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현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는 열세편의 단편소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열두편의 단편과 하나의 꽁트를 싣고 있다. 이 소설집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과거, 인물들의 발목에 족쇄처럼 채워진 과거를 느꼈다.
우리는, 시간이란 변화를 우리가 아는 방식이다라는 정의에는 합의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변화가 물처럼 흐르는지, 볼펜 용수철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지, 굴렁쇠처럼 돌아가는지 어쩐지에 대하여는 각자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 보통 시간은 물처럼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왔고 미래로 이어질 이런 시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돌이킬 수 없음이다. 구체적인 사건들로 가득한 과거는 우리의 손이 미칠 수 없는 자리에 있다. 단단한 벽이 가로막고 있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미래쪽으로는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볼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 끝에 만져지는 것이 업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현재·미래가 현재를 분기점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한 속임수이다. 천칭의 한쪽 접시에 바위를 올려놓고 다른 접시에 허공을 올려놓아 수평을 이룰 수는 업다,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린 것이 아니다. 예컨대 나의 몸은 내가 태어난 후로부터 조금전까지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지금 여기에 있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역사가 우리의 의식속이 아니라 우리의 국토위에 쌓여 있다고 생각한다.
김영현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과거에 묶여 있다. 그러나 동시에-역설적이지만-과거로부터 차단된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사이에는 '터널'이 있다. (소설집「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의 첫 단편 「멀고 먼 해후」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길고 긴 터널 같았다.") 이 터널은 물론 작가 자신이 영점칠평의 독방에 갇혔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자신이 학생운동 출신이기도 한 작가는 자신과 비슷한 학출의 '빵잽이'들을 그려냈다. 물론 「멀고먼 해후」와 「달맞이 꽃」에는 노동자도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학생운동 출신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이 지나온 터널은 다름아니라 칠팔십년대의 폭압적인 정치권력이다. 현실세계에서 이러한 터널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줄기찬 것이었지만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의 세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소설속의 인물들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끊임엇이 노력하지만 눈부신 성취라고 부를만한 결말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엄마의 발톱」에서 "명규는 흙덩이 같은 어머니의 체온이 풀잎같은 자신의 몸뚱어리로 잔잔히 파도치며 전해오는걸 느꼈다."「저 깊고 푸른 강」에서는 "창문을 열어제끼자 식물들이 말라가며 토해내는 싱그러운 가을냄새가 한아름 가득 몰려들었다."「별」에서는 "찢어진 구름 사이로 별하나가 떠올랐다."그리고 「포도나무집 풍경」에서는 박목사의 "둥글고 널따란 어깨의 윤곽 너머로 별똥별이 하나 길다랗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서정적인 결말은 겉보기와는 달리 손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아울러 문제해소의 주체들도 학생운동 출신만이 아닌 인물들로 확산한다. 등장인물 두사람이 나오는 연극처럼 읽히는 「불울음소리」는 산문시 같은 대사로 이어진다. 그속에서 사십년전의 전쟁통에 까닭모르고 죽을뻔 했다가 "밍이"-명이-길어 살아난 아버지의 "고된 인생 행적"이 작중화자 강교수의 입을 통하여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강교수 자신이 개인적인 출세를 꿈꾸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벌겋게 타오르는 광주의 불꽃 속에서, 그 아우성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김영현이 말하는 터널의 이쪽 끝에 지금 개구리 사진을 찍으러 나온 강교수나 출판사 직원'나'가 서있다면, 터널의 저쪽 끝은 광주로, 전쟁으로 이어진다. 발문에서 현준만이 말한대로 "부분적인 상위점에도 불구하고...「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의 연작 내지는 후편으로 읽히는"「저 깊푸른 강」은 분단극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두 작품의 터널 저쪽 끝도 역시 전쟁이다. 그러나 김영민은 분단문제를 감상적인 당위의 입장에서 다루지 않는다. 전세대의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이 혈족관계와 뒤엉키면서 재현되지만 작가가 이제 싸움의 당사자들이 죽고 없으니 우리도 그만 잊어버리자고, 떠나보내자고 말하기보다는 문제의 해결이 누구의 손으로 너어왔는가를 보여주는데 더 힘쓰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현준만이 김영현의 소설쓰는 방식을 '역사적 상상력'이라 이름붙인 것은 타당하다. 이런 종류의 상상력이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하여는 김영현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므로 쓸데없는 시비를 거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터널은 「그해 겨울로 날아간 종이비행기」에서 "출구없는 원통"으로 표현된다. 이 원통이 우리에게 주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은 원통이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공포이다. 원통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차단된 과거에 손을 집어 넣을 수 없다. 원통을 부순후에 과거가 현재와 연결 될지는 그때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은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가 김영현의 첫 시집「겨울바다」에 이어 나온 첫 소설집이니 만큼 그의 역사적 상상력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지역사회 지배구조와 농민 지역연구모임
한국사회의 모순구조와 사회변혁의 올바른 길을 둘러싸고 전개되어온 그간의 논쟁과정에서 국가의 성격규명은 핵심적인 과제 중의 하나로 다루어져 왔다. 국가에 관한 학계에서의 논의는 "국가란 어떤 사회내에서 조직되어 있는 지배적인 계급이나 계급분파가 다른 피지배 사회계급에 대한 계급지배를 보증해주는 정치권력"으로 규정하고 한국국가의 성격을 그 종속적 성격과 부르조아권력의 폭력적 지배체제라는 점에서 '신식민지 파시즘체제'로 보는데 대체로 합의하고 있다.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와 한국가톨릭농민회가 펴낸 『지역사회 지배구조와 농민』(1990, 연구사)은 이러한 성격을 지닌 한국국가가 (독점)자본의 계급지배를 어떻게 보장하는지, 그리고 그 방법으로서 국가의 민중통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농민에 대한 국가의 정치적 통제구조'를 통해서 파악한 조사연구서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독점자본이 농민을 경제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수탈에 대해 농민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어떤 힘의 보증이 있기 때문인데, 그 보증자가 다름아닌 국가라고 하는 관점에서 그 동안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에서 국가는 농민을 어떻게 희생시켜왔으며 농민의 의식화·조직화·정치적 진출을 어떻게 저지시켜 왔는가를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다.
1장의 서론과 2장의 국가, 지역사회등에 대한 이론적·개념적 논의를 제외하면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군단위, 면단위, 부락단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국가의 농민통제구조 및 방식에 관한 자료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2장의 내용은 자료분석을 위한 이론적 틀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특히 2장 2절은 그 핵심을 이룬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는 국가의 농민통제를 역사적으로 검토하면서,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한국사회의 역사과정은 신식민지적 자본축적과정이었으며, 이 과정에서의 국가의 농민통치는 공개적 테러통치유형이라고 규정한다.
이후 3-5장 및 본론에서의 자료분석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질 수 있다.
첫째, 한국농민의 정치적 역량은 역사적으로 억압당해 왔다. 즉, 해방이후 미군정치를 거치는 국가형성과정에서 자주적 농민운동조직과 활동가들이 대부분 제거됨으로써 농민운동이 역사적으로 단절되었으며, 60년대 이후의 고도산업화과정에서 발생한 이농현상도 농민의 역량강화에 저해요인이 되었다.
둘째, 국가가 그동안 취해온 농민통제의 목표는 경제적 억압과 정치적 수탈이다. 경제적 억압이란 자본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한 값싼 식량의 공급지로서, 재정수취의 대상으로서, 저임금 노동력의 공급지로서, 그리고 공산품의 판매시장으로서, 농민들은 끊임없는 수탈이 대상이 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정치적 수탈이란 농민들이 정책결절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철저히 차단하고-예컨대 학생 및 진보적 정치세력의 접근봉쇄 등-, 농촌을 정권의 정통성 획득기반으로 삼아 왔다는 것을 말한다.
셋째, 이런 점에서 한국농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공개적인 테러통치유형이라 규정할 수 있다. 국가는 농민통제를 위하여 군단위 지역사회에 군대, 경찰 및 각종 사법기구와 같은 폭력적 국가 기구를 조직하였으며 심지어 부락단위에서는 새마을조직 및 예비군 조직 등을 통하여 농민의 의식화·정치적 조직화를 억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볼 때, 한국자본주의의 농민수탈구조는 국가권력의 농민에 대한 통제의 틀 속에서 실현되어 왔다. 즉 국가는 독점자본의 안정적 재생산을 보증해주는 제도적 실체인 것이다.
그간 이론적 논의에 치우친 감이있던 국가의 성격에 관한 분석이 '국가의 농민(또는 민중)통제'라는 측면에서 실증적으로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선 그 의의를 지닌다 할 수 있다. 특히, 우리지역에서 그동안 전개되었던 농민운동의 사례들이 그 핵심대상을 발견하고자 고민해 왔던 것을 생각할 때 이 책에 대한 우리의 반가움은 한층 커진다.
이 책이 발간된지 약 4개월이 지난 요즈음, 국가의 폭력적 민중통제를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앞에서 온 나라가 분노, 그리고 일말의 두려움으로 떠들썩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러한 국가의 농민(보다 포괄적으로는 민중)통제에 대한 대응방식의 모색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간단히 제시되고 있는 군단위에서의 대항조직의 결성, 지방자치제의 실시를 통한 민중의 지역 정치권력에의 참여, 부락단위에서의 농민통제조직의 자치조직으로의 대체 등이 약간의 실마리를 제시하기 하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인 논의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이것이 이 책에서 느끼는 하나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지배권력의 민중통제에 대한 대응방식의 본격적 검토는 이 책의 필진에 대한 우리의 기대이면서 동시에 이 지역에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