 하였다. 광직이 없으면 조용히 학문을 닦는 것을 천직으로 알았다. 여러번에 걸쳐 천거를 받았으나 벼슬기렝 나아가리를 사양하였다. 그는 평생 많은 교우를 사귀었으나 모두 학문적으로 맺어진 인물들이었고, 그것도 대부분 실학자들이었다.
물질이나 공명심도 그의 안중에는 없었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있을 때 스승 김원행의 아들이자 친구였던 김이안이 이재로 하여금 고암서원의 강장이 되게 하도록 힘쓰겠다는 편지를 받고, '선비의 형식보다 실질을 존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내 다시 무슨 힘을 가질 것인가'라면서 거절하였다 한다.
4. 이재 학문의 의의
이재 황윤석에 대한 연구는 이제 출발단계에 있다고 할수 있다. 그의 수많은 저작들이 아직 다 정리도 되지 못한 상태에 있으며, 하나하나의 주제에 대한 연구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 전체의 성격과 의의를 평가하기에는 현재의 연구가 너무 빈약한 단계에 놓여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알려진 바를 통해서나마 그의 사상의 특성과 학문적 업적이 지니는 의의를 생각해 보자.
60여생을 학문연구에 바치고 백과전서파로서 방대한 저술을 남긴 이재의 학문과 사상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그는 당대에 이미 박학다식한 박물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정조 6년(1782) 조정에서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각 부문별로 적임자를 선임한 뒤, 이재는 전체를 총괄하여 책임을 맡길수 있는 인물로 천거를 받았다. 그는 당시 음직에 있었기 때문에 법률상 자격미달이라고 하여 등용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해박한 지식은 이미 널리 알려지고 평가를 받았음을 알수 있다.
또 이재의 산학에 대해서는 당시 산학의 대가인 이자경도 탄복하였따. 이재의 독특한 이론인 입천원일법에 대해 평하면서 '아주 정밀하여 당세에 견줄 사람이 없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칭찬하였다한다. 이재는 당시 유학자들이 중인들이나 하는 '잡학'이라고 천시하던 산학과 자연과학에 대해 그것이 인간생활에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고 탐구하여야 한다는 실학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탁월한 업적들은 모두 이러한 그의 투철한 실학정신의 산물임은 물론이다.
이재 황윤석은 호남실학의 거두로서, 또 한국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재가 63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조진택이 만사에서 그를 평하여 '호남의 인물을 볼 때 하서의 도덕이 가장 높았는데 오직 황공만이 그 자리에 따르며 박문약례의 학행은 같은 경지에 있다'라고 칭송하였다.
이재 학문의 특징은 성리학과 실학을 동시적으로 지향했다는 점이다. 성리학적 측면에서도 상당히 깊이있는 연구를 하여, 당시 기호학파 안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던 '인물성동이론'에 있어서도 일가견을 가지고 논쟁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면모는 18세기 중기 실학사상의 특징이라고도 할수 있다. 성리학 자체를 철학적으로 탈피 내지 극복해 나가는 단계는 18세기말 내지 19세기 전반기 정약용이나 최한기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해 진다. 한편 이재의 학문, 사상체계는 얼핏 볼 때 체계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그의 철학사상과 과학사상이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연결된 것 같지 않다. 『이수신편』이나, 『이재난고』등의 저술은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으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이익의 『성호사설』,안정복의 『잡동산이』,오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와 같은 백과전서류의 일종으로서,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체계없이 나열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유형원의 『반계수록』이나 정약용의 일연의 저작들과는 대비가 된다. 또 사회개혁론에 있어서는 일부 기록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약한 편이며, 이재 스스로도 제도개혁을 별로 중요시 하지 않았다. 이 점 호남실학의 전체적 성격과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숙제거리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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