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인 묘가 있는 무성리 원촌에 사적 166호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다. 원래 조선성종때 고운(孤雲) 최치원(催致遠)을 배향하기 위한 태산사(泰山祠)였으나 1696년숙종때 사액(賜額)으로 무성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이란 전국의 서원 중에서 모범이 되는 서원을 조정에서 사액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하면 왕이 친필로 쓴 액(額: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과 노비를 주고 면세의 특권을 준 서원이다. 이처럼 사액서원이 된뒤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을 함께 모시었다.
향교가 관학(官學)의 성격임에 반해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을 제사 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詩政)을 비판하는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사학(私學)의 성격을 띈 기관이었다. 그러나 서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부정적 폐단이 너무 많아 1865년 대원군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고 전국 서원의 정비를 단행, 사표가 될 만한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다. 이때 전라도에서는 장성의 ?과 武城書院만 남았는데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서원이다.
문루인 현가루(絃歌褸)는 두리기 등을 쓴 2층의 3간 기와집이고 그안에 정면 5간, 측면 2간의 단층 기와집인 강당과 대청 및 좁은 방이 있으며, 그 오른쪽에 4간의 ?가 왼쪽에 3간의 ?가 있어 동서재를 이룬다. 3간 ?을 지나면 ?인 3간 단층 기와집이 있는데 그 안에 최치원을 북쪽 벽에 같이 모신 사람들은 좌우에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에 중수한 것이며, 강당은 3년후에 중건하였다. 특히 이 서원에는 1486년 이후의 院生錄, 尋院錄등 중요한 서원 연구자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