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문화를 대단히 고상하고 심오하며 일상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이는 일종의 문화 속물주의적 발상이다. 어떤 특수계층 사람들만이 문화를 누릴 수 있다든지 자신의 삶을 문화에서 소외시키려는 자시 비하감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지 각기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문화와 어우러질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지는 것이다. 문화의 독자성과 포괄역량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문화저널』이 창간된 이래 3년동안에 걸쳐 문화를 만들고 그것을 나누어 갖기에 기울인 노력은 매우 값진 것이다. 구성원들의 노력과 추구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출판문화와 평론문화 혹은 대화문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또한 문화의 어우러짐을 위한 노력은 이전에 없었던 신선한 것이었다.
문화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은 문화를 상층문화와 하층문화 혹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구분한다. 문화를 어떻게 분류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들 관심사의 핵심은 아니다. 이 시점에서는 우리들이 만들어가는 문화가 어떠한 것이며 거기 바탕으로 깔린 문화에 대한 철학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점검이 필요할 뿐이다. 이는 우리들이 만들어가는 문화의 이념적 기반에 대한 자기성찰이며, 문화 운동을 통해 소망하는 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지향점의 점검이란 의미를 띠는 일이다.
그동안 『문화저널』은 어려운 여건속에서 많은 활동을 해 왔다. 그 성과는 여러 측면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지만,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퍼뜨려 나눠 갖는 데에 보여준 역할은 지대한 것이다. 그 역할을 점검해 보고 몇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는 우리 지역의 정치, 학술, 예술, 교육 등 다양한 부면의 문화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문화는 살아있는 것이라야 한다. 문화가 살아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지금 여기'서 그 문화활동이 이루어짐을 뜻한다. 또한 시간적으로 격차가 이는 문화가, 오늘 우리들의 문화를 이루는 데에 어떤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은 바로 문화의 전승과 창조는 두가지 의미를 동시에 머금는다. 시의적절한 주제를 선정하고 거기에 대해 날카롭고 신선한 시각으로 평을 가함으로써 문화비평적 시각을 드러낸 점은 『문화저널』의 빛나는 몫이었다고 본다.
둘째는 지역문화의 다양한 면모를 담아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 가운데 하나가 획일성의 극복일 것이다. 문화의 획일성은 삶의 양태가 획일화되어 있다는 점의 반증이 된다. 획일화된 삶의 양상에서는 사고 또한 획일성을 면키 어렵다. 다양한 문화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는 매체가 되어야 하는데 『문화저널』은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왔다.
셋째, 문화의 시간차를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는 판소리라든지 민요 등 전통문화의 발굴과 보급에 노력을 기울이는 데서 그 구체상이 드러난다. 전통문화의 발굴과 보급, 그리고 이론적인 점검을 통하여 전통문화의 자생력 증대에 기여한 노고가 지적되어야 한다.
넷째, 문화의 구체성을 지향하는 지향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문화는 삶의 양식이며 그것은 생활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천되면서 의식의 공통기반을 만들게 된다. 다양한 작품을 수용하고 독자가 그것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물론 '백제기행'을 계획하여 실천하는 가운데 문화가 삶 속에 파고들어 구체화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왔다.
문화는 그 문화를 향수하는 주체들의 활동과 그 결과이며 공통된 의식을 형성하는 매체 역할을 한다. 의식의 공통기반을 지속적으로 만드어가는 가운데 문화는 자생력을 확보한다. 문화의 자생력과 관련하여 우리들이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문화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측면과 함께 문화를 나누는 방법이다. 『문화저널』이 지역문화 향상에 공헌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는 범위에서 지면을 확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지면을 꾸미는 데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문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문화의 알맹이는 없고 문화에 대한 논의만 무성한 것은 문화를 추상적 차원에 머물게 할 우려가 있다. '작품체'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문학작품은 물론 미술, 사진, 연극 등 지면에 예술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둘째, 문화비평적인 안목을 새롭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문화는 자생적으로 이루어지는 측면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함께 어우러지되 그 방향성은 나름대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 방향성이 문화비평적 시각이다. 『문화저널』에 이러한 요구를 하는 까닭은 다른 매체들이 갖는 나름의 제한성을 극복한 개방성 때문이다.
셋째, 문화를 향유하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필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근간 문화매체의 양적인 증가와 함께 필자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는 실토를 자주 듣게 된다. 이는 매체의 양이 꼭 질을 보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질의 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성찰을 요하는 바이다. 그러나 『문화저널』의 경우 필자에게 원고료를 지급하기 어려운 형편 자체가 문화에 대한 이념적 편향을 극복해 낼 수 있는 내적인 힘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력이란 의미도 된다. 상업성이 강요하는 편향적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문화주체들의 공동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있기를 기대한다. 문화를 모으고 퍼뜨리는 것은 물론 구체성있는 문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은 그러한 참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에는 대학생층과 일반인층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방안의 모색이 필요할 것이며, 중고등학교까지 포괄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면 보다 효과적인 문화적 역량 함양이 가능해질 것이다.
한 지역의 유형·무형의 문화를 모으고 새롭게 가다듬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한 작업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화저널』이 그 동안 해온 작업은 지속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앞으로 보다 큰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훤칠한 성장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