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년 한해가 바뀌고 임신의 해가 밝아 왔다. 숱한 어려움이 그대로 밀린 채 21세기를 향한 역사의 마당은 그런대로 열려가고 있다. 흔히 역사는 항상 도전과 응전으로 얽혀진 ‘투쟁의 역사’라 한다.
가볍게 말하자면 ‘경쟁’, 내용을 들여다 보면 ‘전쟁’, 바로 이러한 것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원인과 결과가 역사다. 그러기에 분명 역사속에 담겨져 흘러왔고, 또 흘러갈 우리는 적어도 한번쯤은 ‘싸움’이란 무엇이냐? 는 문제를 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 ‘ ’에다가 ‘ ’를 붙인 ‘爭’이라는 글자가 있다. 바로 손아귀에 무언가를 쥔 모양을 ‘ ’, 쥔놈을 뺏으려 다른 손이 덤비는 모습을 ‘爭’이라 하였으니 싸움의 근본적 원인을 말하는 재미있는 글자다.
즉 시끄러운 저자속에서는 상권을, 흥겨운 소리판 속에서는 북채를, 엄숙한 서당방 속에서는 회초리를, 서슬이 퍼런 정치판 속에서는 정권을 쥐고 잇는 모양이 ‘ ’이니 옛날 장안을 한손에 쥐고 흔들던 벼슬을 한성부윤이라 하였음이 그 가까운 쓰임새였다.
그런데 ‘ ’이 쥐고 잘 쓰면 누가 감히 빼앗으려 들랴? 마치 제가 잘나서 쥐었고, 쥔 것을 제맘 내키는 대로 흔들었고, 또 저만이 계속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언제나 역사는 시끄러웠다. 엄밀히 말해 한번 쥐고 잘해보라 하였지 계속 쥐고 있으라는 법은 아니었는데 계속 쥐고 제맘대로 흔드니 쥔 것을 빼앗으려드는 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즉 한번 쥐고보니 그토록 못난놈도 하루 아침에 잘난 놈이 되어 제눈앞에 사람이 없는 듯 거만을 떨고, 없던 놈이 갑자기 생기고 보니 어제의 올챙이가 오늘은 나는 개구리가 되어 풀떡 풀떡 혼자 날뛰는 것을 꼴사나워 혼내주는 글자가 ‘爭 ’이다.
어디 처음부터 욕지거리로 혼낼 수 있었으랴? “보다 보다 못보겠네. 당신 정 그러기요?”하고 꼬치 꼬치 쌓인대로 따지니 아무 부러울 것 없고, 아쉬울 것없는 높은 친구는 내리쳐 보면 왈 - “니가 뭔데 그래. 건방진 놈”하고 드디어 맞섰다. 바로 이런 일은 한놈은 빼앗기지 않고, 한놈은 빼앗으려 드는 두 소리의 맞닿음이라 ‘ ’이다.
옥신각신하는 입씨름이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 식으로 왔다갔다 하여 점차 장마비 굵어지듯 굵어지는 법이니 이처럼 갈수록 입에 힘이 주어지는 현상을 두고 ‘ ’라 하였다. 그래서 쌓여온 원망이 불어나고 쥔자의 누렸던 권리가 크면 클수록 양편의 감정은 더욱 솟구쳐 급기야 자반뒤지기가 벌어지니 어디 눈에 뵈는 것이 있으랴?
제사권을 놓고 서로 헤게모니를 쥐려드는 무기와 무기의 맞닿음이 곧 ‘鬪’요, 창에 두 뿔 창이 대질리는 싸움이 곧 ‘戰’이다. 흔히 전투라 하지만 내용인 즉 결국 빼앗거나 빼앗기지 않으려는 싸움이니 ‘鬪爭 ’이요, 戰爭인 것이다.
웬걸? 주인이 모처럼 장에 나갔다가 북어 한 마리를 사와 명태 대가리를 개에게 던져 주었다 치자. 그토록 신나게 놀던 개들은 갑자기 맹수로 돌변하여 온동네 마당이 시끄럽게 으르렁대니 어디 주인이 가만히 있으랴? 당장에 두놈을 우리속에 쳐넣고 말리라. 이처럼 서로 양보하면 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시끄럽게 굴면 우리속에 든다는 이치를 예로부터 ‘ ’이라는 글자로 썼다.
시끄럽기야 어디 개들만 시끄럽나? 새들이 지저귀는 것도 시끄러운 일이다. 산속이라 하여 조용한 것은 아니다. 가끔 새들이 단잠을 깨노니 새들도 시끄럽다 치자면 한없이 시끄럽다. 이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 ’라 하였으니 서로 시끄럽게 굴면 원수사이가 되는 법이란 뜻이 아니랴?
이왕에 개만도 못한 일이 많으니 개이야기를 들자. ‘獨’이란 개와 벌레를 짝지은 글자로 버러지처럼 제밥만 챙기는 개는 고독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니 제것만 아끼는 놈에게 이웃이 있으랴? 밝아지는 세상에는 나무랄 사람마저 없으리로다.
아뿔사! 임신의 해에는 제발 싸움이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