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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1 | 연재 [사람과사람]
시인 이 광 웅 절제된 언어속의 맑은 서정과 혁명정신
김은정·편집위원(2004-01-27 16:58:56)

그의 웃음은 홍안의 소년처럼 해맑다. 첫시집 "대밭"에서도, 두 번째 시집인 "목숨을 걸고"에서도, 그는 그렇게 맑게 웃고 있다.
그의 시도 그 웃음처럼 맑다. 그 맑음은 참으로 투명해서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바르지 못한 것들을 끌어안고 비춰내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
시인 이광웅(50)을 만나기로한 조그만 찻집에 들어섰을 때 그는 구석 한쪽에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왜소한 그의 몸집은 크지않은 의자에서도 묻혀 더욱 작게 보였다.
광도를 낮춘 불빛아래서도 시인의 웃음은 맑다.
그는 이즈음 전주의 한 입시학원에서 대학재수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좋아요, 재미도 있고, 일전엔 단과반에서 국어를 배운아이가 한달과정을 끝나고 나를 찾아왔어요, 많이 유익했다고 하더군요," 문학사를 읽고있던 그가 책을 덮어놓으며 말했다.

그는 교단교사이면서 시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당하게 서있어야할 교단에서 그는 내몰렸다. 전교조 교사로 참교육실현을 위해 싸우다 그는 6년만에 다시찾은 그 소중한 자리를 잃었다. 그래도 시인은 불행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또다른 아이들이 있으므로, 아니,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교육민주화운동이 반드시 이땅위에 바로 설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으므로.
그래서일까. 이나라 독재권력의 힘에 의해 고난의 사슬을 5년여동안 감고 있어야 했던 시인은 그 고통의 질곡을 쉽게 드러내놓지 않는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해갈하고 돌아다닐 때 참으로 많은 시를 썼어요. 가슴으로 끓어오르는 수많은 언어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곤 했지요."출옥직후 1년반 남짓한 동안 씌어진 시와 감옥안에서 썼던 시편들, 그리고 습작기 시절의 시편까지를 묶어 그는 시집<목숨을 걸고>를 창작과 비평사에서 냈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 극도로 절제된 서정-정말이지 조심조심 쓰셨군요. 저 무지막지한 고문, 저 억울한 철창생활을 당신은 정말이지 잔잔히 고발하시는군요. -중략-아침이면 비구름 저쪽으로라도 해가 뜨듯이 그걸 종이위에 살려놓으시는군요.」 이 시집의 서문에 문익환목사가 써놓은 글처럼 그의 시들은 고통과 분노와 절망을 그 맑은 서정성으로 닦아내면서 언어의 생명력을 더욱 생생하게 울려내고 있다.

시인이 살아온 50년은 짧지않은 세월이다. 그 세월은 해가뜨고 지면서 쌓인 일상적 의미의 그것과는 다른 세월이다.
문학소년시절(그는 이리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를 그곳에서 다녔다) 해방직후의 대표적 전위시인이었던 유진오의 현실에 투철한 시적 세계를 흠모하며 시대를 올바로 보고, 담아내는 시인이 되고자 했다는 그는 문학이 갖고 있는 진실한 힘에 눈을 뜨고 역사를 직시하면서 살아가는 자세를 견지한 댓가로 40대의 절반이상을 차가운 철창에 갇혀 보내야했으며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용공주의자로 몰려야했다. 그는 시인으로 보다는 <오송회>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시적이고 서정적이다고 표현한 <오송회>사건으로 시인은, 교사는, 꼬박 42일동안을 영장도 없이 끌려가 숨을 한번씩 내쉬면서 살아있음을 확인해야했다는 그 고통과 아픔속의 벼라별 고문을 (그는 어떤 순간엔 고통스럽다못해 살아있다는 것이 치욕적이고 굴욕스러워 몸서리를 쳐야 했다고 말했다.) 다 당해야 했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4년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오송회>는 그가 이름붙인 단체가 아니다. 80년 5월 광주의 봄을 무참히 짓밟고 서슬퍼렇게 섰던 제5공화국이 용공조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이름붙인 것이 <오송회>다.
「다섯그루의 소나무 모임」.
시인에게는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해서 많은 사람들이 웃었었노라고 그는 들려줬다.
그 <오송회>사건이란 전모(?)는 이렇다. 이광웅시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했고,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문학의 큰 힘을 신념으로 갖고 있었다. 그는 76년부터 군산 제일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몸담고 있었는데, 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그는 이 땅의 민주화에 대해 더욱 절실한 인식을 갖게 됐다. 당시 같은 학교에는 뜻이 맞는 몇몇 교사들이 있었고 이들은 함께 모여 80년 이후 암담한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교육현실의 문제점을 토론하기도 했다. 81년 3월 광주 미문화원이 불타는 사건깊게 읽었던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을 떠올렸다. 반미의식을 대하며 예전에 감동깊게 읽었던 오장환의 시집「병든 서울」을 떠올렸다.
"그의 시들은 해방직후 미군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그들을 환영하는 노래로 시작하고 있지요. 그러나 한달정도가 지나면서 미국의 본체를 꿰뚫어본 시인은 이제 그만 너희나라로 돌아가달라는 내용으로 시를 써냈습니다. 시인의 예언자적인 탁월한 해안에 큰 감동을 받았던 나는 그 시집을 주위사람들과 나누어 읽고 싶었어요. 뜻이 맞았던 몇몇 동료 후배들에게 복사해주었지요." 이시집 복사판 돌려읽기는 같은 해 4월 19일 우리나라에서 민중의 힘이 최초로 승리한 4·19가 아직도 기념일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아쉬워 「우리끼리라도 4·19영령제를 지내자」며 학교 뒷산 소나무아래서 소주잔을 나누었던 그일과 한고리로 엮어져 <오송회>사건을 창출하는(?)중심 소재가 됐다. 이광웅시인의 제자가 복사판 시집을 시내버스안에 놓고 내린 것이 빌미가 되어 그렇지 않아도 눈총을 받아왔던 이들 교사들은 「북괴를 예찬했다」는 죄명으로 용공주의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오송회사람들 중에서도 주동인물로 꼽혔던 이광웅시인은 7년형을 받아 사상범들을 수감한 광주 특사 독방에서 감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주교도소로 옮긴 1년여만인 87년 6월 6·29선언에 의해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6·29선언이 수많은 민주화열사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고 보면 시인은 민주화를 열망한 댓가로 온몸을 묶여야했고 또 그자신이 희생한 덕분에 감옥을 벗어날 수있었던 셈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닌가?
시인은 4년 8개월, 감옥에서의 그 생활로 삶에 대해 새로운 눈을 떳노라고 말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도 감옥에서였고, 삶에 대한 가치, 인간의 신념, 분단민족의 아픔에 보다 절실한 인식을 갖게 된 것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시인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무기조차(필기도구) 빼앗긴 상태였으므로 운동하며 주워온 못을 갈아 우유갑에 시를 썼고 그것을 간직하기 위해 책표지를 뜯어 붙여놓는 방법으로 시편들의 생명을 지켰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빛을 본 것이 「바깥의 노래」「바람의 손길」「햇빛 한참」등의 시편들이다.

사과꽃이 아름답게 피고
실개천엔 착한 노래
푸른 봄 햇빛.
님은 가시고
봄은 오시고
하늘끝 벋어간
슬픈 평행선.

옥중에서 불러본다.
무심히 떠오른 바깥의 노래.
드높은 담벼락 안에서도
사과꽃은 흐드러지고......
-중략- <바깥의 노래 중에서>

높디 높은 담안에서 시인은 「옥방에서 부화한 하얀새는 죽었다」며 절망하다가도 철창에 흘러든 햇빛을 가슴으로 안으며 <얼어붙은 오늘 이 죽음의 땅에 봄맞이 서두르는 새들의 궁리. 산같은 침묵을 깨뜨리고 새봄을 구가할 꽃들이 합창>하는 따뜻한 봄날이 멀지 않았다」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그 긴긴 날들을 채워나갔다.
"감옥안에 있을 때 내생애에 잊어서도 잊혀져서도 안될 사람들을 만났어요. 분단 민족으로서의 비애를 껴안고 그 소중한 삶을 자신들의 신념속에 아낌없이 바친 그 분들을 보면서 저들의 고통에 비하면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다는 마음을 다지곤 했지요. 신념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로운 것인가도 깊이 깨닫게 되었구요."
그가 만났던 그이들은 시인의 적지않은 시편들 속에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87년 6월 바깥 세상으로 나온 시인은 88년 8월 다시 교단에 복직할때까지의 1년 남짓한 동안 해갈하고 다니며 가슴속 응어리를 몰아내는 시어들을 하나하나씩 닦아두었다. 그렇게 닦여진 그 시들은 한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5년여동안을 생징역살아야 했던 사람의 시로써는 '터무니없이'맑다. 그의 분노와 절망은 극도로 절제되거나 감추어져 있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진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시는 짙은 서정성을 안고 있다. 삶자체가 서정성을 내포하고 잇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그는 삶의 면면들을 담아내는 시의 본류는 서정성에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 까닭에 시인의 시에서는 생경한 언어나 관념적인 언어의 돌출은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가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와 조국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반민중적인 적들을 향해 돌진하는>힘있는 언어로 전해지는 까닭은 맑게 닦여진 시인의 정신이 이미 버림받은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 이땅의 수많은 질곡과 모순을 투명하게 여과시킴으로써 진실된 시적 세계의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1940년 이리에서 태어났다. 유복하지 못한 집안의 5남매중 셋째였던 그는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줄곧 이곳에서 나왔고, 그가 따르는 선배가 외국어대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신도 외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한학기를 마쳤을 때 건강이 나빠지고 집안 사정도 어려워 대학을 중판메고 짐을 싸들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는 집에서 시만 썼다. 이때 시들의 유일한 독자는 그의 누이동생들이었다. 그가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누이들은 용공주의자로 빨갱이로 몰렸던 시인을 위해 <민가협>에 들어가 머리띠를 두르기도 하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오빠의 습작시들을(시인의 대부분 작품이나 책은 압수당해야 했지만 누이가 갖고 있었던 시편들은 햇빛을 볼수 있었다)묶어 시집(대밭)을 출간해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었다. 대학을 그만두고 방황하면서도 그는 신석정선생과의 교우로 문학적 깊이를 채워나갔으며 석정선생은 당신이 사랑하는 후배이자 제자를 위해 많은 시간들을 쏟아주었다. 시인은 그런그런 인연들로 전북대 국문과에 다시들어갔으나 그 과정을 마치지는 못했고, 잡지사 교정일도 봐주고, 시도 쓰고, 책도 읽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당시 원광대에 문예장학생제도가 생겼을 때 그 혜택을 받아 시인은 원광대에 들어가게 됐고, 71년에 비로소 졸업장을 받았다. 59년 외대에 입학한 때로부터 치자면 꼭 12년만이었다. 그리고 시인은 원광여고에 첫발령을 받아 교단에 섰으며 76년 자리를 옮겨간 곳이 군산 제일고였다.

그는 문학소년시절부터 시인이 되기로 작심했었다고 했다. 당시 우리 문단을 풍미하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그도 받았지만 현실에 투철한 시를 써냈던 유진오(그는 후에 남부군에서 문예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전주교도소에서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시적세계에 심취해 그의 시를 통해서 역사를, 현실을 올바로 보루 있는 힘으 배웠다.
"그는 죽음앞에서도 비굴해지거나 변절하지 않고 의연했던 뛰어난 시인이었어요"그래서 자신의 문학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으로 그는 유진오를 꼽는다. 그가 광주특사에서 이감되어 1년여동안을 보내야 했던 전주교도소에서 시인은 그 자리에 있었던 또 한 시인을 떠올리곤 했을것이 아닌가.
그는 진정한 시인은 진정한 혁명가일 수 있다고 말한다. 위대한 혁명가는 위대한 예술가일 수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서정으로도 혁명을 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서정은 삶의 한중간에 바르게 서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그는 내세운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로, 아름다운 서정을 발휘하는 시적 세계로 그는 「분노를 눌러서 시의 보석을 깎아내는 솜씨가 우리시단에서 단연 돋보인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의 시는 삶의 어늬 한편에 고정돼 정착해있지 않다. 삶의 편편들을 담아내기 위해 생생한 언어를 닦아내고 있는 그는 이즈음 고통받는 아이들을 껴안는 작업속에 들어있는 중이다.

지난해 12월 교육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교사·시인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교육문예창작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싸움의 현장에 동료·후배들과 늘상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죄스럽다고 말한다. 그의 시집 서문에서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어쩌면 참 혁명은 당신의 발걸음처럼 조심조심하는 건지도 모르죠.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안이 받쳐져야 한다는 말이죠.」
시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혁명가이십니까"시인은 그 맑은 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혁명가가 못되지요. 아직 진정한 시인이 되지 못했으니까요"

시인은 10년이 넘게 살아온 군산에서 서양화가이자 교사인 아내 김문자. 딸 미경, 아들 진명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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