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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 | 연재 [저널초점]
구경꾼의 시각
이 종 민 본지주간(2004-01-29 11:09:20)

차를 타고 가면서 바라보는 가을 거리의 노란 은행잎은 황량한 도화지에서의 삶을 푸근하게 감싸주는 듯하여 좋다. 그런데 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거리의 청소를 맡고 잇는 아저씨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끈질기게 붙어있다가 아침마다 조금씩 떨어지는 나뭇잎이 성가시다. 그래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만을 쓸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비를 들어 은행나무를 후려친다.
방학을 맞이한 대학의 교정은 한가롭기만 하다. ‘영어장사꾼들’의 선전물이 요란스럽기는 해도 드문드문 눈에 띄는 학생들의 발걸음에 여유가 있어 좋다. 교정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는 모습은 이러한 여유로움에 또 다른 정취를 더해준다. 그런데 이런 눈을 반겨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교정 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는 수위 아저씨들이다. 관상목을 소담스레 덮고 있는 하얀눈을 ‘무지막지’하게 털어낸다. 그대로 놓아두어 나무가 망가지게 되면 이로 인해 질책을 당하기 때문이다.
음악공연을 주관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면 어린이와 함께 와서 공연 분위기를 해치는 이들이 ‘반문화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젋은 부부 ‘구경꾼’의 입장에서는 ‘8세 이하의 어린이는 입장할 가없습니다“라는 선전물이 물인정스럽고 ’반문화적‘이다.
비를 들어 무지막지하게 은행잎을 털고 있는 아저씨들의 ‘몰취미적’ 행위에 의아해 하면서, 또 눈이 쌓이자마자 털어내기에 여념이 없는 수위 아저씨들의 ‘반문화적’ 행위에 놀라와 하면서, ‘상령산 중광지곡’의 소위‘마음을 다스리는 음악’이 흐르고 있을 때 갑자기 터져나오는 어린아이들의 고함소리에 초조해 하면서, 구경하는 사람과 실제 일(삶)을꾸려나가는 사람의 입장이 얼마나 다른가를 새삼 되뇌이게된다. 그렇다면 문화라고 하는것은 과연 무엇인가?
‘구경거리’인가 아니면 ‘사람(살아가는 것)’과 연관된 것인가? 또 문화저널의 입장은 어떠한가?
‘문화에 대한 따듯한 사람과 인식을 바탕’으로 한건강한 지역문화의 발전을 표방하면서, 그 문화의 건강성이라는 것이 우리의 구체적 삶으로부터 우러난다는 것을 말로는 항상 내세우면서 과연 우리 ‘문화저널’이 그구체적 삶에 근거한 문화를 추구해왔는가? 어렵게 하나하나의 행사를 마무리할 때마다 들려오는 ‘구경꾼들’의 허심탄회한(?) 촌평에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자가용타고 단풍구경 다니며 청소부 아저씨들의 행위를‘반문화적(?)’이라고만 탓하는,실로 ‘반문화적인’여유로움을 그들에게서 확인하고는 이에 분개까지 하면서도, 우리 스스로는우리의 구체적 삶에 대해 구경꾼의 입장에 서있었던 것이 아닌가?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려는 문화라는 것을 혹 수위아저씨나 청소부 아저씨들의 절박한 삶과는 동떨어진 어떤 곳에서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살아남기에 연연하느라‘문화를위한문화’를 추구하는 소위 문화주위’의덫에 빠져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은 창간 3주년 기념으로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초청공연이라는 문화행사를 구려가면서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처럼 우리의 역량에 버거운 행사를 지금 이 마당에 꼭 기획을 해야 했던가? 이러한 의문은 공연음악의 내용이 우리의 심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제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덜 절박한 사람들에게 더 잘어울리는 음악일게다. 살아가는 것이 각박하고 그래서 한이 맺힌 사람들에게는 그맺힌 한을 ‘풀어주’거나 그것을 변혁의 의지와 힘으로 추스릴수 있게 해주는 음악이 더 절실할 것이다.
물질만늘주의와 치열한 경쟁의 부추김으로 인하여 우리들 심성이 거칠고 조급해져가는 요즘, 특히 미국식의 광란스러운 ‘풀음’(혹은 ‘풀이’)의 음악이 무분별하게 횡행하여 우리들 정서를 더욱 성마르게 이끌어 가고 있으며, 게다가 이러한 것에 대항하려는 노력조차 형상화에 실패하여 이념적 구호의 조잡한 도식으로 메말라버릴 것 같은 조짐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다스림’의 음악이 갖는 힘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이 지금 이순간에 있어 가장 절실하고 또 맘껏 키워나가야 할 우리들의 정당한 분노와 정의에의 열정까지를 ‘다스려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이러한 염려를 우리는 얼마전에 있었던 ‘ 이철수판화전’ 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문제가 김영동의 음악이나 이철수의 판화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차분한 예술세계가 기득권자들의 교묘하고 철저한 문화적 공세에 역이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결국 이러한 문화행사가 지금 당장 절실한 것 즉 우리의 구체적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희석하는데 기여할 수도 있었겠다는 의심은 남아 있는 것이다.
또 행사의 후원을 조금은 원활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표방했던 ‘영호남의 문화적 교류’라는것이 과연 그것이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었던 것 즉 고질적인 지역감정의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되었으며 한반도의 복잡한 정치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문제가 ‘문화’라는 것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한가로운 ‘구경꾼’의 입장인가? 이것이야말로 20년대식의 ‘문화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관에서 주도하고 있는 각종 영호남교류와 구분되는 것이 무엇인가? 통일인사들을 감옥에 가둔채로 펼쳐진 남북통일음악제를 통하여 통일에 대한 무슨 대단한 의지가 있었던 것처럼 으시대고 있는 정부관료들의 태도와 다른게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이러한 것은 이번 문화행사의 원래 취지를 고려한다면 지엽적인 것이라 할 수고 있다. 우리의 문화예술이 방향을 잡아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인하여 극심한 문화적 혼란을 겪고 있는 마당에, 그 건강한 방향성을 우리 고유의 정서에 근거한 전통음악에서 찾고 이를 오늘날의 정서에 맞게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모범적 사례를 접할 수 있게 한다는 근본 취지의 강건한 타당성을 우리는 여전히 믿고 있다. 사이비 고급문화와 퇴폐적인 상업적 대중문화의 틈바구니에서 소외감과 두려움에 시달려야하는 우리시대의 건강한 민중들을 생각할 때 이철수의 판화는 물론 김영동의 창작음악이 갖는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행사를 꾸려나가는 우리의 자세가 혹시나 주변의 절실한 삶에 대하여 지나치게 방관자적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점과 문화가 무슨 만병통치약이나 되는양 호들갑을 떨지 않았나 하는 점에 있다. 우리가 혹 문화적 실천의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즉 자신들의 활동을 완전히 중심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잘못-에 빠지지는 않았는가 하는 염려를 다시 한해의 활동계획을 세우면서 해보는 것이다.
우리가 눈멀지 않게 항상 비판을 서슴치 않는 한 독자(이번 호의 특별기고)의 지적은 이런 의미에서 타당하며 시의적절하다. 우리는‘문화적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는 어느 비평가의 말을 항상 염두에 둘 것이다. ‘사람들이 문화에 의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며 역사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살 기회조차 박탈당해 왔다’는 사실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사회와 같이 ‘문화에 시간을 보낼 틈이 없는 사회에서조차 문화가 중요성을 갑자기 띠게 되는 시기와 장소가 있다’는 엄연한 진실 또한 항상명심하며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삶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격려와 비판과 감시가 항상 함께 하기를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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