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회 '전북의 장승과 성신앙'이라는 주제의 백제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음 기행의 주제는 '전북지역 카톨릭 수난의 발자취'라는 것을 들었다. 신실한 신앙을 지녔다고는 자신 못하지만, 크리스챤으로서,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천주교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전해졌는지 알고 싶었던 차였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다음 기행에도 참가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9월 23일이 다가오면서 나는 한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9월은 천주교의 전례상 한국에서 배출한 103위 성인을 lflrl 위한 '성인성월'로 각 성당에서는 성지 순례를 계획하였는데, 바로 기행을 떠나는 23일이 내가 다니는 본당의 성지 순례일이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여졌던 것이다.
마침내 23일은 왔고, 비록 성당에서 주관하는 성지순례가 아닌' 학술기행여행'이지만 그곳들을 돌아보는 것도 그리 서운한 것은 아니리라, 그리고 이렇게 성당 밖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내가 밟고 살고 있는 이 지역 천주교의 역사를 찾아보는 것도 역시 커다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안심을 시키면서 서둘러 기행에 올랐다.
처음에 일부 남인계 인사들과 실학자들의 관심 속에 '서학'이라는 학문형태로 조선사회에 전해져 하나의 신앙으로까지 자리잡게 된 천주교는 이승훈이 이벽의 권고에 따라 북경에서 영세하고 정조8년(1784) 3월에 무사히 귀국하자, 이벽과 함께 곧 서울과 인근 지방을 중심으로 양반과 중인을 대상으로 전교되었다. 그리하여 양반으로서는 경기도의 정약전·약용 형제와 권일신이, 중인 가운데는 김우범, 최창현, 지황 등이 입교하게 되었다. 또한 귄일신에 의해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과 전주 초남리(지금의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부락)의 유향검이 입교하게 됨에 따라 천주교는 호남과 호서지방에 까지 전파되게 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전파는 당시 조선이라는 유ㅜ교사회에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전적으로 제사문제에서도 잘 드러나듯 천주교의 교리와 당시 조선사회와의 괴리, 천주교 교리가 지니고 있는 평등의 개념 등은 당시 조선정부의 권위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 되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이에 한국의 천주교는 '금교(禁敎)'와 박해 속의 긴 암울한 시기를 보내야만 하였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천주교의 박해는 끊임없이 계속 지속되어 왔는데, 그 중에서 네 번에 걸친 커다란 박해를 꼽을 수 있다. 그것은 정조15년(1791)에 일어났던 신유박해, 정조17년(1793)의 을묘박해, 순조원년(1801)의 신유대박해, 헌종5년(1839)의 기해박해이다.
호남지역 최초의 순교자는 전라도 진산(지금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윤지충이다.
그는 정약용의 외종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마침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이라는 책을 빌려서 고향으로 돌아와 그것을 베끼고 돌려 보냈다. 아울러 그는 한 동리에 살고 있는 외사촌인 권상연에게도 그 책을 빌려 주었다. 1789년 모친상을 당하자 권상연과 함계자신의 어머니 신주를 태워 땅에 묻고 제사를 폐지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점차 알려졌고,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라고 탄압의 기회만을 보고 있던 정부에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해 주기에 충분하였다. 양반 신분인 그가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실은 시대의 폐륜아로 지목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큰 사건이였다. 그는 전라 감영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천주를 내 아버지로 일단 알아본 뒤에는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양반의 칭호를 박탈당한다 해도 천주계 대하여 죄인이 되기는 원치 않습니다"라고 밝히고 그해 11월 13일 전주 남문밖에서 '천주신앙으로 구원의 역사에 동참할 것'을 군중에게 역설하고 권상연과 함께 참수되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후 10여년 동안은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교세도 점점 불어났고, 더욱이 1794년 주문모신부의 입국은 이나라 교회의 발전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은 바로 진사 한영익이라는 자의 밀고로 바로 알려졌고, 정부는 그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던 차에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 천주교 문제를 해결하던 정조가 죽고 11세의 어린나이로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노론의 벽파에 속해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박해의 바람이 매섭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박해가 너무나 모진 것이었고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으므로 주문모 신부는 스스로 자수를 하면 박해가 누그러질 것을 기대하고 그해 4월에 자진출두하여 군문효수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문모 신부의 출현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정반대로 도리어 박해의 확대를 가져왔다.
전주에서도 3,4우러에는 박해가 한창이었는데 그것은 이 비방 최초의 신봉자요 전도자인 유항검의 체포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잡혔을 때 그의 집에 있는 신주함이 비어 있는 것이 발각되어 동생 관검을 비롯한 일가가 많이 잡히게 되었다. 1784년 가을, 아우구스띠노로 영세하여 호남의 첫사도가 된 그는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그의 휘하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전교를 하였다. 1787년에는 소위 가성직단(假聖職團)의 한 사람이 되어 고향에 다시 내려와 고산, 금산, 영광지방까지 전교를 하였다. 그러나 신품도 받지 않은 평신도가 미사를 지내고 성사를 베푼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이었음을 안 그는 북경교규로부터 조선에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고, 북경에 밀사를 보낼 때마다 앞장서서 경비를 바담하기도 하였다.
유항검은 잡힌 후 북경으로부터의 신부파견을 앞장서서 도모하였음이 탄로되어 신유박해 때 일가(一家)와 함께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도합 500여명의 희생자를 낸 이 신유박해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가혹하고 잔인한 것이었는데, 전라도가 이전과는 달리 박해의 주요무대가 되었다.
초가을의 따사롭고도 맑은 햇볕을 받으면서 우리 일행은 처음 도착지인 치명자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치명자산에는 '로사리오의 길', '십자가의 길', '성직자 묘지의 길', '동고사의 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를 시종 안내해 주신 권이복 신부님께서 알려 주었다. 우리는 동고사의 길로 올라갔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동고사의 길을 따라 순교자의 묘역을 향하고 있을 때 앞에서 '쉬었다 갑시다. 이쪽으로 와 보세요' 라는 귄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순교자 묘역이 잘 보이는 밭이었다. '저기 저 바위가 무슨 모양입니까'하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아뿔사! 어떻게 저렇게 똑같을까?'하는 소리가 저절로 입안에서 나왔다. 그 바위의 형상은 '무릎꿇고 기도하시는 성모님'의 모습 그자체였다. 신부님의 설명으로는 약 5년전부터 모르는 사이에 바위의 모습이 저렇게 성모님의 모습으로 변화 되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셨을까? 너무나도 우리 인간들이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간에 헐뜯고 모함하며 사는 것이 마음에 걸리신 것일까? 아니면 순교자들을 추잡한 인간들로부터 보호하심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흐트러 놓았다.
순교자들의 하느님을 향한 곧은 신앙심을 상징하듯 빽빽한 대나무밭을 지나(백제기행 동안 돌아본 천주교 성지에는 거의 대부분 잘 자란 대나무들이 그것들의 입구에 많이 있었다.) 뵤지에 도착하니 벌써부터(아마 늦은 것이었을 것이다.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 게 분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묘지 주위에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는 할머니는 15여년간을 날마다 하루도 빠지지않고 이 순교자 묘역을 찾았다고한다. 아마 이들은 타인과 자신들을 위해서 그 동안 많은 기도를 g하였을 것이다. 한가지 아쉬움은 흔히들 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자신과 내가족만을 위한 기도, 즉 기본적인 것 보다는 타인을 위한 기도, 정의와 진실을 위한 기도를 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리라.
유항검의 큰 아들 유중철 요한과 그의 며느리인 이순이루갈다의 삶은 너무나도 경이로운 것이었다. 일찍이 첫영성체때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표정으로 평생동안 동정을 보존하기로 하느님과 약속한 루갈다와 요한의 만남은 주문모 신부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왕손(태종의 14대손이윤하의 딸)이 동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또 다른 박해의 불씨가 되는 것이었기에 주신부는 유요한 역시 평생 동정을 보존할 의사가 있음을 확인하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부부처럼 살아간다면 큰 문제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들 20안팎의 젊은 부부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결혼 5년 동거 4년 동안을 순결을 지키면서 그 약속을 실행하였다. 이러한 것은 어느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리라. 두 사람의 진정한 존중과 부부애가 이러한 것을 이루었을 것이다.
"누이여! 내 너를 권면하고 위로하노니 우리 천국에서 만나자"
부부의 참 사람이란 서로의 감정과 뜻을 경이로운 마음가짐으로 존경하는 것일 것이다.
이들 유항검 일가의 시신은 고향의 건너 마을 밭가에 가매장되어 돌보는 이없이 초라하게 버려져 있다가, 1912년에 전동성당의 보두네(Baudounet)신부의 노력으로 합장되었다가 고 김홍섭 판사가 주선하여 바위 위에 흙을 성토해서 이고에 옮긴 것이라 한다. 호남벌이 잘 보이는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이들 순교자들께서 이지역을 잘 보살펴 달라는 기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내려오는 길은 '십자가의 길' 이었다. 이곳은 올라왔던 길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험하였다. 예수계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 걸었던 그길을 재현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그 고통에 동참하면서 이웃 사랑을 스스로 묵상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길이었기 때문에 신앙심이 아니고는 도저히 즐겁게 느껴질 길이 아니었다. 마침 주일이었고, 어느 성당에서 왔는지 옹기종기 모여 '로사리오의 기도'를 하면서 오르는 꼬마들과 여러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잠시나마 묵상을 잠겨보았다. 잠시 후에 주로 천주교도들의 사형 집행장이었던 숲정이(지금의 해성고등학교 뜰)로 향하였다.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동정부부 이루갈다와 시어머니 신희, 시숙모 이육희, 시사촌동생 유주성 마태오 등이 참수된 곳이다. 그후1839년에도 천주교도의 사형이 이곳에서 있었고, 1866년 12월에는 1984년 성인품에 오른 여섯 분의 성인-정문호, 선선지, 한원서, 조화서, 이명서, 정원지-가 참수된 곳이다. 또한 1867년에는 당시 평신도인 김사집 외에 수명의 피가 뿌려진 곳이었다.
'숲정이'란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있어서 이루어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같이 참석하였던 강희남 목사님에 의하면 양반이 아닌 상민들이 사는 하촌(下村)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한다. 1935년에는 이들 순교자들의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기리는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이곳이 거룩한 땅임을 표시하고 있고, 이 '숲정이'는 전주교구 주보의 명칭이 되어 전주교구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계속된 박해는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비교적 양반 중심으로 전해졌던 천주교는 날이 갈수록 중인, 상인, 심지어는 천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교되었으나 계속되는 박해로 인해 가문과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떠다니는 qnm랑아로 만들어 버리기에 족하였다. 그들은 문전옥답, 정든집을 버리고 오로지 천주를 믿으며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녔는데 자연히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전라도와 충청도 접경 지역은 땅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인심이 좋고, 산세가 험해서 숨어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더군다나 전라도는 당시 지배층의 대표적 경제수탈지역이었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이 지역 농민들의 반감은 강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천주교인들이 숨어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천호 성지로 향하였다. 하늘 천(天) 부를 호(呼), 하늘이 부르는 곳이라는 지명을 지닌 이곳은 정말 지명 그대로 하늘이 부르는 곳이 될 수 밖에 없는 위치였다. 지금이야 길이 뚫리고 차가 다니지만, 박해를 피해 이곳에 공소를 세우고 교우촌을 형성하던 당시에는 천호산으로 인해 거의 바깥 세상과 차단된 곳이었던 듯하다. 이곳에 '피정의 집'이 있어 피정객들이 찾기도 하련만 계곡이 없어서 행락철에도 인적이 드물어 피정하기에 좋다는 소리를 듣고 정말로 다시 한번 이곳은 하늘이 부른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천호마을(다리실, 용추네라고도 함)은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1840년경부터 이곳에 교우촌을 형성하고 살게 되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 교인들은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실제로 지니고 살았다고 한다.
역시 꼬르륵 꼬르륵 배꼽시계는 정확하였다. 더구나 아침에 늦어서 부랴부랴 서두른터에 아침을 먹었을 리 만무하고, 이곳에서 우리들은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문화저널측에서 준비한 김밥을 서둘러 챙겼다. 마침 천호공소에서 마련한 토종닭 닭찜이 나왔다. 너무나 매운 맛에도 '둘이 먹어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다'는 등의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점심을 뚝딱 해치웠다. 그 상이 언제나 빠질 수 없는 우리의 다정한 술 동동주잔이 쉬엄 쉬엄 돌았고, 누군가의 '여기에 신부님도 계시고 목사님도 계시고, 마침 주일이니 신구교 합동 미사예배를 드립니다'라는 소리와 거기에 동의하는 대답이 나왔다. 졸지에 계획에도 전혀 없었던 소위 '신·구교 합동 미사예배'라는 것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곳 천호성지에는 산기슭에 한국103위 성인 중 4분의 성인과 10분의 무명 순교자, 그리고 순교자 김종오 아우그스티노가 묻혀 있다. 열 분에 달하는 무명 순교자들은 주로 여산에서 순교한 사람들인데, 신도들이 밤중에 몰래 시신을 훔쳐내어 이곳까ㅓ지 도망쳐 이곳 저곳 야지바른 곳에 산재해 묻었던 것들을 모아 안장한 것이라 한다. 맨 상단에 있는 묘는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정문호 발드메오, 성 한원서 베드로, 성 이명서 베드로 성인들의 묘인데 이들은 병인박해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들이다.
이곳에 묻힌 성인들에 대해서 권신부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나서, 기행 참가자들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 생각과 의문점들을 풀어놓기 시작하였고, 날카로운 질문들도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관심사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인이라는 범주는 무엇이며, 한국의 순교자들 가운데 성인이 되어야할 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성인으로 된 분들이 한국교회사의 수난을 통해볼 때 너무 적다는 것, 또한 이러한 성인들이 주문모 신부나 프랑스 신부들과 같이 외국인 신부에 대한 조선의 박해의 시기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성인이 되는 것이 국가의 힘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도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귄신부님은 천주교에서 성인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은 역사성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최후까지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고 순교한 사람에게 더욱더 중요성을 둔다고 하였다. 성인이 되는 기준은 순교자의이름으로 두가지 이상의 기적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분의 삶으로 미루어 보아 천국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잇어야 성인으로 추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족한 나의 판단으로는 한국 천주교가 외국의 선교없이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전파되었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가려진 많은 사람들의 커다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 특히 이벽, 정약용, 이승훈, 권철신……이들은 천주교의 발전에 순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런데도 그들은 성인은커녕 복자의 서열에도 들지 않으니…….
천호피정의 집의 조그만 방에 모인 우리들은 종교인 비종교인 할 것없이 모두 모여 합동으로 '미사예배'를 드렸다. 강론 때 강회남 목사님은 "진정한 신앙인은 기복적이고, 오염되고 잘못된 종교의 태도를 벗어나 올바른 예수의 정신을 이땅에 심어야 한다"고 하셨고, 귄이복 신부님은 "화해와 용서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빛과 소금이 된다"는 말씀을 하시고 기쁨과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미소를 던지는 생화을 하기를 바란다고 전하고 마지막으로 성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하였다.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잇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잇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맨끝에는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힘껏 불렀다.
물론 이 백제기행은 천주교나 개신교의 어떤 종교행사도 아니고 단지 학술적인 성격을 지닌 기행이었으므로 다소 이러한 행위가 다분히 기행 자체를 본연의 학술적인 성격을 희석시키고 종교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처럼 만들어 아쉽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이런한 분열의 시대에 서로 갈라져 기피했던 신교와 구교가 이렇게 함께 한자리에서 이웃과 국가를 위해 기도하였다는 것은 비단 신·구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비종교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싶다.
예정에도 없던 '신·구교 합동 미사예배'를 드리고 나니 더욱 시간이 촉박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기행팀은 서둘러 여산으로 발길을 향하였다.
여산성지는 1866년 무진박해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여산 화산성당이 있었는데 그곳의 주임신부님의 안내로 그 주위에 잇는 성지들을 돌아보면서 그 신부님으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 신부님은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과 결부시켜 여러 가지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는데 역사를 전공한다고 하는 내가 부끄러울 정도엿다. 우리들은 여산 숲정이, 백지사지 동헌, 옥터, 뒷말치명터 그리고 배다리라는 곳을 돌아 보았는데, 특히 충격적인 것은 백지사터를 동아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인간이 잔인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지사터는 동헌 앞마당에 있었는데, 동헌 마당에 나무 말뚝을 박고 신도들을 평좌시킨 다음 말뚝에 묶고 배교를 강요하면서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붙이고, 또 물을 뿜고, 그 위에 또 다시 백지를 붙이고 다시 물뿜기를 반복하면서 강요하고, 그래도 배교하지 않고 질식하여 죽어갔던 곳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온몸에 힘이 빠지고 마치 내가 질식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천주가 무엇이관대 이들은 이러한 고통을 참아가면서까지 그들의 신앙을 지켰을까? 이에 대한 답은 윤지충이 그의 공술기에서 말한 "천주를 내 아버지로 일단 알아본 뒤에는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이 이들로 하여금 더욱 더 굳건한 신앙을 갖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양반의 경우에는 어떠할지 모르지만, 특히 수탈의 대상이었던 농민들이나 천민들에게 있어서 천주는 구원자였던 것이리라. 특히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던 이 사람들에게는 죽어서나마 천당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치욕적이고 끔찍한 고문 앞에서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들 순교자들의 신앙에 대한 나의 너무나도 얕은 신앙을 부끄러워 하면서 나바위 성당으로 향하였다. 그곳은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이곳 금강유역이 한강인줄 알고 상륙했던 곳이다. 이때 김대건 신부는 풍랑을 만나 항해가 순조롭지 못하였는데 이때 한국을 성모마리아께 봉헌하겠다고 기도함으로써 이때부터 한국천주교회의 주보성인은 성모마리아가 되었다고 한다. 이 나바위 성당은 사적인 한국의 건축양식을 가미하여 대단히 특이하고도 전통적인 멋을 지닌 건축물이다.
아침에는 쨍쨍했던 햇살이 어느덧 나바위 성당에 도착하였을 때는 굵은 빗줄기로 변하였다. 우리 기행팀은 그 비를 맞으면서 김대건 신부가 상륙하였던 지점을 둘러보고 서둘러 전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차속에서 우리는 빽빽한 여정으로 피곤하기는 하지만 상당히 의미있는 여행이었음을 저마다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우리 기행팀은 차안에서도 이번 기행에 대한 얘기로 피곤에 지친 몸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전주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예정시간보다 휠씬 지난 후였고, 너무나도 굵은 빗줄기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