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고도 왕궁유적
지명(地名)의 사전적 의미는 ‘땅 이름’을 일컫는다. 이러한 지명들은 지형의 형세나 풍토, 기후, 생산물, 하천이나 교통과의 관계, 정치나 군사적 사건으로부터 유래되거나 역사적 사실로부터 기인해서 지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과거의 지명이 현재까지도 계속 지속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게 변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비록 바뀌어 진 지명이라 할지라도 대부분 그 지방에서만 부르는 고유지명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고유지명은 문헌이나 구전을 통해 오늘에 이른다.
이번에 소개할 왕궁리 유적은 그 지명에서 어느정도 유적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곳으로서 인근한 금마와 함께 문헌에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기록되어 오늘에 전하는 곳이라 하겠다. 즉, 이 유적은 예부터 궁터로 인식 되어진 곳으로 현재에도 마을 주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궁터로서의 인식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대한 문헌의 기록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지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최소한 자연환경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은 풍부한 물과 비옥한 땅이 있는 살기 좋은 곳에 정착하기 마련으로 이런 면에서 볼 때 이곳 익산은 넓은 평야와 금강 및 만경강의 한 지류가 흐르는 풍부한 물이 있는 관계로 과거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살기좋은 생활의 터전이 되었을 것이며, 왕궁리 유적 역시 이러한 좋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적개요
왕궁리 유적은 노령산맥의 한 지맥인 용화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능선남단의 해발 30~40m 지점에 자리한다. 즉, 이 지점은 금마면 소재지로 전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약2㎞ 정도 가다보면 도로 좌측에 소나무와 그밖에 여러 잡목이 우거진 낮은 야산이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 익산군 왕궁면 왕궁리 634번지 일대에 속한다. 이 유적의 동편 1㎞ 지점에는 제석사지가 있으며 서편에는 용화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만경강과 합류되는 도천(일명 옥룡천)이 흐르고 있다. 이 유적을 남북으로 반분하면 북편은 비교적 자연구릉으로 소나무를 비롯한 여러 잡목들이 자생하고 있고 그중 일부는 과수원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에 비해서 남쪽편은 5층 석탑을 중심으로 석탑에서 남쪽으로 21미터 지점과 140미터 지점에서 각각 단을 이루는데 그중 하단의 아래는 넓은 광장으로 조성되어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각 단은 평탄한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상단과 하단의 일부는 1977년 조경사업으로 잔디와 관상수가 심어져 있고, 하단부에는 현재 왕궁리 유적 발굴 조사단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 유적내에는 10여기 이상의 민묘들이 들어서 있다.
이 유적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는 1976년과 1977년에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서 실시되었는데, 이 당시 밝혀진 유적의 규모는 동서 약 230미터, 남북 456미터 정도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 당시 발굴은 5층석탑 주변과 유적지 일부만을 조사하였던 관계로 유적에 대한 전반적인 성격규명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과 이 유적에 대한 올바른 성격규명을 목적으로 1989년부터 문화재 연구소 주관하에 발굴이 착수되어 현재까지 계속 진행중에 있는데 유적의 중요성과 방대한 규모로 인해 장기간 조사될 전망이다. 지금까지의 조사는 5층석탑 주변(1989년 조사)과 5층석탑 북편 및 동편건물지, 와요지(1990년 조사) 그리고 5층석탑 서편과 남편 축대부근이(1991년) 되었는데, 이 중 5층석탑 서편에 위치한 돌로 쌓은 축대의 발굴은 매우 우연히 이루어졌다. 원래 이곳은 적토장으로 물색되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적토장 준비중에 예상치 못했던 이 유구가 출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만약 조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흙을 버렸다면 어쩌면 영원히 묻혀 버렸거나 최소한 몇 년 동안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땅속에 묻혀있는 과거 사람들의 흔적을 반드시 우리들의 손에 의해서 모두 드러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후손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우려하는 바는 그 유적의 올바른 성격규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요소들을 자칫 소홀히 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렇게 된다면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보다도 더 염려스러운 것은 언제든지 파괴되어 그 유적이 사장되어 버릴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고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주말이면 카메라를 메고서 현장 조사를 나가기 일쑤이다. 하나의 유적이라도 살려 보겠다는 의지에서 그러하리라. 우리는 조사시 파괴된 유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럴땐 왠지 씁쓸한 마음이 앞선다. 조금만 일찍 찾아냈거나 좀더 파괴되지 않고 견뎠더라면…. 문화시민을 자부하기에 앞서 우리의 문화를 보호하고 지키려고 했던 마음가짐이 얼마나 있었는지? 요즈음은 그래도 전보다는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져 애써 지키고 보호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사결과 5층 석탑 북편 건물지는 금당지와 강당지로, 와요지는 통일신라 시대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축대 및 주거지에 대해서는 아직 그 성격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왕궁리 유적이 소재하는 익산군에 대한 문헌을 살펴보고, 현재까지 조사된 유구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문헌고찰
왕궁리 유적이 소재하고 있는 익산군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이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문헌에 중요한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들 문헌을 살펴보면, 익산군은 구익산군의 치소였던 금마를 중심으로 마한의 도읍이었다는 설과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남천한 곳이라든가 백제의 일시 천도지였거나 별도읍이었다는 설 등 여러시대에 걸쳐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와같은 기록들은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동국여지승람』『구익산군지』등의 사료들과 중국 사서인 『후한서』와 『위지』「동이전」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금마가 마한의 도읍지였다는 설은 『삼국사기』「견훤전」과 『삼국유사』「마한조」그리고 『고려사』「지리지」등에 나타나며 중국 사료인 『후한서』「한전」등에도 나타나 있다. 또한, 준왕이 남천한 곳이라는 기록은 『삼국유사』『고려사』「지리지」『제왕운기』하권 『동국통감』『응제시주』『해동역사』「마한조」정다산의 『아방강역고』『후한서』『삼국지』등에서 접할 수 있으며 백제의 별도였거나 천도지였음을 엿볼 수 있는 문헌으로는 『삼국유사』「마한조」김정호의 『대동지지』「익산군조」, 『관세음 응험기』등이 있다. 이들 문헌중 주목할 만한 기록으로는 중국의 6조때에 육과 등 여러 사람이 필사한 『관세음 응험기』가 있는데, 이는 비록 외국의 자료일 뿐 아니라 그 기록자체가 응험전 이라는데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 책의 말미에 「백제의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금마)란 곳에 도읍을 옮기어 새로운 정사를 지었다. 그런데 639년 11월에 큰 뇌우가 있어 제석정사가 다 불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금마 천도설을 가장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금마는 마한과 백제의 도읍지였거나 별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러한 도읍지에서 위치한 궁궐로서 왕궁리의 왕궁마을 뒷산 구릉지대(일명 모질메)가 상정되고 있다.