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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 | 칼럼·시평 [서평]
사 냥
임명진 문학평론가 군산 수산 전문대 교수(2004-01-29 10:50:15)

ⓛ 십 여년 가까이 써온 소설을 모아 첫 창작집을 낸 만큼, 이병천은 비교적 과작(寡作)의 작가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십 수 편의 중․단편들에서 태작을 발견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그가 얼 만큼 소설 쓰기에 도저하고자 하는지 엿 볼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얼핏 봐도 상당한 품을 들이고 고심하여 씌여진 듯하다. 좀더 꼼꼼하게 읽을라 치면 그러한 느낌은 더욱 강해진다. 우선 그러한 느낌은 문체에서 생긴다. 이창작집 어느 쪽을 펼쳐도 깔끔하고 세련된 문체와 만나게 된다. 문장내에 내포되어 있는 깊은 뉘앙스와 소설 전후 문맥과의 교묘한 조화라든가, 화자의 신분에 걸맞지만 떄로는 낮선 표현들이 던지는 다소 익살스럽거나, 때로는 기괴스러운 악의 소굴로 이끌다가 갑자기 따뜻한 사랑방으로 이끌다가 갑자기 따뜻한 사랑방으로 이끌어 들이는 충격적인 토의 변화 등이 그것이다. 이점은 이 창작집의 말미에 부록된 평설에서도 적절하게 지적되어있듯이 작가의 투명한 감수성에 기인하겠지만, 사소한 표현에서까지 완벽을 기하려는 작가의 투철한 기질도 무관하지 않으리라.(그의 문테에 대한 찬사는 어떠한 비유를 쓰더라도 그의 소설 도처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탁월한 비유를 넘을 구 없으리라는 판단에 여기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겟다.) 아무튼 이병천의 소설은 그 문체가 지닌 향기로움과 아름다움으로 해서 독자로 하여금 소설적 미학을 맘껏 즐기도록 해준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지닌 미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안는다
② 이 창작집에 실린 소설들은 대부분 화자와 행위자라는 두겹의 창으로 내비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화자는 일관되게 ‘나’로 나타난다. 행위자는[더듬이의 廸]에서는 삼촌 유태형으로, [短刀의 집]에서는 인숙의 아버지로,[매]에서는 허두엽으로, [가위]에서는 가겠집 할머니로,[애기똥풀]에서는 형과 아버지로 .[농악꽃]에서는 이모로, [꼬레 한국]에서는 동창생들로, [휴전선]에서는 박선생과 황노인으로 나타난다.(「발굴」의 경우에는, '나‘를 화자겸 행위자로 볼 수 있으되, 시각에 따라서는 우윤과 그 가족들을 행위자에 포함시킨다면’나‘는 화자 쪽으로 화자 물러나게 된다) 이렇듯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를 화자로 내세운 소설적 기법은 어떠한 효과를 지니는가? ’나‘는 때로는 행위자를 관찰하기도 하고, 때로는 행위자의 사건에 깊이 관여하기도 한다.「短刀의 집」「애기똥플」에서 좌악과 부조리로 점철된 어른 세계에 눈 떠가는 소년의 서정 어린 시선이라든가, 「농약꽃」과 빛나는 졸업장에서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는 태도라든가,「휴전선」과 「가위」에서 분단된 상처를 발견하고 그 고통에 동참하는 자세라든가,「더듬이의廸 」과「발굴」에서 역사인식의 싶기를 가늠하는 몸짓이라든가,「꼬레한국」에서 수치스러운 우리의 현대사레 대한 참괴스러움을 드러내 보이는 입장이라든가 하는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의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바에 있어서 화자가 사사건건 개입하는 것은 어쪄면 역효과를 낼 수도 있으리라. 행위자에 얽힌 일련의 사건들을 일관되게 작품의 주제로 끌어 모으는 데 있어 화자는 경우에 따라서는 독자의 시선을 흩트리는 역할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행위자에 얽힌 절박한 문제들이 화자를 거쳐 독자에게 간접 전달됨으로 해서 그 절박성이 희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천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 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을 집요하게 끌어 당기는 그래서 문제에 더 자연스럽게 다가가도록 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어쪄면 화자의 사건과 행위자의 그것이 이중창으로 겹쳐지기 보다 심도 있고 복잡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 선지는 모르나 이병천의 소설은 간혹 독자를 어리 둥절 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화자인 ’나‘를 작가로 혼동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애써 화자와 작가를 분리시켜 놓았을 때 (그것이 가끔은 쉽지도 않지만) 그렇다면 작가는 어디에 숨어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될 경우, 더욱 그렇다. 이러한 어리둥절함은 작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대신 그 자리에 화자를 내세워 독자들과 직접 만나게 함으로써 행위자의 셋P에 독자를 더욱 밀도 있게 끌어들이려는 소설적 장치가 훌륭한 작품 일수록 더욱 강하다. 그 예로 서술과정에 보다 자전적 요소가 많이 삽입되었을 성 싶은 「휴전선」이나 「빛나는 졸업장」,「애기똥플」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창을 이용한 효과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短刀의 집」「더듬이의 廸」, 그리고 「매」등은 다소 뻑뻑하기는 하지만, 화자의 이야기와 행위자의 그것이 이중창에 비쳐져서 새로운 하나의 빛깔을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短刀의 집」에서 화자인 소년이 폭력과 허위로 가려진 어른의 세계에 눈떠가면서 그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삶의 편린들을 따뜻하게 발견하는 것이라든지, 「더듬이의 廸」에서 세속적인 삼각연애에 빠져있던 화자 경희가 역사 발전의 원리를 믿는 삼촌의 세계에 깊은 신뢰를 갖고 접근해가는 것이라든지,「매」에서 터무니 없는 린치에 시달린 ’나‘가 새디스트인 허두엽의 맹신을 이해하는 것 등이, 독자들에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이러한 이중창이 빚어낸 교묘한 어울림은 다른 차원에서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분단 문제를 비롯하여 외세․광주․농촌 문제 등 우리가 안고 있는 갖가지 절실한 단제들을 언급하면서도 여느 작가들처럼 목청 큰 사자후를 토해내면서 획일적인 창작 방법으로 쉽게 치달아버리는 식의 도식성에 빠지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중창의 기법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화자인 ’나‘의 시선에 포착된 그러한 단체들은 어디까지나 화자와 행위자라는 이중창안에서 다양한 변이형으로 나타남으로 해서 획일성과 진부성을 극복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러한 방법이 문제에 대한 정공법이 아니라고 불만을 품은 독자가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독자 탓할 일도 아니지만...)
③ 이쯤이면, 문체의 향기로움이나 소설적 장치로서의 이중창 기법이 「사냥」에서 소설적 미학을 발휘하는데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소두한대로나마 탐미한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체나 소설적 기법이 작가의 소설 쓰기와는 어떠한 관계를 맺는 걸까? 「사냥」이란 제목의 단편 서두에서 이 의문에 대한 열쇠를 찾을 수 있다.
무슨 놈의 물고기잡이가 그렇게도 복잡한가 하고 의아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그 점잔은 문화를 두고 말이다. 막고 품어버리든지, 아니면 백볼트 전기로 지져 버리든지 할 일이지 말이다. 그러나 천마에 그것은 사냥도, 그러다고 문화도 아니다. 보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문화성을 잃어버린 사냥이다. 세상의 모든 것과는 반대로 사냥은 원시적인 형태일수록 문화성을 갖는다. 매그넘이니 윈체스타 등의 쌍발․연발총으로 단숨에 쏴 버리는 행위에 무슨 문화고 나발이고가 있겠는가.
전기를 이용한 물고기 잡이나 총을 사용한 수렵에서 사냥의 문화성을 찾을 수 없다면, 주제의 단도입적인 토로로써만 소설의 ‘문화성’을 얻을 수 없으리라. 적어도 소설이 ‘문화성’을 지니려면 복잡한 ‘사냥’ 방법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리라. 또한 현실의 주제를 소설로 형상화시키는 과정에서 그 문화성이 생략된다면 독자와 소설과의 긴장관계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 이를테면 문체니, 시점이니, 구성이니, 인물의 성경이니 하는 것들은 곧 소설의 문화성을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다. 이병천의 소설에 있어서 찬란하게 빛나는 문화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문체와 이중창 기법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문화성을 양손에 등고 소설을 사냥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더듬기 내지는 발굴하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소설의 주제를 분단․외세․농촌문제에서 더듬기도 하고 때로는 우년체험이나 우리의 근 현대사에서 그것을 발굴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땅한 것이 사냥의 덫에 걸리면 거기에 적절한 문화성을 가한다 이미 다소 비약적인 애기가 되겠지만, 그의 데뷔작이「더듬이의廸」이고 최신작이 「발굴」인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또 하나의 비약이 되겠지만 유태형(「더듬이의廸」)의 더듬이나 고고 학자(「발굴」)의 발굴작업은 곧 이 작가의 역사에 대한(또한 역사 속의 모든 것에 대한) 집요한 더듬기나 발굴하기에 다름 아니다. 그는 어쩌면 거트올 드러나 현상만을 더듬는데 만족하지 낳고 심연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것들에 대한 발굴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발굴」에서 나가 화자인 동시에 행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정은 가능하다. 그는 어쪄면 화자의 입장에서 행위자의 입장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 역가에 대한 발굴 작업을 찬찬히 해낼 것이다. 발굴하기는 더듬기보다는 분명 적극적인 몸짓일 터이므로....,(그러나 그만큼 더욱 조심스러운 몸짓일터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말미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추정에 대한 변을 대신하다. 이제 나는 이렇게 그리고 얼마나 더 계속해서 감춰진 무덤의 유골과 유물을 언젠가 우윤에게 그랬듯 내 두손으로 정중하게 싸안아 볼 수 있을지......... 저 원시의 선사시대를 거쳐 고대와 중세 근대뿐만 아니라 이 찬란한 현대사 싸지 그 우뚝 세워졌던 역사 구조물들의 주춧돌을 들추기로 한다면 어김없이 드러나는 섬뜩한 무덤 이 땅 한반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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