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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 | 연재 [문화저널]
눈이 많이오면 풍년든다지요
박 남 준 시인(2004-01-29 10:37:00)

하얀 목화 꽃같은 솜 꽃송이, 바야흐로 하늘에서 이 땅에 내리는 아름다운 축복의 하나인 눈이 오시는 계절입니다. 자연의 조화로움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헐벗고 가난한, 넉넉지 못한 서민들의 삶에 있어서의 겨울은 그리 달가운 것만은 아니지요. 연탄 걱정이며 할 것없이 겨울은 바로 걱정의 계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겨울 밤은 어찌도 그리 긴지, 자 그럼 이 긴 겨울밤에 들려 줄 이야기 보따리 어디 한번 풀어 볼까요.
옛날에 옛날에 긴 뱀이 긴 구멍으로 들어가는디 안직도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려 시방도 들어가고 있당게요. 정말이랑게요. 아이고 참 글씨, 그긴 비암이 꼬랑지까지 다 들어가 부러야 이야그를 시작헐 것 아니것소 잉. 그려 그려. 그 말도 맞기는 허요만 거 뭐시냐 너무 그렇게 질 질 빼싼게 자미가 읍다 이말쌈 아니것소. 허긴 그러요. 지가 어찐가 볼라고 한번 그래봤지라우. 근디 어찐다여 헐이야그가 없는디. 아니 뭐시여 이 사람이 누굴 놀린겨 아이고 사람 살려 ! 게동네 사람 아무도 없소. 개똥이 아부지가 사람잡네. 긴 겨울 밤 사랑방에 모인 정겨운 얼굴들, 옆집 개똥이 아부지는 뒷집 소똥이 아부지를 실없는 사람이라고 꿀밤 한대를 기분 나쁘지 않게 쥐어 박는다.
띵그렁 띵그렁 쇠죽방 옆에 붙어 있는 외양간의 누렁이도 주인네들의 재미 있는 이야기를 꿈벅 꿈벅 큰 눈을 굴리며 듣고 있다.
긴 겨울 밤은 또한 뱃 속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 우리집 안방 옆에 광으로 사용하는 마루 방이 딸려 있었다. 형제들 중에서도 나는 어머니나 할머니께서 광속에 숨겨논 음식이며 군것질 거리를 곧잘 찾아내오는 재주가 있었다. 달그럭 달그럭 광문을 열고 들어가 이그릇 저그릇 열어 보고 있노라면 안방에서 들려오는 귀 밝은 할머니의 목소리. 인쥐가 들었나? 아니 어멈아 광속에 인쥐가 들었나 보다. 내일 날밝으면 쥐 좀 잡아야 것다. 동생과 나는 이크 큰일 났다며 찍찍 쥐소리를 내며 숨을 죽였다. 물론 할머니께서 동생과 내가 광속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리야 없었다.
겨울 밤은 깊어 간다. 탁탁 할머니는 인두를 뒤적거리며 화롯불에서 알밤을 구워 내시고 개구쟁이 손주 녀석들은 날름 날름 제 입에 넣기가 바쁘다.
소복 소복 장지문 밖 마당이며 뒤뜰 장독대에 하얀 눈이 오신다.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지요. 농사 풍년 말이요. 그런디 요즘 시상은 어찌된 일인지. 풍년이 들어도 걱정이랍니다. 제 값 못 받는 농산물 값도 그러려거니와 거 무슨 유알인지 우라질 놈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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